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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참으시겠느냐?” -누가복음 18:1-8 (2018. 7. 8)


“오래 참으시겠느냐?”
누가복음 18:1-8

어느 중학교 수업시간입니다. 그 시간은 세계 7대 불가사의에 대해 공부하는 날이었습니다.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자신들이 생각하는 7가지 불가사의를 적으라고 했습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노트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1. 피라미드
2. 빅토리아 폭포
3. 그랜드 캐니언
4. 콜로세움
5. 만리장성
6. 에펠탑
7. 타지마할

잠시 후 선생님은 한 학생이 노트에 아무 것도 적지 않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유를 물었더니 너무 많아 답을 쓸수 없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도와 줄테니 몇 개만 말해 보라고 하자 학생은 자기가 생각한 불가사의를 말하기 시작합니다.
1. 만지기
2. 맛보기
3. 보기
4. 듣기
5. 뛰기
6. 웃기
7. 사랑하기

이 학생은 다른 학생들과 세상을 보는 눈이 달랐습니다. 많은 학생들은 보이는 물체 안에서 불가사의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이 학생은 지금도 진행 중인 자신과 이웃 안에 일어나고 있는 사건 안에서 불가사의를 찾았습니다.
많은 학생들은 고유 명사가 되어버린 과거 역사의 유적 아니면 자연 경관 안에서 찾았지만 한 학생은 명사가 아닌 동사 안에서 불가사의를 찾았습니다.

그러면 명사 안에서 불가사의를 찾는 학생과 동사 안에서 불가사의를 찾는 학생 중 누가 불가사의한 작품을 만들어 가게 될까요? 물론 명사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명사 보다 동사를 더 중요시 여기는 학생들이 아닐까요?

제가 작년 안식월 때 프랑스 파리를 방문했는데 루우블 박물관에 두 차례 들렸었습니다. 너무 소장된 작품들이 많기 때문에 미리 책을 통해 꼭 봐아야 할 작품들을 골라서 관람을 했습니다.
그러니 안내원들에게 계속 물어가면서 모나리자가 어디 있느냐 묻고 비너스 상은 어디 있느냐 물으면서 관람을 했습니다. 저는 명사를 중요시 여기면서 관람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작품 앞에서 그 작품을 그리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옛날부터 훌륭한 미술인들은 남의 작품을 그대로 그려 보면서 훈련을 쌓았다고 합니다. 그들은 이미 명사가 된 작품 앞에 있지만 저와는 달랐습니다. 동사를 중요시 여긴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 앞에서 그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불가사의한 작품은 누구를 통해 만들어질까요? 명사 앞에 서 있는 자가 아니라 그 앞에서 움직이는 자들입니다.

그러면 우리 주님은 어떠실까요? 주님은 명사와 동사 중 어느 것을 더 불가사의하게 여기실까요? 주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아주 특별한 불가사의한 삶을 사는 길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1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기도입니다. 앞에 학생은 7가지 동사 중에 기도를 넣지 않았습니다. 믿는 학생이 아니었는지 모릅니다. 우리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 특권이 있습니다. 기도입니다. 기도는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기도는 명사가 아닙니다. 동사입니다. 불가사의한 동사입니다.

