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 하고 판사가 말했습니다.
“피고는 23개의 소송 사유로 유죄임을 판정합니다. 따라서 피고에게 총 175년 징역을 선고합니다.”
죄수는 노인이었고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판사의 표정이 부드러워졌습니다.
“당신을 엄하게 다스리려는 건 아닙니다. 내가 부과한 형이 매우 가혹한 형인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175년을 다 살 필요는 없습니다.” 죄수의 눈이 희망으로 빛났습니다. 곧 풀려날 것을 기대했습니다. 판사가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이 복역할 수 있는 만큼만 하십시오!”
자유를 주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하루도 자유를 주고 있지 않은 판결을 내린 판사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이 판사는 좋은 판사인 것 같습니까? 아니면 나쁜 판사인 것 같습니까?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확실한 것 하나는 분명히 이 판사는 법을 준수한 판사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정상 참작이라는 것이 있겠지만 노인이라고 해서 정상참작이 해당되는지 모르겠습니다. 판사는 법 위에 있지 않으니 당연히 법대로 판결을 내려야 했고 그렇게 한 것뿐입니다. 물론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말을 한 것뿐입니다.
사실 법정에 가면 볼수 있는 정의의 여신 조각을 보면 여신의 눈이 가리워져 있습니다. 눈이 가려진 이유가 무엇입니까? 선입견을 갖고 보지 않고 공평하게 판단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받아야 할 벌은 정당하게 받도록 판결하는 판사가 좋은 판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판사가 되신다면 주님은 과연 좋은 판사일까요? 나쁜 판사일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살펴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너무나 잘 알려진 말씀이 나옵니다. 32절 말씀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이 말씀 하나로 알수 있는 것은 주님은 좋은 판사인 것 같습니다. 주님은 무작정 자유를 선포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조건 자유를 선포한다면 그것은 좋은 판사가 아닙니다. 주님은 자유를 선포하되 조건이 있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주님은 진리를 아는 자들에게 자유를 선포합니다. 그러니 주님은 좋은 판사가 아닐까요? 곧 자유를 얻으려면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진리를 알수 있을까요?
사실 이 말씀을 가지고 많은 대학들이 각 학교의 표어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하바드 대학교는 ‘진리,’ 예일 대학교는 ‘빛과 진리,’ 서강대학교는 ‘진리에 복종하라,’ 연세대학교는 오늘 말씀 그대로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이처럼 많은 대학교가 이 말씀관 연관된 표어를 만들었습니다. 아마도 대학교는 진리를 추구하는 곳이니 진리를 알아 자유를 누리려는 뜻이 담겨져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방금 언급한 학교들에 들어 가려면 많은 노력과 경비가 들어 가는 것 잘 아실줄 압니다. 물론 합격 후에도 전보다 더 많은 노력과 경비를 들여야 졸업을 할수 있습니다. 대학교를 통해 진리를 알게 되어 자유를 누리는 것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진리와 자유는 무엇이 어떻게 다를까요? 아니면 같을까요? 앞에 귀절을 살펴 보아야겠습니다. 31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아 자유를 얻는 길이 너무나 간단합니다. 많은 경비와 노력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 길의 시작은 곧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입니다. 진리를 아는 길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게 되는데 바로 이 진리가 자유케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듣는 자들은 어떻게 반응하였나요? 33절 말씀입니다.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이들은 발끈합니다. 한 마디로 주님께서 당신의 말에 거하면 자유를 얻는다고 하니 발끈한 것입니다. 아니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발끈할 이유가 전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들이 왜 발끈했을까요?
사실 요즘처럼 학비가 비싼 시대에 사는 우리들에게는 학비도 내지 않고 진리를 배우고 그로인해 자유로워진다고 하니 귀가 솔깃하겠지만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는 요즘처럼 비싼 학비를 내야 하는 대학제도가 있었던 때도 아닙니다. 곧 현대인들에게는 그럴싸하게 들리겠지만 이 당시 주님의 말씀을 듣는 자들은 우리와 많이 달랐습니다. 게다가 31절 말씀을 보니 이들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것도 주님을 믿는 유대인들입니다. 이제 실마리가 잡힙니다. 주님을 믿는 유대인들이 왜 발끈했을까요?
