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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씨를 뿌린 사람” 마태복음 13:24-30 (12/31/2017)

얼마전 어느 책에서 읽은 환타지 소설 이야기입니다. 주인공과 일행은 모험을 하다가 어느 굴에 들어갑니다. 굴 안에는 큰 나라가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 나라에 신과 같은 존재가 있었는데 그 나라를 다스리는 용이었습니다.

용은 굴의 세계로 들어온 일행을 한 사람씩 시험합니다. 각자의 상황에 맞게 문제를 냅니다. 한 좀도둑에게는 이런 질문을 합니다. 지금의 좀도둑의 삶을 유지할 것인지 아니면 모든 게 완벽한 세계에서 새로운 삶을 다시 살 것인지를 선택하라고 합니다. 새로운 삶을 다시 살게 되면 지금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놓아야 합니다.

놀랍게도 좀도둑은 고민한 끝에 지금의 자신으로 남아 살겠다고 대답합니다. 비록 별 볼일 없는 좀도둑의 삶이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 있기로 선택한 셈입니다. 나쁜 짓을 해서 밥먹고 사는 사람이지만 옆에 있는 사람들을 놓치고 싶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각자 다른 질문을 받습니다. 그러나 내용은 좀도둑과 비슷한 질문입니다. 곧 옛 삶을 청산하고 완벽한 세계에서 살 것인지 아니면 구질구질한 지금의 삶을 계속 살 것인지 선택을 하라는 질문입니다. 한편 그들도 좀도둑과 비슷한 선택을 합니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삶보다는 지금 그대로가 좋다는 선택을 합니다. 용은 이해를 못합니다. 일행 중 한 사람이 용에게 그 이유를 말합니다.

“당신은 몇 백년의 유구한 세월을 살았는데 당신이 사는 시간과 우리가 사는 시간은 다릅니다. 우리는 짧은 시간 동안의 삶에서 만난 사람들과 헤어질수 없습니다.”

 

여러가지를 생각나게 하는 질문입니다. 소설에 나오는 용의 질문을 조금 바꿔봅니다. 오늘 송년예배를 드리는데, 용이 여러분에게 와서 이런 질문을 했다고 가정해 봅니다.

‘새로운 한 해를 원하는지 아니면 17년도의 연장된 한 해를 원하는지…?’ 어떻게 답하실 것 같습니까? 여러분의 상상에 맡깁니다. 그런데 주님은 오늘 송년예배에 함께 하셔서 질문 대신에 우리 모두에게 한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24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주님은 이 시간 한 비유를 들어서 천국에 대해서 설파하십니다. 이 비유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지난 일년의 삶이 천국이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 알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천국을 누릴 첫번째 조건을 말씀하신 셈입니다. 좋은 씨를 뿌리는 자들이 천국의 소유자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첫 말씀을 하실 때 듣는 청중은 둘로 갈라집니다.

한 그룹은 스스로 좋은 씨를 뿌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을줄 압니다. 씨뿌린 결과가 좋았습니다. 하는 일마다 대박이 났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이야기로 생각하고 귀를 기울입니다.

또 한 그룹은 스스로 좋은 씨를 뿌리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을줄 압니다. 이들은 더 이상 듣고픈 생각이 덜해졌을 것입니다. 결과가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실패한 기억이 더 많이 남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속하십니까? 교우 여러분들 중에도 좋은 씨를 뿌렸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아마도 17년도의 삶에 만족하신 분들일줄 압니다. 그런데 이런 분들이 얼마나 될까요?

사실 많은 분들이 새해에는 더 잘 해 봐야지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지난 1년이 생각처럼 잘 된 것 같지 않습니다. 실수도 많았고 다시 해 보면 더 잘 해 볼 것 같은 느낌입니다.

하여튼스스로 만족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는 극히 일부의 청중들을 제외하고는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에 상처를 받았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더 이상 귀 기울이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나려 합니다. 그들은 다음 말씀은 들으나 마나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분명히 이처럼 말씀하실 것을 예상합니다.

