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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노래” (시편 46편 1-11절) 10/29/2017

제가 한국에 있는 대학 친구들과 카톡방을 하고 있습니다. 친구들의 이런 글 저런 글을 보다가 문득 이번주가 종교개혁 500주년이라는 글을 제가 올렸습니다. 사실 종교 정치 이야기는 삼가기로 되어 있는데 역사적 사건 정도는 용납이 되고 있습니다.
고맙게도 카톡방을 운영하고 있는 친구는 제 글을 보고 곧 바로 종교개혁에 대해서 찾아 보기 시작했다고 글을 올렸습니다. 사실 이 친구가 카톡방에는 정치 종교 이야기는 삼가자고 원칙을 내세운 친구인데 제 글을 보고 종교 개혁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어서 저도 마음도 놓이고 한편으로는 아주 기뻤습니다. 이 친구는 무신론자입니다.
그러면서 계속 글을 달기를 개혁이 혁명보다 어려운데 자기는 개혁에 대해서 관심이 많아서 루터의 종교 개혁에 대해서 알아 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 친구는 산부인과 의사인데 개업 초기 좋지 않은 일이 생겨서 산과는 그만 두고 부인과만 운영하고 있는 친구입니다. 아마도 의료 개혁에 큰 관심을 두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한편 개혁이 혁명보다 어렵다고 여기고 있는데 그 말은 타당하다고 봅니다. 혁명은 영어로는 revolution, 개혁은 영어로는 reformation입니다. 혁명은 완전히 뒤집어 놓는 것이라면 개혁은 천천히 바꾸는 것이라고 많은 분들이 여기고 있습니다.
아마 그 친구는 세상을 한꺼번에 뒤집는 혁명 보다는 천천히 바꾸는 개혁에 관심이 많던 차에 루터의 종교 개혁에 대해서 배우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마틴 루터가 처음부터 개혁을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학자로서 95개 논제를 가지고 토론하자는 뜻에서 비텐베르크 성 교회문에 게시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는 종교 개혁이 되어 버린 셈입니다. 이것이 바로 500년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후에 역사학자들에 의해서 루터가 최초의 종교개혁자로서 인정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루터 전에도 종교개혁을 시도한 그룹이 있습니다. 체코의 얀 후스라는 사람입니다. 루터 보다 100년전에 교황청과 논쟁을 벌이게 됩니다. 그는 이미 체코 말로 설교를 하기 시작했던 사람입니다. 이 당시는 예배시 항상 라틴어만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이 때 이미 후스는 면죄부 판매에 대해서 비판하고 나섰습니다. 결국 파문을 당합니다. 마지막 재판 자리에서 끝까지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진리의 유일무이한 원천은 성서에 있다.”
그러나 끝내 그는 이단으로 정죄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화형을 당합니다. 그 날은 정확히 1415년 7월 6일. 루터의 종교개혁은 1517년이니 정확히 후스가 화형 당한 후 102년만에 루터를 통해서 종교개혁은 재개된 셈입니다.

그러므로 루터를 최초의 종교개혁자로 인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미 100년전부터 종교개혁은 시작된 셈입니다.

후스와는 달리 루터는 목숨을 건질뿐만 아니라 루터란 교회를 세웠고 종교 개혁가로 인정 받을수 있었는데, 가장 큰 이유가 있다면 많은 학자들은 인쇄술의 발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구텐베르그가 발명한 인쇄기를 가지고 루터의 사상이 책으로 쉽게 만들어져서 많은 사람들에게 보급되었고, 이미 교황청이 개혁의 불을 끄기가 어려워졌던 것입니다. 결국 많은 학자들은 인쇄기로 인해서 루터는 성공을 할수 있었다고 간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역사적으로 보면 절대로 무시할수 없는 사실입니다. 루터가 성경을 최초로 독일어로 번역을 하였는데 인쇄기로 인해서 쉽게 평민들도 성경을 접할수 있게 된 것도 무시할수 없는 중요한 사실입니다.