아무리 주님을 믿는다 하지만 유대인의 떼를 벗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이들은 ‘자유’의 뜻을 단순히 유대인적 기준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럴수 밖에 없습니다. 이 당시는 유대인들은 사람을 구분하는 기준이 거의 2분법이었습니다.
남자냐, 여자냐? 헬라인이냐, 유대인이냐? 자유인이냐, 종이냐? 그래서 지난번 갈라디아서 공부에서 나누셨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어떤 랍비는 매일 세 가지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나를 이방인이 아닌 유대인으로 여자가 아닌 남자로 종이 아닌 자유인으로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사실 이 날 아침도 많은 사람들이 이 세 가지 감사 기도를 드리고 하루를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 중 하나가 “종이 아니고 자유인으로 태어나게 한 것을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 자존심을 건드렸으니 그동안 주님을 믿는다 하였는데 돌연 주님께 대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들의 이 모든 상황을 모르실리가 없습니다. 주님은 차분히 답변하십니다. 34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진실로’의 헬라 원어는 ‘아멘’입니다. 주님은 너무나 중요한 말씀을 하실 때면 늘 “아멘, 아멘” 하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을 읽으시다가 ‘진실로 진실로’가 나오면 “아멘 아멘”이라고 생각하시면서 다시 읽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말씀이 더 강하게 닥아 올 것입니다.
하여튼 주님은 유대인들의 생각을 완전히 뒤엎고 있습니다. 주님은 죄에 매여서 살고 있는 죄의 종을 뜻하고 있음을 밝히고 계십니다.
아마 유대인들은 어리벙벙 해졌을지 모릅니다. 아니 잠시 얼어 붙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종’이 주는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잠시 이 세 가지를 다시 살펴 보면 본문 이해에 큰 도움이 될줄 압니다. 여자가 남자가 될수 없습니다. 이방인이 유대인이 될수 없습니다. 종이 자유인이 될수 없습니다. 이 세 가지는 가지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죽이면 아침마다 드리는 감사 제목으로 종이 아니고 자유인으로 태어나게 해 주신 것을 감사하겠습니까? 그러니 ‘죄의 종’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기분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런데 유대인들이 인지하고 있는 또 하나가 있었을 것입니다. 여자나 이방인이나 종이나 이 세 가지 중 한 가지는 그래도 한 가닥 희망이 있는게 있습니다. 여자가 남자가 될수 없고 이방인이 유대인이 될수는 없지만 종은 자유인이 될수 있습니다. 주인이 풀어주면 됩니다. 주님께서는 이것도 너무나 잘 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이 말씀은 절망적인 것 같지만 희망이 담겨져 있습니다. ‘죄의 종’은 바로 주님 안에서는 희망의 싸인이 될수 밖에 없습니다. 누가 풀어주면 되니까….
또 다시 법원 이야기를 소개해 드립니다. 어떤 식당 주인이 닭고기 요리에다 말고기를 섞어 팔고 있다는 죄로 잡혀서 법정에 끌려갔습니다. 닭고기 요리라고 해 놓고는 거의 말고기로 요리를 한 것입니다. 선고에 앞서 재판관은 그가 어떤 비율로 닭고기에다 말고기를 섞고 있는지 물었습니다. 식당 주인은 선서를 하고 나서 말합니다.
“50대 50으로 섞었습니다. 재판장님.”
그래서 풀려났습니다. 재판관은 닭고기 반에다가 말고기 반을 섞었으면 그래도 봐 줄만하다고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재판이 끝난 다음에 한 친구가 ‘50대 50’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를 물었습니다. 주인이 대답합니다.
“말 한 마리에 닭 한 마리.”
곧 닭고기 소량에다가 말고기를 다량 섞은 요리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50대 50이라는 말에 재판관도 속은 것입니다.
