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에 계신 이기훈 목사님의 “그 분의 것입니다”라는 글입니다.
선악과는 그분의 것입니다.
누구도 그 과실을 먹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피조물일 뿐
창조주를 대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영광은 그분의 것입니다.
이 말은 사람에게 어울리는 용어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영광을 그분께 드리는 자일 뿐
얻는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소유권은 그분의 것입니다.
누구도 그것을 취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청지기일 뿐
주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청지기 헌신 주일로 지킵니다. 곧 지난 1년간 “그 분의 것입니다”라는 고백을 하면서 살았는지 살펴 보면서 청지기의 축복을 다시금 확인하며 또한 결단하는 날입니다.
종종 이런 말을 들으셨을줄 압니다. 태어날와 죽을 때 사람의 손 모습이 다르다는…. 세상에 태어 날 때는 주먹을 쥐고 태어납니다. 세상을 떠날 때는 손을 피고 떠나갑니다. 세상을 떠나면서 우리들의 손들은 노래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 분의 것입니다.”
그러면 “그 분의 것입니다”라는 고백을 하면서 사는 참 청지기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아니 이 노래를 고백할 때 어떤 역사가 펼쳐질까요? 매일 매일 살면서 이런 고백을 할 때 어떤 축복을 누리게 될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상고하며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1절 말씀입니다.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및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 곧 여호와께서 지혜와 총명을 부으사 성소에 쓸 모든 일을 할 줄 알게 하신 자들은 모두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할 것이니라.”
오늘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성소를 짓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1절 말씀을 보면 두 가지를 알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두 사람 브살렐과 오홀리압 그리고 또 몇 사람들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셨습니다. 이들로 하여금 성소를 짓게 하십니다. 일단 스크린으로 성소를 보시는 게 도움이 될줄 압니다.
가운데 성소가 있구요. 성소를 둘러싼 울타리가 있는데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도록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입니다.
자 그러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성소를 짓게 하셨는데 이 명령을 듣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아니 모세는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얼마전에 하나님을 배반하고 금송아지를 만든 사람들입니다. 모세가 십계명 돌판을 몇 번 받습니까? 두 번 받지 않습니까? 두 번 받을수 밖에 없었던 이유도 아실줄 압니다.
모세가 처음에 십계명을 받고 좀 시간이 지체되어서 시내산 아래로 내려 왔습니다. 그랬더니 난리가 나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아론에게 요구해서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 앞에서 춤추고 난리가 난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기 32: 9, 10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 그런즉 내가 한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화가 난 모세는 십계명 돌판을 땅에 던져서 깨뜨립니다. 그런데 얼마 후 하나님께서 모세의 중보의 기도를 들으시고는 새로운 기회를 주십니다. 모세는 다시 시내산으로 올라가서 두번째 십계명을 받고 내려 옵니다.
물론 금송아지를 섬긴 자들 중에 삼천명은 죽임을 당합니다. 그러나 나머지 사람들은 목숨을 부지합니다. 결국 삼천 명과 더불어 죽을수 밖에 없었던 자들에게 곧 하나님은 죄를 지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당신의 성소를 짓도록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살려 주시는 것만해도 감사한데 주의 성소를 짓게 해 주시다니…, 하나님의 놀라운 자비하심은 성소를 짓도록 허락하심으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모세도 놀라고 백성도 놀랐을 것입니다. 역시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자비만으로 성소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닐줄 압니다. 곧바로 하나님은 큰 고민이 생기셨을줄 압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소 짓는 것을 맡기는 것은 좋은데 만들수 있는 실력을 갖춘 자가 하나도 안 보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민족은 우상은 많이 만들었을 것입니다. 애굽 사람들이 많이 만들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모세가 없는 사이 금방 금송아지 하나를 뚝딱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자 그러면 금송아지를 만드는데 익숙한 이들에게 어떻게 당신의 성소를 맡길수 있겠습니까? 2절 말씀입니다.
“모세가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및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 곧 그 마음에 여호와께로부터 지혜를 얻고 와서 그 일을 하려고 마음에 원하는 모든 자를 부르매.”
곧 하나님께서는 몇 몇 사람들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셨습니다. 요즘식으로 하면 은사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너무도 잘 아셨습니다. 아무도 당신의 성소를 만들수 없음을…. 방법은 하나입니다. 당신의 지혜와 총명을 내려 주시면 됩니다. 하나님은 진실로 진실로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그러면 지혜와 총명을 받은 사람들은 밥만 먹고 실컷 놀다가 시간이 되어 재료를 손에 잡으면 쉽게 만들어지곤 했을까요? 금 은 동과 나무를 손에 잡기만 하면 멋진 작품이 나왔을까요? 그럴리 없습니다. 머리로는 지혜와 총명은 받았지만 손은 금송아지를 만들던 손입니다. 머리와 손을 연결시키는 일은 본인들이 해야 합니다.