“좋은 씨를 뿌렸기에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얻었느니라.” 이런 말씀을 하시겠지 상상하면서 자리를 뜨고 있는데 주님의 다음 말씀이 들립니다. 25절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청중은 전혀 예상 밖의 말씀을 듣습니다. 청중이 기대했던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들은 좋은 씨를 뿌린 자들이 누리는 축복을 말씀하실 것을 기대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기대 밖으로 주님은 원수가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고 말씀하십니다.

정신이 확 듭니다. 사실 1년 내내 가라지 때문에 온갖 고생을 하였습니다. 가라지를 볼 때마다 스스로 자책하고 또 자책했던 것입니다. 가라지가 없는 좋은 씨만을 뿌렸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자신을 늘 탓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리를 뜰려고 했던 청중은 털썩 주저 앉습니다. 그리고 귀를 기울입니다. 26절 말씀입니다.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사실 가라지 노이로제가 걸려 있었습니다. 가라지만 보면 죄책감에 사로 잡히곤 했었습니다. 한동안 남의 밭에는 가라지가 없는데 우리 밭에만 이리 많은가 늘 안타까워했고 집사람에게 늘 미안해 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라지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원수가 몰래 와서 심어 놓고 간 것입니다. 원수가 몰래 심어 놓고 가는 것은 자기 자신도 어쩔수 없었는데 이것을 주님께서 인정해 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가라지가 전처럼 그리 미워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가라지는 가라지입니다. 아무 쓸데 없는 가라지입니다. 가라지는 늘 큰 숙제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아마도 이에 대한 해결방안도 주시지 않으실까 기대했을 것입니다. 다시 귀를 기울입니다. 27절 말씀입니다.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스토리의 천재이신 주님은 비유 안에서 짧은 단막극을 꾸밉니다. 주인의 종들을 등장시켜서 좋은 씨를 뿌렸는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는지 묻게 합니다. 청중은 더 궁금해 집니다. 주인은 뭐라고 대답하실까요? 28절 말씀입니다.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청중의 궁금증은 하늘로 치솟아 오릅니다. 사실 늘 가라지를 뽑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 고민하고 있던 차입니다. 단막극에 나오는 종들이 자기들의 궁금증을 칼 같이 알고 대신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29절 말씀입니다.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주님은 주인의 말을 통해 속시원히 답하고 계십니다. 가라지를 가만 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으며 아마 많은 청중들은 깊게 마음에 찔림을 받았을지 모릅니다.

사실 청중은 가라지의 미운 모습은 머리털을 세듯 너무나 깊게 알고 있습니다. 반면 알곡의 우아한 모습은 대충 알고 있습니다. 알곡의 우아한 모습을 잘 알고 있다면 가라지를 뽑자는 말을 쉽게 할리가 없습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알곡을 상하게 할지 모르니 말입니다. 곧 알곡 보다는 가라지에 더 매여 있었던 것입니다. 종의 모습에서 자기들의 모습을 봅니다.

“우리가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알곡보다는 가라지에 더 매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한편 주님께서 뽑길 원하시는 것은 종들에게 있는 가라지에 대한 노이로제였습니다. 청중은 이처럼 자신의 모습이 비유를 통해서 밝히 드러남을 통해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놀라운 희열을 감출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 희열이 부끄러움을 이기고도 남게 합니다. 어떤 희열이었을까요?

그들은 이 비유가 주는 깊은 멧세지에 매료된 것입니다. 그것은 좋은 씨를 뿌린 첫 증거는 가라지라는 것입니다. 그동안 삶에 생기는 가라지를 볼 때마다 “나 때문에…, 나 때문에…” 괴로워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라지는 좋은 씨를 뿌린 증거라는 것입니다. 이제 부끄러움 대신에 희열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한국 속담 잘 아시죠?

“팥 심은 데 팥 나고, 콩 심은 데 콩 난다.” No, way. 아닙니다.

“팥 심은 데 가라지도 나고, 콩 심은데 가라지도 납니다.” 가라지가 좋은 씨를 심은 증거입니다. 그러면 가라지가 눈에 보이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뽑아 버려야겠다 생각해야 할까요?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일을 잘 했구나. 얼마나 열심히 잘 했으면 가라지까지 날까…!”