그러면 한 가지 궁금한 생각이 듭니다. ‘인쇄기등 정보체제만 빨라진다면 개혁은 쉽게 일어날수 있는가?’ 그러면 요즘은 그 어느 때보다 인터넷도 발달되고 비교할수 없이 소통이 빠른 시대가 되었으니 개혁은 쉽게 일어날수 있을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줄 압니다. 만일 그렇다면 제 친구 같은 많은 사람들이 개혁에 관심을 두겠습니까? 인쇄나 정보 통신을 넘어 다른 중요한 무엇이 있지 않을까요? 그것이 무엇일까요?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성공할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인지 찾아 보면 실마리가 잡힐줄 압니다. 오늘 부른 첫번째 찬송 585장은 마틴 루터가 작사 작곡한 곡입니다. 이 찬송은 종교 개혁 주일에 늘 불리어지곤 합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 되시니 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옛 원수 마귀는 이 때도 힘을 써 모략과 권세로 무기를 삼으니 천하에 누가 당하랴.” 사실 마틴 루터는 오늘 본문 말씀 시편 46편으로 영감을 받아 585장을 작사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상고하며 참 종교개혁의 시작은 어떠했는지 살펴 보고자 합니다. 1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사실 루터 처럼 세상에서 큰 어려움을 당한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그는 당시 가장 큰 권력을 손에 쥔 두 사람의 공격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한 사람은 교황 레오 10세이고 또 한 사람은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였습니다. 교황에게는 파문을 당하고 카를 5세가 주관하는 보름스 국회에서 재판을 받습니다. 이에 루터에게 큰 힘을 준 것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얼마전 류시화 시인의 책에서 스페인어로 ‘퀘렌시아’에 대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피난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투우장에서 투우사와 싸우다가 지친 소는 자신이 정한 그 장소로 가서 숨을 고르며 힘을 모은다고 합니다. 바로 그 곳이 퀘렌시아입니다. 물론 사람이 정해 준 장소가 아닙니다. 소가 스스로 정한 장소입니다.
투우가 진행되는 동안 소는 어디가 자신에게 가장 안전한 장소이며 숨을 고를 수 있는 자리인지를 살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장소를 퀘렌시아로 삼습니다.
투우사가 소와의 싸움에서 이기려면 그 장소를 알아내어 소가 그곳으로 가지 못하게 막아야 합니다. 투우를 이해하기 위해 수백번 넘게 투우장을 드나든 헤밍웨이는 이런 글을 썼다고 합니다.
“퀘렌시아에 있을 때 소는 말할 수 없이 강해져서 쓰러뜨리는 것이 불가능하다.”