제가 지난번 안식월에 파리를 다녀 왔습니다. 다시 한번 파리를 방문하게 되면 꼭 한번 더 가고 싶은 곳이 로댕 박물관입니다. 사진으로 보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저의 가슴에 작품들이 살아서 들어 옴을 느꼈습니다. 고정되어 있는데도 움직이는 느낌을 받게 하는 작품들이었습니다. 후에 로댕의 책을 구입해서 읽어 보았습니다. 왜 로댕의 작품이 살아 움직이게 느껴지는지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의 바램 중 하나가 움직이지 않는 작품 안에 움직이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어느날 거리를 지나는데 상점 안에 진열된 놋으로 만든greyhound를 봅니다. 움직이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조각가를 보니 자기의 스승이었습니다.
그 후 만들어 보고 또 만들어 봅니다. 수 없이 만들어 봅니다. 결국 그의 작품은 정지되어 있지만 움직이는 작품이 되어 간 것입니다.
브살렐과 오홀리압도 로댕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와 총명이 머리에서 손까지 전달되기 까지 연습하고 또 연습했을줄 압니다. 만들어 보고 또 만들어 봅니다. 최고의 작품을 만들기 위하여….
어느 순간부터 기적을 체험합니다. 자신들이 만든 작품을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자기들이 만드는 것 같지만 자기들이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이 자기들의 손이 되어 있음을 느낍니다. 자기들의 실력보다 엄청난 작품을 만드는 체험을 합니다. 그러면서 이들은 고백했을 것입니다.
“지혜와 총명은 그 분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이런 노래를 부르면서 성소를 만들어 가고 있는데 더 놀라운 일을 경험합니다. 3절 말씀입니다.
“그들이 이스라엘 자손의 성소의 모든 것을 만들기 위하여 가져온 예물을 모세에게서 받으니라 그러나 백성이 아침마다 자원하는 예물을 연하여 가져왔으므로.”
이스라엘 백성들 중 성소를 만드는 일에 직접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은 예물을 모세에게 가져 왔습니다. 모세는 받은 예물을 성소를 만드는 자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런데 백성이 아침마다 예물을 계속 가져 왔습니다. 성소를 만드는 속도에 비해서 너무 많이 물건이 쌓입니다. 어떻게 합니까? 4, 5절 말씀입니다.
“성소의 모든 일을 하는 지혜로운 자들이 각기 하는 일을 중지하고 와서 모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백성이 너무 많이 가져오므로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일에 쓰기에 남음이 있나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 오늘 모세에게 바쳤습니다. 그리고 하룻밤을 잡니다. 자고 깨어나니 또다시 살아 있다는 게 감사한 생각이 듭니다. 삼천명은 죽었는데 자기는 살아 있다고 생각이 들고 또 듭니다. 아침마다…. 그러니 아침에 일어나면 예물을 드립니다. 그 다음날도 또 예물을 드립니다. 연하여 드립니다.
아침마다 “그 분의 것입니다” 고백하면서 바치고 또 바쳤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나요? 6, 7절 말씀입니다.
“모세가 명령을 내리매 그들이 진중에 공포하여 이르되 남녀를 막론하고 성소에 드릴 예물을 다시 만들지 말라 하매 백성이 가져오기를 그치니 있는 재료가 모든 일을 하기에 넉넉하여 남음이 있었더라.”
특히 마지막 말씀이 우리의 생각을 잠시 멈추게 합니다.
“남음이 있었더라.”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와 총명으로 성소를 만들어 갑니다. 그런데 그 지혜와 총명은 자기들이 감당할수 없을 정도로 남음이 있었음을 느낍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와 총명으로 열심히 연습하고 만들어 갔더니 하나님의 영광이 넘치는 것을 매일 체험합니다. 지혜와 총명은 계속 주어지는데 육신이 감당을 못할 정도입니다. 매일 매일 풍성한 체험, 남음이 있는 체험을 합니다.
반면 일반 백성들도 금송아지를 섬겼던 자로서 매일 아침 마다 살아 있다는 사실이 너무 감사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자기의 생명도 하나님의 것임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집안을 둘러 보니 보이는 것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고백하면서 드린 것입니다.
“그 분의 것입니다.”
그 결과,
“남음이 있었더라.”
정말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이 모습이 참 청지기의 모습입니다. 청지기의 삶을 사는 자들에게는 이런 축복이 넘칩니다.
“남음이 있었더라.”
청지기의 삶은 먼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잘 아껴서 사용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에게 주신 지혜와 총명을 사용하고 물질을 사용할 때 우리는 이런 축복을 누립니다.
“남음이 있었더라.”
이 축복의 삶에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초대하신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금송아지를 만든 자들을 초대하셨습니다. 신약 시대에는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우리 모두를 초대하신 것입니다.
