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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본 고로 믿느냐?” 요한복음 20:24-29 (04/08/2018)

두 국왕이 있었습니다. 이들 국가 간에 전쟁이 일어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두 왕의 지혜와 병법은 우열을 가릴 수가 없어서 승패를 가르기가 힘들었습니다. 전쟁이 끝날 조짐이 보이지 않자 두 왕은 상대를 독살하는 방법 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중 한 국왕이 적국 국왕의 밥에 독약을 넣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상대방 왕의 친구는 편지를 써 친구에게 암살 계획을 알렸습니다.
“밥에 독이 들어 있으니 내일 절대 식사를 하지 말게나.”
편지는 제때에 국왕의 손에 넘겨졌습니다. 그러나 이 왕은 독살되었습니다. 사실 그는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친구의 편지를 받은 날도 그는 신하에게 말했습니다.
“오늘의 편지는 내일 읽겠다.”
결국 그는 독약이 든 밥을 먹고 죽고 말았습니다.

지난주일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하며 아름다운 예배를 주님께 올려드렸습니다. 그리고 한 주간을 보내고 오늘 부활 후 첫째 주일 예배를 드립니다. 주님께서 이 자리에 나타나신다면 오셔서 우리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실까요? “지난 주일 예배 좋았다 고마왔다” 말씀하실까요?
물론 항상 그렇지만 지난주일에도 아름다운 성가를 주님께 올렸습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찬양팀도 아주 은혜롭게 찬양을 잘 인도하였습니다.
저희 아들은 중고등부 교사라서 제 설교는 듣지는 못 하지만 두 청년회원들이 설교에 많은 힘을 얻었다고 제 아들을 통해 저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청년들이 좋아했다면 설교도 아마 잘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1주일이 지났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시간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면 무슨 말씀을 하실까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상고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24절 말씀입니다.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열두 제자 중에 이 때는 가롯 유다는 없을 때니 실제로는 열한 제자만 남아 있었을 때입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 도마가 없었으니 열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나타나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 때가 언제였는지 궁금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아니지만 19절을 보면 알수 있습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언제라구요?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곧 바로 부활하신 날 저녁에 제자들이 두려움 가운데 함께 모여있을 때 주님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때 마침 도마는 있지 않았습니다. 곧 새벽에 부활하셨고 바로 그 날 저녁 제자들은 두려움 가운데 함께 모여 있는 것입니다. 도마만 왜 빠졌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주님은 물론 도마가 없는 것도 아시지만 그 자리에 나타나신 것이고요. 하여튼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25절 말씀입니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도마도 대단합니다. 10명의 제자가 보았다고 하는데 그는 안 믿겠노라고 선언합니다. 직접 보고 만지지 않으면…. 또 다시 시간이 흘렀습니다. 26절 말씀입니다.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몇 일이 지났다구요? 8일이 지나서…. 8일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추측할수는 있습니다. 아니 확실한 것 하나가 있습니다. 도마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지난 8일간 친구들이 얼마나 설득했겠습니까? 그것도 10명이서…. 아니 때로는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 만난 막달라 마리아와 몇몇 여인들까지도 설득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절대로 굽히지 않습니다.
주님은 이 모습을 8일간 지켜 보신 것입니다. 전혀 움직임이 안 보이니 어쩔수 없이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이번에는 다행히 도마도 제자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27절 말씀입니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주님은 도마가 한 말을 다 들으셨음에 틀림 없습니다. 도마가 말한 것을 그대로 반복하십니다. 이에 도마는 감히 손가락을 내밀어 주님의 손을 만지지도 옆구리에 손을 넣지도 못합니다. 입으로 고백만 할뿐입니다. 28절 말씀입니다.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만지지 않고 고백만 하는 도마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29절 말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도마는 일주일간 부활의 주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많은 부활의 증인들의 말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뼈아픈 꾸지람을 듣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도마에게만 하신 말씀일까요? 오늘 우리에게도 이 말씀을 하시지 않으실까요?

