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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을 사는 삶” 호세아 6:1-3 (04/01/2018)

아리조나 어느 마을에 사는 다섯 살 난 Ernie가족이 부활절 주일에 할머니 집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모두가 테이블에 둘러 앉았습니다. Ernie는 곧바로 음식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아빠가 말합니다.
“Ernie, 기도를 먼저 해야지.”
“기도 안 해도 되요.” 엄마가 옆에서 말합니다.
“무슨 말이야. 당연히 해야지. 집에서 항상 식기도를 드리잖아.”
“그건 우리 집이고요. 여기는 할머니 집이잖아요. 할머니는 요리를 할줄 알아요.”

그동안 부활 주일 설교시 자주 말씀드렸지만 루터란 교회에서는 부활절 설교만큼은 유머로 시작하는 것이 전통이라고 합니다. 지금 이 유머가 실린 웹싸이트에도 루터란 교회 사진을 볼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루터란 교회에서는 부활절 만큼은 유머를 즐기는 것 같습니다.

부활절 설교 준비를 할 때면 늘 기억나는 게 있습니다. 제가 대학생 시절에 김동길 교수님이 영락교회 대학생회에 와서 부활절 설교를 하셨습니다. 서두에 목사님들이 부활절 설교를 하기 싫어 한다고 하면서 항상 당신에게 맡기는데 그 이유를 안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라는 말 이외에는 할 말들이 없어서 기회만 나면 당신에게 맡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저는 물론 신학생은 아니었지만 활짝 웃은 기억이 납니다.
사실 부활의 삶을 사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을 이처럼 재미있게 보고 해석하는 능력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부활의 삶을 사는 것은 어떤 것인지 오늘 본문 말씀을 살펴 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절 말씀입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호세아 선지자는 창기 고멜과 결혼한 아주 특별한 삶을 산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원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북왕국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결혼을 시켰고 이에 순종한 아주 특별한 선지자입니다.
참 하나님은 어떻게 보면 재미있고 어떻게 보면 너무 하십니다. 북왕국 이스라엘민족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겼는데 이는 하나님 보시기에는 당신을 배반한 곧 우상을 사랑하는 창기와 같다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당신이고 창기 고멜은 이스라엘 민족임을 보여주시려고 결혼을 시켰습니다. 이 엄청난 일에 호세아가 순종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무나 붙들고 이런 엄청난 결혼을 시키셨을까요? 그럴리가 없습니다. 후반절만 다시 봉독해 드리면,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호세아는 아마 여호와께 많이 찢김을 당하곤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늘 낫게 하시고 또 싸매어 주심을 경험하고 또 경험했을 것입니다. 이런 경험을 많이 해 보았는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창기 고멜과 또 결혼을 하라고 합니다. 살다 살다 별 일을 다 당합니다. 처음에는 농담하시는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보다 심각합니다. 하여튼 많이 반항 했을지 모릅니다. 모르는 여인과 결혼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창기와 결혼하라니…. 생전 가보지 않은 창기 집문을 두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또 순종합니다. 찢으시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낫게 하시고 싸매어 주신 경험을 한 두번 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느덧 그에게는 다음과 같은 삶의 좌우명이 생긴 것 같습니다. 2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그가 그 동안 하나님 앞에서 산 삶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바로 ‘3일의 삶’ 아니면 ‘3일의 신학’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찢기시는 것 같았지만 항상 3일후에는 기적과 같이 새로와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삶의 모토는 한 마디로 ‘3일이 지나면…’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어떤 때는 삶의 문제가 한 달이 지나도 두 달이 지나도 1년이 지나도 해결 안 될 때도 많이 있었을줄 압니다. 그러나 ‘3일이 지나면’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한 달을 지내고 두 달을 지내고 1년을 지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3일이 지나면’이라는 날개를 달고 그 시간을 신나게 기대감을 안고 산 것입니다. 아니 어떤 일을 만나도 웃음으로 넘긴 것입니다. 항상 웃는 호세아가 하나님도 얄미우셨던지 이번에는 좀 쎈 숙제를 내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하나님께 순종하여 창기 고멜과의 결혼 생활을 시작합니다. 3일의 신학을 안고…. 3일이 지나면 고멜이 더 이상 다른 남자 품으로 가지 않고 온전히 돌아 오리라 희망의 날개를 달고 하루 하루를 지냅니다. 그렇게 살기 시작하니 생각보다 괜찮습니다. 아니 전 보다 더 희망의 신비를 느낍니다. 희망은 때로는 날개가 되고 때로는 신발이 됨을 느꼈을 것입니다. 날아야 할 때는 날고 험한 길을 걸어야 할 때는 또 걷습니다. 희망의 신발을 신고 사뿐 사뿐 춤을 추듯이 걷습니다.

