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운명에 만족하지 못하는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청년은 신을 원망하며 소리쳤습니다.
“신이시요, 제발 부탁입니다. 제 운명을 바꿔 주십시오!”
그러자 신은 웃으며 말했습니다.
“세상에 자신의 운명에 만족하며 사는 사람을 한 사람이라도 찾아온다면 네 운명을 바꿔 주겠다.”
청년은 기쁨에 차서 즉시 길을 떠났습니다. 첫째날 그는 바로 궁전으로 가서 황제에게 자신의 운명에 만족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황제는 뜻밖에도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합니다.
“나는 비록 한 나라의 왕이지만, 항상 불안하고 초조하다네. 언제 어디서 암살이나 독살당할지 알 수 없고, 사방에서 내 자리를 빼앗고자 중상과 모략을 쉬지 않으니, 차라리 거리의 떠돌이가 되어 자유롭게 살고 싶다네.”
왕의 말을 들은 청년은 옳다구나 싶어 거리의 떠돌이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떠돌이는 “하루 삼시 세 끼도 빌어먹지 못하고 추위와 배고픔에 떨어야 하는 내가 어찌 왕의 자리보다 낫다고 하는 게요?”라고 되물었습니다.
한 마디로 언제나 만족할만한 완벽한 삶은 이 세상에는 없다는 이야기인줄 압니다. 한 가지가 좋으면 다른 면으로는 안 좋은 면이 항상 같이 있는 것이 이 땅에 삶인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들의 직업도 그렇지 않습니까? 한 가지 면이 좋으면 다른 면은 안 좋은 점이 있습니다. 이처럼 이 세상의 삶은 완벽한 삶은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잘 못 만드셨나요? 그럴리가 없습니다. 분명 인간의 죄로 인해 우리는 완벽한 삶을 살지 못하지만 살아계신 하나님께서는 다시금 완벽한 세계로 우리를 이끄실줄 압니다. 어떻게…?
그러면 함께 완벽한 삶을 찾아 가 볼까요?
400년간의 애굽의 종살이를 마친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를 건너서 이제 약속의 땅 가나안 앞까지 왔습니다. 모세는 12지파를 대표해서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 땅으로 보냅니다. 정탐꾼들에게 그 땅이 어떠한지 정탐하라고 합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두 가지를 보고 옵니다. 먼저 아낙 자손이 사는 것을 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아니지만 32, 33절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정탐꾼들은 이들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란 것 같습니다. 사실 12명의 정탐꾼 중에 두 명 곧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10명의 정탐꾼이 이와 같이 보고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을 또 깜짝 놀라게 한 것이 있습니다. 23, 24절 말씀입니다.
“또 에스골 골짜기에 이르러 거기서 포도송이가 달린 가지를 베어 둘이 막대기에 꿰어 메고 또 석류와 무화과를 따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거기서 포도를 베었으므로 그 곳을 에스골 골짜기라 불렀더라.”
어느 골짜기를 가 보았는데 깜짝 놀랍니다. 포도가 열렸는데 너무나 큰 포도송이입니다. 얼마나 큰지 두 사람이 메고 올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그 곳 이름을 에스골 골짜기라고 부릅니다. 에스골의 뜻은 ‘송이’라는 뜻입니다.
정탐꾼들의 눈에 들어 온 것은 하나는 거인처럼 큰 아낙 자손들입니다. 또 하나는 큰 포도 송이입니다. 정자 좋고 물 좋은 곳이 없다는 말이 있는데 정말로 정탐꾼들도 하나 같이 그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에스골 골짜기의 포도는 좋은데 아낙 자손들이 마음에 걸립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약속한 가나안 땅은 완벽한 땅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12 정탐꾼들은 두 그룹으로 나뉘어집니다. 여호수아와 갈렙, 그리고 나머지 10명으로 나뉘어집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비록 아낙 자손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 그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외칩니다.
반면 10명의 정탐꾼들은 포도 송이는 크지만 자기들은 아낙 자손들 앞에서 메뚜기와 같다고 외칩니다. 이 두 보고를 듣고 이스라엘 민족은 어느 보고를 선택합니까?. 14:4절 말씀을 보면,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곧 10명의 보고 곧 다수의 의견을 접수합니다. 다수의 의견을 접수한 결과 하나님은 진노하십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광야로 내 모십니다. 광야에서 40년 방황하게 하십니다.
한편 광야 40년을 방황하면서 이스라엘 민족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은 두 가지가 있었을줄 압니다. 하나는 아낙 자손 또 하나는 포도 송이…. 물론 12 정탐꾼들의 뇌리에도 이 두 가지는 떠나지 않았을줄 압니다. 그런데 10명의 정탐꾼들의 뇌리에는 아낙 자손이 너무 커 보였습니다. 반면 여호수아와 갈렙에게는 포도 송이가 더 커 보였습니다. 12명이 모두 같이 광야 40년의 길을 가야 했지만 이 중 누가 가나안 땅에 들어 갔습니까? 포도 송이를 더 크게 보았던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들어 가게 됩니다. 이제 완벽한 삶의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오늘 성만찬을 통해서 포도주를 함께 나누었는데 에스골 골짜기의 포도송이와 우리가 오늘 함께 나눈 포도주와는 어떤 연관이 있지는 않을까요? 저는 당연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에스골 골짜기의 포도송이와 성만찬의 포도주를 연관시킨 것은 제가 임의로 만들어 낸 것은 아닙니다. 요즘 신약 학자 중에 세계적으로 공헌하시는 N.T. Wright이라는 학자가 성만찬에 대한 책을 썼는데 그 책에서 그는 에스골 골짜기의 포도와 성만찬을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모세를 통해서 정탐꾼을 가나안 땅에 보낼 때는 포도가 처음 익을 즈음이었습니다. 20절 말씀입니다.