그러면 기도라는 불가사의한 일에 참여하려면 무엇을 주의해야 하고 또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은 비유를 통해 기도의 불가사의를 멋지게 설명해 주시고 계십니다. 2절 말씀입니다.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먼저 무시무시한 재판장을 등장시킵니다. 청중들은 소름이 끼쳤을 것입니다. 기도에 대해 가르치시는데, 자비한 재판장을 언급하셔야 할텐데 전혀 기대 밖입니다.
청중들 중에는 그 마을의 재판장으로 인해 여러번 마음의 상처를 입은 사람들도 있었을줄 압니다. 저도 재판을 받아 본 적이 있는데…, 교통 티켓 때문에 재판소에 갔었습니다. 포인트를 줄여야 했고 다행이 목적대로 재판장은 포인트를 줄여 줬습니다.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저의 판사는 다행히 무시무시한 무자비한 재판장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판사는 일체 벌금과 포인트를 줄여주지 않는 분도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면 기도를 가르쳐 주시려면 제가 만난 그런 자비로운 재판장을 등장시켜야 하는데 주님은 무시무시한 재판장을 등장시킵니다. 그래도 청중은 마음은 좀 불편하지만 계속 귀담아 듣습니다. 3절 말씀입니다.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청중의 가슴은 아파 옵니다. 과부인 것도 서러운데 재판관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것도 전혀 사랑은 없고 무자비한 재판장에게…. 과부가 더 상처를 입을 것이 눈에 선히 보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재판장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장입니다. 그러니 과부를 얼마나 무시하겠습니까?
한편 어떻게 보면 과부의 원수가 재판장과 한 패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실 부패한 나라 재판장들이 무자비합니다. 그들은 나쁜 사람들과 손을 잡고 판결을 많이 합니다. 사실 지금도 그렇지 않습니까? 전 세계적으로 재판관을 믿을 만한 나라가 몇 나라나 있겠습니까? 예수님 당시는 더 했을줄 압니다. 모두 권세 잡은 자들에게 아부하는 재판장들로 가득차 있을 때였습니다.
그렇다면 전혀 가능성 있는 일이 아닙니다. 재판에서 이길 확률은 0%입니다. 과부는 재판장의 친구와 원수를 맺은 것이고 그 원한을 풀어 달라고 하니 그게 말이 됩니까? 과부는 헛수고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청중들은 더욱 주님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결국 기도는 이길 확률이 없는 0%의 확률에 희망을 거는 것임을 말씀하시고 계시다고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이들은 생각합니다. “재판장들의 마음이 변한 적을 본 적이 없어 특히 자기 친구가 관련된 건에는 절대로 마음을 바꾸지 않지….” 어떤 사람들은 떠나려는 참입니다. “기도는 하지 말라는 말이군” 생각하면서…. 주님은 떠나려고 하는 청중들을 눈치챘는지 급하게 말씀하십니다. 4, 5절 말씀입니다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청중들은 귀를 의심합니다. 과부가 이겼습니다. 재판장은 자기의 친구 보다는 과부의 청을 들어 준 것입니다. 이는 기적중에 기적입니다. 정말로 불가사의한 일이 생긴 것입니다. 실제로 재판장이 들어줄 확률은 0%가 아니라 -%였던 것입니다.
-%가 무어냐고 궁금해 하실줄 압니다. 혹 뗄려다 혹 붙이는 격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재판장의 친구에게 원한을 풀어달라고 하니 재판장은 다시는 감히 이런 일로 오지 못 하도록 더 불리한 판결을 내릴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상 외로 과부의 손을 들어 주었습니다.
이처럼 어리둥절하고 있는 청중에게 주님은 계속 말씀하십니다. 6, 7절 말씀입니다.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청중은 가슴의 찔림을 받습니다. 그들은 늘 생각했습니다. 재판장들은 늘 부자들에게 돈을 받고 불의하게 재판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해 오고 있었습니다. 그당시 재판장들은 모두 불의한 재판장들입니다.
그들 머리에는 재판장은 명사 였습니다. 불의한 재판장이었습니다. 이것이 그들 머리에 박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불의한 재판장이 과부의 원한을 풀어 주었습니다. 불의한 재판장이 움직였습니다. 동사가 되었습니다.
잠시 정신을 잃고 있는 청중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사실 주님은 더 깊은 의미를 갖고 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 비유를 말씀하신 실제 이유는 청중과 재판장의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실제로는 청중과 하나님과의 관계였습니다. 청중과 재판장의 관계를 가지고 지금 주님은 청중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묘사하고 계신 것이 아닐까요?
주님 보시기에 청중은 하나님을 명사화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들의 원수와 한 짝이 되어서 자기들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 분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매번 하나님이 원수와 짝이 되신 것은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인생의 고비에서는 하나님은 마음의 소원을 들어주시지 않는 분이셨습니다. 도리어 원수와 짝이 된듯 느낄 정도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가장 중요한 때는 어떻게 하죠? 낙심합니다.
주님은 인생의 중요한 때 낙심하는 청중들을 자주 자주 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1절 말씀 다시 봉독해 드리면,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청중은 늘 하나님을 믿고 따르고 기도하는 신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주 자주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가장 중요한 과제가 닥쳤을 때는 갑자기 하나님이 달라져 있는 경험을 여러 차례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야속한 불의한 재판장이 되곤 하셨습니다. 움직이지 않는 명사가 되곤 하셨습니다.

Philip Yancey의 ‘Disappointment with God’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한국어로는 어떻게 번역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책의 서론에 처음 책을 쓸 때의 이야기가 소개되어져 있습니다.
몇몇 분들에게 이런 제목으로 책을 쓴다고 했더니 어디서 그 소식을 들었던지 여기 저기서 하나님께 실망한 이야기 보따리를 끄내 놓더라는 것입니다.
그들 마음 한 구석에는 하나님은 어느덧 야속한 불의한 재판장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사소한 것은 잘 들어 주시지만 큰 것은 들어주지 않으시는 재판장이 되신 것입니다. 명사가 되신 것입니다.