옛날에 어느 부유한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왕은 궁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그처럼 멀고 험한 길을 떠나본 적이 없었기에 왕은 여행에서 돌아운 후 발이 아프다고 내내 불평을 하다가 급기야 온 거리에 가죽을 깔도록 명령했습니다.
이 공사를 하려면 엄청난 양의 소가죽을 써야 했기 때문에 큰 돈이 필요했습니다. 이 때 한 신하가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리고는 왕에게 말합니다.
“폐하, 왜 그토록 많은 돈을 불필요하게 쓰려 하십니까? 소가죽으로 전하의 발을 감싸면 되지 않사옵니까?”
왕은 속으로 자신의 잘못된 생각을 깨닫고 매우 놀랐지만 태연한 척하면서 즉시 신하의 건의를 받아들여 가죽신발을 만들라고 명합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앞 길이 늘 평탄하게 되길 원합니다. 평탄해 보이지 않으니 늘 근심 걱정입니다. 어떻게 우리 앞 길을 우리가 만들어 가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어떤 인생길도 평탄하게 갈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희망의 신발’을 신는 것입니다. 그리고 발레를 하는 것입니다. 3일이 지나면 해결된다는 희망을 갖고 어떤 주어진 길도 춤추며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희망의 신발을 신고 춤을 추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축복이 더해질까요? 3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호세아는 여호와를 알기를 힘쓴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희망의 신발을 신고 주어진 삶의 길을 걸어 갔습니다. 곧 그는 인생 길에서 늘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는 새벽 빛과 어김없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를 체험하고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호세아는 창기와 같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을 알아가자고 외칩니다. 자기처럼 춤추며 살자고 외치는 것입니다.
곧 여호와를 안다는 것은 한 마디로 3일의 신학을 살아가는 것임을 호세아는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처음에 목회자들이 부활절 설교를 기피하기 원하는 다른 이유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부활은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사는 것인데 선포만 하려고 하니…, 부활을 믿는 자들에게 매번 부활을 선포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부활의 설교를 기피하려고 합니다. 부활은 선포와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부활의 삶을 오늘이라는 시간에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알기를 힘쓴다는 것은 바로 오늘 부활을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오늘 3일의 신학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 희망의 신발을 신고 걷는 것입니다.

구약에 3일의 신학에 대해서 나오는 곳이 두 곳이 있습니다. 하나는 오늘 본문 말씀이 나오는 호세아서이고 또 하나는 요나서입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딱 3일을 거합니다. 요나의 이야기를 가지고 주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표적을 구할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6:4절 말씀입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주님은 3일만에 물고기 뱃속에서 나오는 요나의 모습을 통해 당신이 3일만에 부활하실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곧 주님은 스스로 당신은 요나의 표적을 이루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나서는 언젠가 있을 메시야의 죽음과 부활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호세아서의 말씀에도 3일의 신학이 나옵니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호세아서의 이 말씀도 요나서처럼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알려주시는 것인지는 생각해 볼만 합니다. 학자마다 다르겠지만 어느 학자는 호세아서의 말씀은 그렇게 연결시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도 이 학자와 같은 생각입니다.