미국 화가 제임스 맥네일 휘슬러는 1850년대 초 웨스트포인트에 있는 육군사관학교에서 잠시 지낸 적이 있는데, 별로 좋은 성적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다리 그리는 일을 맡았을 때, 그는 낭만적인 석조 다리에 잔디로 덮힌 둑을 그리고 나서 다리에서 낚시하는 소년들을 그려 마무리지었습니다. 이에 지휘관이 말합니다.
“이 아이들을 다리에서 없애시오! 이건 토목공사용 그림이란 말이오!”
휘슬러는 아이들을 강변으로 옮겨…, 그리고는 지휘관에게 제출했습니다. 화가 난 지휘관은 소리지릅니다.
“아이들을 없애라고 하지 않았소! 그림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하란 말이오!”
그런데 휘슬러의 창작 욕구는 너무도 강했습니다. 다음 그림에서는 아이들이 정말 사라졌는데…, 강변에 작은 두 묘를 그린 것입니다. 아이들은 그 안에…
휘슬러는 자기의 작품에 아이들을 넣기를 그렇게 원했는데 하나님은 어떠실까요? 하나님은 휘슬러보다 한 걸음 더 나가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배반한 사람들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십니다. 죽어 마땅한 사람들이 바치는 예물을 기뻐 받으십니다. 이들을 통하여 당신의 풍성한 창조세계를 만들어 가십니다.
사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주님도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청지기의 축복을 누리셨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로 장정만 5000명을 먹이시고도 남기셨습니다. 12광주리가 남았습니다. 제자들은 주님께 고백합니다.
“남았나이다.”
청지기는 곧 남는 장사꾼들입니다. 남는 장사꾼이 되고 싶지 않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남는 장사꾼이 되죠? 더 이상 성소는 지을수도 없고, 주님께서 하늘나라의 성소를 완성하셨으니 말입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위하여 그 축복을 남겨 두셨습니다.
사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섬기는 축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교회를 섬기는 새로운 지혜와 총명을 주십니다. 소위 말하는 은사를 주십니다.
사도바울은 우리들에게 주신 은사를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로마서 12: 6-8절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자, 그러면 우리가 받은 은사를 통해 열심히 주님을 섬길 때 어떤 일이 일어나나요? 모세가 성소를 지을 때 어떤 일이 있었다고요? 예물이 너무 많이 들어와서 예물을 중지시켰습니다. 모세 시대 때 이런 일이 있었다면 십자가의 주님이 나타나신 것을 본 이 시대에는 이런 일이 더 자주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사실 저는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매일 “그 분의 것입니다” 고백하는 공동체 안에서 말입니다. 이 믿음의 공동체가 주신 은사를 열심히 사용할 때 그들은 또 다른 노래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남음이 있나이다.”
교우 여러분,
청지기들이 모인 곳에는 하나님의 은사가 넘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 넘칩니다. 아름다운 노래 소리와 함께…,
“그 분의 것입니다.”
“남음이 있나이다.”
말씀을 거둡니다.
필라델피아의 백화점의 왕으로 불리운 John Wannamaker에 대해서 한 두 번 이야기를 들으셨을줄 압니다. 그는 가난한 벽돌공의 아들로 태어나 자수성가한 사람입니다. 그는 체신부 장관을 지내면서도 주일학교는 한 주도 빠짐 없이 가르친 분입니다. 그가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나는 장관은 부업이고 주일 학교 교사가 본업입니다.”
사실 장관은 5년간 했지만 교사는 70년을 빠짐 없이 했으니 주일 학교 교사가 본업일수 밖에….
장관으로 중국을 방문했을 때입니다. 어느 시골길을 걷다가 밭을 갈고 있는 농부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쟁기 왼쪽은 소가, 오른쪽은 청년이 끌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 광경을 보고 물었습니다.
“왜 사람이 소와 함께 밭을 갑니까? 그 청년이 어떻게 견디겠습니까? 당신은 인정도 없습니다. 어떻게 사람에게 그런 일을 시킬수 있습니까?”
농부가 대답했습니다.
“저 청년은 제 아들입니다. 제 아들은 신앙이 두터운 주일학교 교사입니다. 그런데 작년에 저기 보이는 예배당을 건축할 때 우리가 키우던 소 두 마리 중에 한 마리를 팔아서 건축헌금으로 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소 대신 밭을 갈기고 약속했습니다. 그래서 밭을 갈고 있는 것이지요.”
그 모습에 워너메이커는 큰 감동을 받고 청년을 미국으로 데리고 가 신학 공부를 시킵니다. 이 청년이 바로 중국에 복음을 전파하는 데 크게 기여한 성문삼 목사가 됩니다.
청년과 함께 와나메이커는 이중창을 부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분의 것입니다.”
“남음이 있나이다.”
우리가 거져 받은 은사를 마음껏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십니다. 주님께서 주신 물질을 예물로 드리십시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있는 재료가 모든 일을 하기에 넉넉하여 남음이 있었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