자축해야 합니다. 일을 안 했으면 가라지도 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할수 있습니다. 가라지가 많은 한 해였다면 그 만큼 어느 해 보다도 좋은 씨를 많이 뿌린 한 해였던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지난 1년 동안 예상치 못한 가라지로 인해 고생 많으셨습니까? 가라지가 생긴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여러분이 좋은 씨를 뿌렸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18년도도 17년도의 연장이 되어도 괜찮지 않습니까? 새해에도 좋은 씨를 뿌린다면 올해처럼 가라지는 또 나올테니 말입니다.

 

사실 주님은 오늘 송년예배를 맞이하여 우리들의 생각의 틀을 바꾸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천국은 삶을 새로운 각도에서 볼 때 임합니다. 17년도나 18년도나 비슷한 일들이 우리를 찾아 옵니다. 그러나 비슷한 일들 사이에 천국이 내재해 있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본다면 말입니다.

 

유명한 테니스 코치가 선수들에게 자주 쓰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Stretch the court.”

테니스도 그렇고 배구도 그렇고 골프도 그렇고 저희 교회에 탁구 동호회가 있는데 탁구도 같을줄 압니다. 구장이 좁다고 생각할수록 실수를 많이 한다고 합니다. 마음으로 court를 넓게 보면 도리어 구석 구석으로 테니스 볼을 stroke할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테니스 코치의 말을 조금 각색해 봅니다.

“가라지도 품으라.”

왜냐하면 가라지도 내가 좋을 씨를 뿌린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가라지를 언제까지 품어야 할까요? 30절 말씀입니다.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누가 누구에게 말하기를…?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곧 주님께서 주님의 시간에 가라지를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곡식은 모아 주님의 곳간에 넣게 하신다 말씀하십니다.

 

가라지를 품으라는 것은 가라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증거로 남겨 두라는 것입니다. 좋은 씨를 뿌린 증거로…. 가라지를 연구해서 언제 어떻게 뽑을까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증거물로만 놓아 두라는 것입니다.

대신 우리가 진정 감동의 마음을 갖고 봐야할 것은 알곡입니다. 연구의 대상은 알곡의 진귀함입니다. 아름다움입니다. 알곡 안에 담긴 미래의 세계입니다. 그 알곡 안에 30배 60배 100배로 이어지는 놀라운 축복의 세계가 담겨져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분명한 것은 주님의 시간에 우리가 뿌린 좋은 씨는 알곡이 되어서 언젠가 주님의 곳간에 바쳐질 것입니다.

그러니 2017년도 한 해로 인해서도 감사드리십시다. 우리 모두 좋은 씨를 뿌린 한 해였습니다. 주위의 가라지가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18년도도 17년도 처럼만 되면 감사하지 않을까요? 아니 내년에는 가라지가 더 많아져도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좋은 씨앗을 더 많이 뿌린 증거이니 말입니다.

우리가 심은 좋은 씨앗은 언젠가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때에….

 

말씀을 거둡니다.

프랑스의 화가 폴 세잔느는 35년 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살면서 걸작들을 만들어 믿을 수 있는 이웃에게 주곤 하였습니다. 그는 자기 작품에 대한 사랑이 워낙 대단했는데 남에게 인정 받으려는 생각 조차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자기 작품이 남보다 위대해서가 아니라 그냥 자기 작품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알곡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자신이 현대 미술의 아버지로 추앙받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해 본적도 없습니다.

세잔느가 명성을 얻게 된 것은 한 파리 상인 덕분이었는데 그가 그림들을 몇 장 모아서 첫 번째 세잔느 전시회를 열어 미술계에 소개하자, 세상은 한 대가의 존재를 발견하고는 놀라게 되었습니다.

놀라기는 대가인 세잔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아들의 부축을 받으며 그 전시회 화랑에 도착했는데, 자기 그림들을 전시해 놓은 것을 보고 놀람을 감출 수가 없어 아들을 돌아보며 말했습니다.

“저걸 봐라, 내 그림들을 틀에다 넣었구나!”

 

교우 여러분,

가라지로 인해서 우리들의 삶의 작품이 손상을 당한 것 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우리의 삶이 실패작처럼 느껴질지 모릅니다. 주님의 시간을 기다리십시다. 우리가 올해 뿌린 좋은 씨앗의 열매는 언젠가 예쁜 틀에 담겨져서 온 세상을 아름답게 할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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