사실 오늘 시인은 아니 마틴 루터는 이렇게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퀘렌시아시니….”
하나님을 퀘렌시아로 삼은 자는 그 누구도 쓰러뜨릴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 퀘렌시아는 어떤 곳일까요? 4, 5절 말씀입니다.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이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시내가 흐른다는 것은 생명의 물이 흐른다는 것입니다. 퀘렌시아에서 새롭게 힘을 얻게 됩니다. 마치 소들이 퀘렌시아에서 새롭게 힘을 모으듯이 말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피난처 곧 퀘렌시아에서는 또 어떤 일이 벌어지나요? 6절 말씀입니다.
“뭇 나라가 떠들며 왕국이 흔들렸더니 그가 소리를 내시매 땅이 녹았도다.”
말씀드린대로 마틴 루터 시절에도 뭇 나라가 떠들었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세상에서 지치다가 피난처에 들어가서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습니다. 땅이 녹는 것을 봅니다. 그 땅은 바로 자기를 치러 달려 오는 교황과 황제의 세력들이 서 있는 땅입니다. 그 땅이 언젠가 녹아 없어지는 것을 봅니다. 어디에서 피난처에서 퀘렌시아에서…. 그래서 루터는 찬양합니다. 7절 말씀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계속 여호와를 피난처로 삼고 있는 시인은 노래합니다. 8, 9절 말씀입니다.
“와서 여호와의 행적을 볼지어다 그가 땅을 황무지로 만드셨도다. 그가 땅 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는도다.”
피난처는 단순히 쉬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보는 곳입니다. 생각하는 곳입니다. 기억하는 곳입니다.
어느 유대교 랍비가 다음과 같은 멋진 글을 썼습니다.
“Memory means promise of a future.” (기억은 미래에 대한 약속입니다.) 무엇을 기억하느냐가 어떤 미래를 가져 오는지를 알려준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Tell me what you remember, and I shall tell you who you will be.”
(당신이 기억하는 것을 말하세요. 당신의 미래를 말해 줄게요.)
하나님의 피난처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보고 기억할 때 그 기억한 일들이 바로 기억한 자들의 미래가 되는 것입니다. 피난처에 거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미래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기억한 것이 곧 바로 미래가 되나요? 10절 말씀입니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피난처에서 때로는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때로는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 그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옵니다.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피난처에서 가만히 기다리는 자들은 이 놀라운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아울러 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들은 하나님께 화답합니다. 11절 말씀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모든 것의 시작은 피난처입니다. 이처럼 마틴 루터는 시편 46편을 의지하여 피곤할 때마다 유혹이 올 때마다 그는 피난처로 들어 간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 개혁을 잘 마친 것입니다.
사실 마틴 루터를 괴롭혔던 것 중 하나는 말씀드린대로 세상의 권력입니다. 루터가 보름스 국회에 섰었는데 이틀 연속으로 서게 됩니다. 이틀간 있었던 일을 레스턴의 기록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심문관이 쩌렁거리는 소리로 말했다. ‘마르틴 루터! 폐하께서는 그대의 이름이 들어 있고 해외로 널리 유포된 책들을 모두 이곳으로 가져오라고 명령하셨다. 나는 독일어로 쓴 것이든 라틴어로 쓴 것이든 이 모든 책들을 참고하겠다. 이 책들을 그대가 쓴 것이 맞는가?’
증인석에 있던 루터는 갑자기 용기를 잃고 그답지 않게 자신감을 잃었다. 그리고 조용히 대답했다. ‘그 책들은 제가 쓴 것이 맞습니다. 그것 말고도 더 있습니다.” …루터는 식은 땀을 뻘뻘 흘리기 시작했다.” 이에 루터를 응원하는 사람들은 크게 실망합니다.
반면 그 다음 날입니다. 계속 인용합니다.
“심문관인 에크 박사가 주요 쟁점을 다시 물었다. ‘그대의 저작물이 담고 있는 모든 내용에 대해 변론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아니면 그 내용을 전부 또는 일부 철회하기를 바라는가?
…….
루터는 당당하게 말했다. ‘네 그렇습니다. 저는 로마 교황에 반대하는 글을 썼습니다. 그리스도교 세계를 도탄에 빠뜨리고 사람들의 영혼을 망칠 잘못된 교리와 난잡하고 수치스러운 행위들을 비난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을 향해 되물었다. ‘교황이 내세우는 율법과 사람에 대한 교리가 성실한 신자들의 양심에 거리낄뿐 아니라 옴짝달싹 못하게 고통을 주는 것이 확실치 않던가요?’
‘그렇지 않다!’ 겁에 질린 황제가 소리쳤다.”
이처럼 두번째 날은 당당했습니다. 왜 루터가 하룻만에 이렇게 달라졌나요? 그는 피난처에 들어 갔던 것입니다. 그는 노래했던 것입니다.
“내 힘만 의지할 때는 패할수밖에 없도다. 힘있는 장수 나와서 날 대신하여 싸우네….”