어느 고층빌딩의 소유자는 매달 엄청난 엘리베이터 수리비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습니다. 건물이 높아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자 승객들이 인내심을 잃고 반복해서 버튼을 눌러 대는 바람에 엘리베이터 버튼이 쉽게 고장 나곤한 것입니다.
버튼의 불이 켜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치 다른 사람이 벨을 누른 것은 아무 소용이 없고 자신의 ‘초능력 손가락’으로 직접 눌러야 엘리베이터가 선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다시 한 번 눌러야 직성이 풀렸습니다. 건물 주인이 엘리베이터 옆에 여러 번 공고문을 붙여 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엘리베이터 이용자의 습관을 고치는 사람에게 후한 상금을 주겠다는 공고를 붙였습니다.
그 공고를 보고 어떤 심리학자가 엘리베이터 문에 큰 거울을 다는 묘책을 생각해냈습니다. 이 방법은 쉽게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승객들이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조급한 얼굴을 보고 나서 바로 침착하고 매너 있는 표정을 지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그토록 시끄럽고 분주했던 사람들이 거울 앞에서 신사 숙녀가 되어 인내심을 갖고 엘리베이터가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도마의 모습은 거울 속에 비친 제자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실은 도마만 부활을 안 믿은 사람이 아닙니다. 열 제자 모두 부활을 안 믿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안 나오지만 다른 세 복음서에는 모두 세번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신 기록이 나옵니다. 얼마나 중요했으면 주님께서 세 차례 말씀하셨고 세 복음서 모두 세 번 기록했겠습니까? 마태복음에 나온 말씀만 차례로 봉독해 드립니다. 16:21절 말씀입니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서 나타내시니.” 17:22, 23절 말씀입니다.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음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매우 근심하더라.” 20:17-19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이처럼 세 차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도 열한 제자도 물론 도마도…. 주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그들도 모두 본 후에 믿게 된 것입니다. 도마처럼….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도마를 통해서 제자들에게 막달라 마리아에게 그들의 참 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도마를 통해 보여주시는 모습은 모두 본 후에나 믿는 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도마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 눈으로 보고야 믿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모두 도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오늘의 도마의 모습은 어떨까요? 사실 이 당시는 모두 부활의 주님을 직접 보았습니다. 승천하시기 전까지는 직접 나타나시곤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본 고로 믿느냐고 꾸짖으신 것입니다.
한편 주님께서 요즘은 직접 나타나시지 않으시니 우리에게는 본 고로 믿느냐고 꾸짖지는 않으십니다. 그러면 현대판 도마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사실 도마는 부활하신 주님을 뵌 후 고백했습니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고백을 하면서 오늘 예배를 드리고 있지 않습니까? 부활 후 첫 예배를 그러면 우리는 보지 않고 믿고 고백을 하니 도마보다 더 나은 자들일까요?
우리는 입으로는 고백합니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그러나 마음은 말합니다. “이 일이 해결된 후 내일부터 부활의 증인된 삶을 살리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마보다 더 큰 꾸지람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처음 모든 것을 내일로 미루는 왕의 이야기를 소개해 드렸습니다. 우리들의 모습은 바로 내일로 미루는 왕의 모습은 아닐까요? 왕은 친구의 편지를 읽지 않아서 죽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친구의 편지를 하루 후에 읽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하루를 늦추는 것이 바로 오늘 현대판 도마의 모습이 아닐까요?

지난 주일 부활 주일 예배를 잘 드렸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지난 1주간도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야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 미련한 왕이 되진 않았습니까? 부활의 증인이 되는 삶은 내일로 미루지 않았습니까? 그러다 보니 1주일이 지나 버렸구요….
그런데 부활의 증인이 된다는 것 그렇게 어려운 일 아닙니다. 우리들이 하던 일을 놓고 매일 길거리에 나가서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외치라는 게 아닙니다. 우리 일상 생활에서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며 사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주님을….