죄의 종된 전형적인 사람입니다. 끝까지 속입니다. 재판관도 속입니다. 이 식당 주인은 계속 이렇게 살았을 것입니다. 죄의 종이 되어서 이 세상에서는 아주 잘 살았을 것입니다. 자신은 잘 사는 것 같지만 늘 남을 속이면서 죄의 종이 되어 살아 갑니다. 재판관도 죄의 올무에서 그를 해방시킬수가 없는 절망적 상황입니다. 죄의 종된 사람들은 재판관 머리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래도 희망이 있습니다. 여자나 이방인 보다는…, 왜냐하면 누가 풀어주면 되니깐…. 35절 말씀입니다.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주님께서 풀어줄 그 누구를 생각지 않고 죄의 종에 대한 말씀을 하셨을리가 없습니다. 주님은 죄의 종된 자들을 풀어줄 자를 소개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풀어줄 것을 은연 중 실마리는 주시는 것입니다. 다음 36절로 이를 못 박습니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여기서 32절과 36절을 연결시키면 아주 쉽게 답을 얻게 됩니다. 32절에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36절에서는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말씀하십니다. 아들이 곧 진리입니다. 아들이 죄에서 자유롭게 하는 진리이십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의 시작이 무엇이라구요?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제가 얼마 전에 읽은 이민 신학에 관계된 책에서 아주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독일어로 ‘듣다’는 ‘속하다’와 같은 어원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곧 들을 때 속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아침에는 주로 조용한 피아노 곡을 듣습니다. 아침에는 클래식 세계에 속합니다. 오후에는 7080이던가 아니면 오래된 팝송을 듣곤 합니다. 저는 두 그룹에 속해 있는 셈입니다. 음악적으로 말한다면….
이처럼 듣는다는 것은 어디엔가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내 말에 거하면’이라고 표현하셨는데 아마 주님은 듣는 것은 곧 속하는 것임을 너무도 잘 아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거하면’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신 것 같습니다.
교우 여러분,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되면 주님께 속한 자가 되어 갑니다. 그리고 주님께 속한 자가 된다는 것은 또한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가 될 때 비로소 진리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 진리가 모든 사람들을 자유롭게 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한다는 것은 과거형이 아니고 현재형입니다. 계속 진행형입니다. 곧 말씀을 한 번 듣는다고 진리를 아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 들어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모짜르트의 음악을 들을 때 어떻게 듣습니까? 모짜르트의 곡의 악보를 손에 들었다고 들은 것입니까? 아니면 제목과 더불어 첫 마디만 듣는다고 모짜르트의 음악을 들은 것입니까? 계속 들어야 합니다. 끝까지 들어야 합니다. 그 때 모짜르트의 음악을 들은 것입니다. 잠시 모짜르트에 속하게 됩니다.
이처럼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도 진행형입니다. 말씀을 계속 들을 때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게 됩니다. 이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한편 자유함을 누리는 것도 진행형인 것입니다. 이렇게 표현하면 좋을줄 압니다. 우리는 늘 말씀 안에 거하는 것이고 그 때 우리는 늘 자유함 가운데 거하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말씀 가운데 거하십니까? 여러분은 자유함 가운데 거하는 것입니다. 우선 각자 조용한 시간을 내서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계속 정기적으로…. 그러나 말씀은 결코 혼자만 읽어서는 온전히 이해를 할수 없습니다. 말씀은 공동체를 통해서 읽혀지고 가르쳐져야 합니다. 주님은 두 세 사람이 당신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함께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12제자를 세우신 것입니다.
곧 말씀은 소그룹 공부와 구역 공부, 수요 여성 공부, BNI등을 통해서 곧 공동체 안에서 배워야 합니다. 계속 배워야 합니다. 이 때 제자가 됩니다. 진정으로 자유한 자가 됩니다.
그러면 아들로 인해서 늘 자유함 가운데 사는 삶은 어떤 삶일까요? 말 그대로 자유합니다. 자유롭게 꽃이 핍니다. 어떤 꽃이 어떻게 필지 우리는 모릅니다. 단지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할 때 자유로운 자가 되고 자유롭게 꽃이 피게 됩니다.