이로써 알수 있는 것은 마틴 루터가 역사적으로 놀라운 업적을 이룰수 있었던 이유는 그는 말씀을 신뢰했습니다. 시편 46편을 사랑했습니다.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퀘렌시아를 확실히 알았던 것입니다.
앞으로도 종교개혁이 되든지 혁명이 되든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 삶이 중요합니다. 이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하신 일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십니다.

그러면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은 어디에 계실까요? 당연히 카톨릭 성당에는 있지 않았습니다. 마틴 루터의 피난처는 놀랍게도 예상치 못한 곳에 있었습니다. 언젠가 말씀드린대로 루터에게는 디모데와 같은 인물이 있었습니다. 멜라히톤입니다. 그에게 무심코 쓴 편지가 많은 논란도 불어 왔으며 그러나 새롭게 루터를 보게한 편지입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죄를 짓게, 대담하게 죄를 짓게.”
좀 이상하죠. 그러나 계속 들으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자네의 신앙이 자네의 죄보다도 커지게 하게나…….우리는 세상의 죄를 모두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알게 된 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설령 우리가 하루에도 백만 번 간음하고 살인한다 하더라도 죄가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왕국을 파괴하지는 못한다네.”
사실 마틴 루터의 가장 중요한 퀘렌시아는 자신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왕국이었습니다. 자기의 어떤 죄도 자기 안에 있는 이 왕국을 파괴하지 못한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로 인해서 루터가 죄를 마음껏 짓게 된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죄와 더 멀어집니다. 사실 자기의 어떠한 죄도 이미 자기 안에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왕국을 무너뜨릴수 없었던 것을 믿었기에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노래한 것입니다.
“이 장수 누군가 주 예수 그리스도 만군의 주로다.”

그러면 루터는 자기만 어떤 죄도 이길수 없는 그리스도의 왕국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했을까요? 그럴리 없습니다. 만인 제사장설을 만든 것으로 보면 알수 있습니다. 자기 안에 이 위대한 그리스도의 왕국이 세워진 것을 믿는 자들은 예수를 믿는 모든 자들 안에도 이 위대한 왕국이 세워진 것을 믿게 되어 있습니다. 이 때 참 종교개혁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 종교개혁 500 주년을 맞이하여 예배를 드립니다. 참 종교개혁은 이웃의 죄를 파헤쳐서 고쳐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된 우리 안에 우리들의 어떠한 죄도 파괴할수 없는 그리스도의 왕국이 세워진 것을 새롭게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 때 우리는 새로운 샘물이 우리들 안에 흐르고 있음을 맛 볼 것입니다. 새로운 미래가 펼쳐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영원한 피난처가 되십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장로교에서는 칼빈이 시작한 스위스 제네바 종교개혁을 빠뜨릴수는 없습니다. 오늘은 스크린으로 대신하겠습니다.

네명의 동상인데 앞으로 좀 나온 사람이 물론 칼빈입니다. 왼쪽부터 파렐, 칼빈, 베즈, 죤 녹스 이렇게 네 명이 제네바 종교개혁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사항은 이들 네명은 모든 스위스 사람이 아닙니다. 죤 녹스는 스코틀랜드 사람이고 나머지 세 사람은 모두 프랑스 사람들입니다. 곧 제가 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들은 모두 이민자들입니다.
이민자들이 종교개혁에 더 깊게 영향을 끼칠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퀘렌시아를 소중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아니 항상 피난처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들 모두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이들도 모두 마틴 루터의 노래를 부른 자들입니다.
사실 어제도 아주 뜻 깊은 자선 음악회를 가졌습니다. 막 시작한 케냐 이민교회를 위한 음악회를 통해서 함께 이민자들은 Sign of Hope(희망의 싸인)이 되었음을 축하하는 음악회였습니다. 어느 케냐 교우님이 음악회 후에 저에게 와서 말하기를,
“두 교회가 함께 온 세상에 희망이 되십시다.” 우리는 희망의 싸인이 될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다면…, 그리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시인의 노래를 함께 부르십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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