저희 교회에 최근에 오신 분들은 처음 듣는 말씀일줄 압니다. 저희 교회 건물 가운데 Courtyard가 있는데 그 안에 있는 연못 이름이 르호봇입니다. ‘넓다’라는 뜻인데 이삭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쫓겨서 그랄 골짜기에 살았습니다. 첫 우물을 팠는데 빼았겼습니다. 두번째 우물을 팠는데 또 빼았겼습니다. 세번째 우물을 팠는데 그 때는 블레셋 사람들이 가만히 놓아 두었습니다. 그래서 그 우물 이름을 ‘넓다’라는 의미로 ‘르호봇’이라고 붙입니다.
그랄 골짜기가 넓어 봤자 얼마나 넓겠습니까? 언제 다시 그 우물을 빼았길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삭은 외칩니다. ‘르호봇.’ 그래서 그런지 후에 아비멜렉 왕이 와서 화해의 손을 내밉니다. 이삭은 외친 것입니다. 그리고 믿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외침을 들으셨습니다. 이삭의 믿음을 기쁘게 보셨습니다. 그의 삶을 넓게 만드셨습니다.
이삭은 보기 전에 믿은 것입니다. 이삭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셨을까요?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부활은 이 세상을 넘어 저 세상까지 온 세상을 하나가 되게 하는 최고의 르호봇의 사건입니다. 그런데 부활은 ‘르호봇’의 완성입니다. 땅과 하늘을 연결시키는 놀라운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삶을 사는 자들은 르호봇의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그것도 내일로 미루는 것이 아니라 오늘 그 고백을 하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 고백에 따라 행하는 자들입니다.

사실 저도 르호봇 이야기에 빠진 후 종종 혼자서 ‘르호봇’을 외치곤 합니다. 세상이 좁아 지는 것을 느낄 때는 항상 외칩니다. 저의 가정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게다가 ‘르호봇’ 외치면서 겨자씨를 뿌리면 어떨까요?
올해 저희 교회 표어가 ‘겨자씨를 심는 공동체’입니다. 남은 한 해 함께 겨자씨를 뿌려 가십시다. 내일이 아니고 ‘오늘’이라는 시간에…. 그래서 주님께서 보여주는 거울 안에 우리들의 모습은 바로 노래하며 겨자씨를 뿌리는 모습이 되게 하십시다.

사실 오늘 본문 말씀에서는 도마가 주님으로부터 꾸지람을 받는 장면으로 마칩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이 꾸지람을 받은 도마가 그후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인도까지 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역사학자들은 도마가 선교한 자취를 인도에서 많이 발견이 된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한편 도마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꾸지람도 들었지만 다시 의심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의심이 계속 생기는데 아무리 떨쳐 버리려고 해도 되지 않습니다. 어쩔수 없이 친구들에게 찾아 가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요한의 집에 가 보았습니다. 멀리 소아시아로 복음 전하러 떠났다고 합니다. 이튿날은 안드레에게 가 보았습니다. 안드레도 집에 있지 않고 복음 전하러 어디론가 가고 집에 없습니다. 그 다음 날은 베드로의 집에 가 보았는데 역시 집에 없습니다.
그 때 혼자 결론을 내립니다. 그 동안은 늘 내일부터 내일부터 복음을 전해야지 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복음은 오늘 전해야 하는구나 깨닫습니다. 당장 복음을 전하러 떠납니다. 결국 인도까지 선교 여행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 부활의 증인의 삶을 사십시다. 오늘 ‘르호봇’ 외치십시다. 오늘을 놓치면 우리는 영원히 오늘 불러야 하는 르호봇의 노래와 축복을 놓치는 것입니다. 르호봇을 부르며 겨자씨를 뿌리십시다.

말씀을 거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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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의 ‘씨뿌리는 자’라는 그림입니다. 아주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태양빛이 찬란합니다. 그런데 농부는 태양빛 보다 더 찬란한 힘을 내뿜고 있습니다. 농부의 모습은 정말 당당하게 걷는 모습입니다. 부활의 증인으로 사는 우리들의 모습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주님의 거울에 비치는 우리들의 모습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저 그림을 보여 주시면서 오늘 주님은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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