사실 요나의 3일과 호세아의 3일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요나도 그렇고 주님도 그렇고 글짜 그대로 3일만에 뱃속에서 그리고 무덤에서 나오셨습니다. 그야말로 셀수 있는 3일입니다. 캘린더에 나오는 3일입니다.
그러나 호세아의 3일은 kairos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날짜를 세면서 3일을 기다릴 때 실패합니다. 호세아의 3일은 캘린더로 세는 3일이 아닙니다. 언젠가 올 카이로스의 3일을 의미합니다.
베트남 전쟁 포로가 된 군인들 중에 살아 온 군인들의 특징은 카이로스의 3일을 기다린 사람들이었습니다. 반면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석방되리라, 이번 부활절에는 석방되리라 캘린더 날짜를 보며 기대했던 군인들은 기대했던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부활절이 지나면 결국 석방되지 못한채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캘린더의 3일을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곧 호세아의 3일은 하나님의 시간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을 이 땅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나서의 ‘3일의 신학’도 필요하고 호세아서에 나오는 ‘3일의 신학’도 필요합니다.

물론 3일의 신학으로 산다는 것이 언제나 쉬운 것은 아닙니다. 정말로 어려운 일을 맞이 했을 때는 막연히 3일을 생각하면서 그 시간을 보낼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감정의 동물이고 슬퍼할 때는 슬퍼하고 절망해야 할 때는 절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목회하다 보면 정말 힘겨울 때가 있습니다. 가장 힘들 때는 충성된 분이라고 생각했던 분이 갑자기 교회를 떠난다는 말을 들었을 때입니다. 그런 일이 자주 있진 않았지만 그래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 저는 희망의 신발을 벗습니다. 그러나 딱 이틀간…. 그리고 3일째 다시 신습니다. 희망의 신발을 신고 다시금 걸어갑니다. 이른 비는 지나갔고, 3일 후에 올 늦은 비의 축복을 기다리면서….

그런데 3일의 신학이 여기서 끝난다면 저는 온전히 호세아의 3일의 신학에 동참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주어가 개인이 아닙니다. ‘나’가 아닙니다. ‘우리’입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입니다.

호세아의 위대함은 개인의 부활의 삶에서 공동체의 부활의 삶으로 발전시킨 것입니다. 더 이상 자신의 문제에 매어 있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의 아픔에 매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3일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공동체의 새벽을 기다린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위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린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부활을 사는 삶입니다.

물론 주님은 우리 각자를 위해서 3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아울러 인류 공동체를 하나 되게 하시기 위하여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류 공동체를 위한 3일을 내다 보는 자들이 진정 든든한 희망의 신발을 신고 걷는 자들입니다. 춤추는 자들입니다.
춤은 혼자 추는 것이 아닙니다. 파트너가 있어야 합니다. 파트너가 많을 수록 좋지 않을까요? 함께 희망의 춤을 추십시다.

말씀을 거둡니다.
올해도 많은 분들의 수고로 어느 때보다도 은혜로운 묵상집이 마련되었습니다. 보스톤 한인 교회라는 공동체가 함께 희망의 신발을 신고 가고 있음을 느낄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은 3일의 축복을 체험한 간증문이 실렸습니다. 모두 읽으셨겠지만 잠시 다시 소개해 드립니다.
어느 교우분이 BNI수업인 “영성으로 살기”를 들으시고 많은 영성가들을 글로서 접한 뒤 스스로 영성 생활에 어느 정도 들어 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아주 하찮은 일을 통해서 “난 아직도 멀었다”라는 자책감에 빠집니다.
주일 예배를 마치고 귀가길에 아내의 고백을 듣습니다. 그 날 소그룹 성경공부 첫 질문이 인생에 모델이 된 사람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인데, 아내는 그룹원들에게 남편이라고 했다면서 ‘늘 성경 말씀대로 모든 일을 성실히 하는 걸 봐 왔기 때문이라고 말하셨다고 합니다. 이를 듣고 부끄러웠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쓰셨습니다.
“아마 내 스스로 자식들과 집사람에게 한 죄책감으로 막 넘어지려고 비틀대는 내 모습이 하나님 보시기에 몹시도 가련해서 3일도 못 되어 하나님께서는 집 사람의 입을 통해 ‘얘야, 툭툭 털고 일어나라’ 용기를 주시려는 것 같았다.”
부활의 주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러니 함께 웃습시다. 주님도 웃고 계십니다.
서로 서로 주님의 입이 되어서 격려하십시다.
“얘야 툭툭 털고 일어나라.”

보스톤 한인 교회 교우 여러분,
우리 함께 부활의 삶을 사십시다.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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