이 것이 바로 주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청중의 모습이었습니다. 중요할 때 하나님을 명사로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청중은 찔림을 받습니다.
“내가 명사로 보고 있었구나. 내가 마음 속 깊이 하나님을 불의한 재판장으로 여기고 있었구나.” 이를 깨닫는 청중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7절 말씀입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기도의 응답은 두 가지일줄 압니다. 하나는 원한을 풀어주시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기도 응답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을 명사가 아니라 동사로 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원한을 풀어주시는 과정 중에 있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아직 원한은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작되었습니다.
첫번째 응답의 결과는 시간이 지나면 어느덧 명사가 됩니다. 의로우셨던 하나님, 원한을 풀어주신 하나님으로…, 명사입니다. 이것도 중요하지요. 더 중요한 것은 두번째 응답인 동사입니다. 원한을 풀어주시는 하나님…. ‘풀어 주신’이 아니라 ‘풀어 주시는 하나님’. 이 하나님은 계속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곧 기도는 동사입니다. 하나님을 움직입니다. 기도하는 자는 하나님과 더불어 움직이는 자들입니다. 기도로 인해서 새로운 지평이 열리는 계속 새로운 지평선을 향해 움직이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기도자를 더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8절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무슨 말씀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계속 하나님을 명사로 만들어 간다는 것입니다. 원한을 풀어주신 하나님으로…. 그러나 참 믿음은 나의 원한이 풀어짐 보다 더 소중한 것은 동사의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풀어주시는 하나님을, 계속 새로운 세계를 펼쳐 가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왜 원한이 주어질까요? 기도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원한 가운데 우리는 기도합니다. 동사가 됩니다. 그 때 하나님은 움직이십니다. 우리와 더불어 새로운 일들을 만들어 가십니다. 하나님도 동사가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기도하는 사람 모두 동사가 되는 것입니다. 함께 움직이는 것입니다. 함께 춤을 추는 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얼마전에 말씀드렸던 심장을 양보하여 도리어 더 큰 축복을 받았던 하형록 회장에게 또 다른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회장이 아주 어려운 상황에 처해서 직장생활은 물론 신앙생활까지 그만두고 싶은 때가 있었다고 합니다. 모든 것을 그만두기로 하고 숲으로 가서 하나님과 마지막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그만두지 말아야 할 이유를 한 가지만 알려 주십시오.”
하나님의 응답이 다음과 같이 들렸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렴. 고사리와 대나무가 보이지? 나는 고사리와 대나무의 씨를 심을 때 각별히 신경을 썼다. 빛을 주고 물을 주었다. 고사리는 빨리 자랐다. 매우 아름다운 초록빛으로 땅을 덮었다. 그사이 대나무에서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대나무를 포기하지 않았다.
2년이 지나자 고사리는 더 생기 있게 자랐고 풍성해졌다. 대나무 씨는 그대로였다. 그러나 나는 대나무를 포기하지 않았다. 3년째 되던 해에도 변화는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만두지 않았고, 4년째에도 변화는 없었다. 그리고 5년째 되던 해에 아주 작은 싹이 땅에 나타났다. 고사리에 비하면 그 싹은 아주 작고 하찮게 보였다. 그러나 6개월이 지나자 대나무는 30m가 넘게 자랐다.
대나무의 뿌리가 자라는 데 4년이 걸렸다. 그 뿌리가 대나무를 강하게 만들었고,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것을 주었다. 나는 나의 창조물이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은 주지 않는다.
아들아, 너는 네가 고통스러웠던 그 모든 시간이 사실은 뿌리를 자라게 한 과정이라는 사실을 아느냐? 나는 대나무를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너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과 너를 비교하지 마라. 대나무에게는 고사리와는 다른 목적이 있다. 그러나 대나무와 고사리는 함께 아름다운 숲을 만든다. 너희 시간이 올 것이다. 너는 높이 자랄 것이다.”

하형록 회장은 명사의 하나님을 찾아 갔습니다. 기도하였습니다. 결국 동사의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기도로 인해서….
그리고 계속 동사의 하나님과 함께 일하시고 계십니다.

기도는 불가사의한 것입니다. 명사의 하나님을 동사의 하나님으로 바꾸게 합니다. 기도는 동사입니다. 기도하십시다. 계속….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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