“또 그 땅의 실과를 가져오라 하니 그 때는 포도가 처음 익을 즈음이었더라.”
곧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포도가 처음 익을 즈음에 가나안 앞에 도착하게 하신 것입니다. 사실 이 때는 광야에서 항상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이스라엘을 인도하고 있었으니 하나님께서 마음대로 시간을 조정할수 있으셨습니다. 아낙 자손은 일년 내내 언제든지 들어가면 볼수 있었지만, 포도 송이를 보는 때는 정해져 있었습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포도 송이가 크게 열리는 바로 이 때에 가나안 땅 앞에 도착하게 하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아낙 자손으로 인해 가나안 땅에 안 들어 가겠다고 아우성 칠 것을 아신 것입니다.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은 아낙 자손을 보고 도망칠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은 귀한 것을 보여주시길 원하신 것입니다. 에스골 골짜기의 포도 송이를 보여주서서 광야 40년의 시간을 아낙 자손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에스골 골짜기의 포도 송이를 생각하게 하신 것입니다.
곧 에스골 골짜기의 포도는 광야 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희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가나안에 못 들어 가고 죽어야 했지만 여호수아와 갈렙 그리고 젊은이들 곧 후손들은 에스골 골짜기의 포도를 맛 보게 될 것을 기대하면서 광야 생활을 견딜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은 믿음으로 소망 가운데 에스골 골짜기의 포도를 맛 보면서 광야의 삶을 통과한 것입니다. 에스골 골짜기의 포도를 생각하지 않고 과연 이스라엘 민족이 40년 광야 생활을 견뎠을까요?
그런데 이스라엘인뿐 아니라 오늘 우리도 어찌 보면 광야 40년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천국인 가나안에 들어 가기 전 우리는 광야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한편 우리들의 뇌리에도 두 가지가 늘 다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낙 자손과 포도 송이.
어떤 때는 아낙 자손이 어떤 때는 포도 송이가 더 커 보이지 않습니까? 아낙 자손이 더 커 보일 때는 광야에서 죽어 갔던 이스라엘 인들이 되어 집니다. 반면 포도 송이가 더 커 보일 때는 여호수아와 갈렙이 되어집니다.
사실 아낙 자손은 없고 포도 송이만 있는 삶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 곳은 영원한 가나안 땅이죠. 이 세상을 떠나야 갈수 있는 곳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포도송이만 있는 영원한 가나안 땅에 들어 갈 텐데, 그 곳에 가기 까지는 광야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오늘 우리가 나눈 떡과 포도주는 광야 생활을 하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살과 피인 것입니다.
우리가 나누는 주님의 살과 피로 인하여 우리들이 사는 곳은 에스골 골짜기가 됩니다. 우리들의 직장이 우리들의 삶을 완벽한 곳으로 만들지 못 합니다. 우리들의 삶을 완벽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에스골 골짜기의 포도 송이입니다.
주님의 성만찬을 통해 주어지는 떡과 잔을 아낙 자손 보다 더 크고 귀하게 여기는 자들에게는 여호수아와 갈렙의 축복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들은 완벽해 보이지 않는 이 세상에서 완벽한 축복의 삶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떡과 포도주가 아낙 자손을 이기고도 남게 하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이기주 작가의 글에서 성만찬의 위대함을 느껴 보았습니다. 쇠약한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가서 링겔 주사를 맞게 하셨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워낙 연약해서 장작개비와 같이 보였다고 합니다. 순간 링겔 주사를 보면서 많은 것을 느낍니다. 링겔 주머니가 자신의 것을 다 내주고 나니 어머니가 회생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시를 적었습니다.
뚝.
뚝.
한 방울 한 방울
자신의 몸을 소진해 가며
사람을 살찌우고
다시 일으켜 세우니 말이다.
주님은 장작개비와 같은 온 인류를 위해서 포도당 주사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것을 다 내 주셨습니다. 우리를 살찌우고 다시 일으키시기 위해서….
우리는 이제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셨으니 바로 주님의 능력을 덧 입은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아낙 자손도 무찌를수 있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주님은 에스골 골짜기의 포도 송이가 되셨습니다. 온 인류를 위한….
이제 주님으로 인해서 온 세상은 에스골 골짜기가 되었습니다. 아니 주님의 성만찬이 있는 곳 주님의 살과 피를 사모하는 자들이 사는 곳은 모두 에스골 골짜기입니다. 바로 그 골짜기에 주님은 포도 송이로 오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잘 알았던 초대 교회 교부 아다나시우스(Athanasius)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되도록 하나님은 인간이 되셨다.”
교우 여러분,
우리가 사는 곳은 광야입니다. 광야는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사모하게 만듭니다. 그 때 광야는 에스골 골짜기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포도송이로 찾아 오시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에스골 골짜기로 찾아 오신 주님을 늘 사모하십시다. 주님은 광야를 사는 우리들에게 힘과 능력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삶은 완벽합니다. 광야의 삶에서 주님의 링겔을 맞으며 승리의 삶을 사십시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거기서 포도를 베었으므로 그 곳을 에스골 골짜기라 불렀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