어제도 저는 토요 아침 기도회를 마치고 교회 주변을 산책했습니다. 그 동안 가 보지 않은 길로 가 보았습니다. 곳곳에 아름답게 핀 꽃들을 보았습니다. 모두가 자유롭게 그래서 아름답게 피고 있었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식당 주인의 이야기를 보면 숫자 장난을 하면서 아주 자유롭게 사는 것 같습니다. 아주 재미있게 사는 것 같습니다. 이처럼 죄의 종된 자들도 재미 있게 사는 것 같은데 진리로 인해서 아니 자유로워진 삶은 이와는 비교도 안 되는 삶이 펼쳐지지 않을까요? 색다른 자유함이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요?
어느 미국 목사님 가정에 두 아들이 있는데 그들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동생이 어릴 때부터 근육 무기력증을 앓는 선천적 질환을 갖고 태어났습니다. 숨구멍이 자꾸 막히기에 어쩔수 없이 목에 구멍을 뚫고 목으로 숨을 쉬도록 했습니다. 얼마간 지나다 보니 아들이 자꾸 목에 있는 의료 기구를 빼는 것입니다. 그것이 빠지면 숨을 못 쉬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타이르고 타일렀습니다. 빼고 나면 자신도 숨이 가빠서 절절 매면서 또 빼고 또 뺍니다. 온 가족은 왜 이럴까 안타까워하면서 고심 고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형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동생은 혼자서 목에 의료 기구를 넣고 있는 것이 싫었던 것입니다. 자기도 남들처럼 정상이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에 형이 지혜를 짜냅니다. 자기가 목에 비슷한 의료 기구를 부착하기로 했습니다. 동생과 자기가 똑 같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형은 동생의 아픔에 귀를 기울인 것입니다.
형은 자유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유로 동생을 풀어주는데 사용하였습니다. 동생의 아픔에 귀를 기울인 것입니다. 동생과 함께 된 것입니다. 그 이후로 동생은 더 이상 빼지 않고 아름답게 자라갔을 것입니다. 자기만이 갖고 있는 복의 세계를 마음껏 이웃을 위해 발휘했을 것입니다. 자기는 형과 같은 아버지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주님의 모습이 아닐까요? 주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닮은 꼴이 되신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을 위한 닮은 꼴이 됨을 통해서 우리를 자유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 안에 거한다면 우리는 이 주님을 알게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닮은 꼴이 되시기 위해서 우리를 찾아 오신 것을 알게 됩니다. 죄의 종된 자들을 위하여 종의 모습으로 찾아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십니다. 그 때 우리는 아름다운 꽃을 자유롭게 피게 됩니다. 우리도 주님을 닮은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리입니다. 이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자유한 자들은 자기만의 고유한 꽃을 피우게 됩니다. 하나님의 우주적 역사의 정원 안에서 우리가 피워야 할 꽃을 피우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십시다.
말씀을 거둡니다.
J.I. Packer라는 유명한 신학자가 있습니다. 이 분이 역사 가운데 큰 자취를 남긴 131명의 유명한 기독교인들을 소개하는 책을 펴 냈습니다. 다음과 같이 131명을 소개합니다.
“역사는 날짜도 통계도 사회 운동도 아니다. 역사는 사람이다. 멋진 사람들이다.” 그러면서 131명을 한 사람 씩 소개합니다. 신학자 목회자 선교사 뿐 아니라 음악가 미술가 작가 시인 정치가 학자 내지 과학자들을 소개합니다.
이들 모두 역사 속에서 빛이 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이 빛이 될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곧 131명의 위인들은 주님의 말씀에 거하며 아들로서 살았기에 우주적 역사의 정원 안에서 자신의 꽃을 피워 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학교에서 이 말씀으로 표어를 삼는 것도 큰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주님으로 인해 죄에서 해방 된 자로서 주어진 영역에서 아들처럼 사는 것입니다. 그 때 더욱 진리를 알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자유로와 질 것입니다. 이러한 아들들로 인해서 죄의 종된 자들에게 진리가 선포 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십시다. 주님 안에서 자유인이 되십시다. 우리는 아들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