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한국에 있는 대학 친구로부터 책 한 권을 선물 받았습니다. 본인의 수필집을 보내 온 것입니다. 그 중 다음 이야기가 제 눈길을 끌었습니다. 내과 의사가 된 친구인데 학생 시절과 수련의 시절 가장 화제의 대상이었던 어느 선생님에 대한 글이었습니다.
학생이나 수련의 모두 이 선생님을 피하길 원하였는데, 선생님은 피하고 싶다고 피할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학생에게 질문을 하는데 잘 대답을 못 하면 10원 짜리 동전 두 개를 건네 줍니다. 얼떨결에 동전 두 개를 받고 영문을 몰라하면 “나 같으면 버스 타고 한강에 가서 빠져 죽겠다” 말하십니다. 물론 수련의에게도…
한편 선생님은 대학에서 최고의 원칙주의자로 인정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 많은 교직원의 경조사에 빠지는 법이 없고, 교수님의 상가에는 꼭 한밤중까지 앉아 계셨다고 합니다. 상을 당한 교수와 별로 친분이 없어도, 초임의 젊은 교수라도 항상 밤 12시까지 영안실을 지키셨다고 합니다. 따라서 선생님 밑의 교수나 레지던트들도 밤늦게까지 상가에 있어야 했다고 합니다.
글을 쓴 친구가 병으로 수술을 받고 누어 있을 때에도 선생님께서는 스스로의 원칙에 따라 매일 친구 방으로 문병을 오셨다고 합니다. 막상 오셔도 사실 적절한 대화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도…. 친구는 선생님이 어려워 자연스럽게 대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병실을 찾으셨습니다. 하루는 늦게 오신 적이 있는데 오히려 친구가 기다려지고 안 오시는 것 같아 섭섭한 마음까지 잠시 들었다고 합니다.
선생님의 원칙을 지키는 삶이 선생님의 따님 결혼식에서 꽃이 피었습니다. 성당에서 한다는 청첩장을 받고 친구는 그간 선생님에게 받은 은혜를 갚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카톨릭 결혼식은 시간이 걸리고 지루해서 친구는 보통 결혼미사에 참석하지 않고 인사만 하고 식사를 하거나 바로 돌아 오곤 했다곤 합니다. 사실 카톨릭은 결혼 미사도 예식이기에 성만찬까지 다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길어질수 밖에….
그런데 성당에 가 보니 수많은 사람이 경건하게 미사에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복도에 있거나 식당으로 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모두 선생님에게 진 빚을 갚고 있었던 것입니다. 미사를 집도하시던 신부님이 갑자기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제 생애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엄숙하게 참석한 결혼 미사는 처음입니다.”
선생님께서 평소에 뿌려 놓은 삶의 시간들이 따님의 결혼 미사에서 아름답게 꽃 핀 것 같습니다.
오늘 벌써 7월 세번째 주일 예배로 드립니다. 새로운 희망을 안고 시작한 한 해도 절반이 지나고 있습니다. 이제 한 달만 지나면 가을이 문턱에 다가 옵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그동안 어떤 원칙에서 어떻게 지내 왔는지 한번 살펴 봄도 큰 유익이 될줄 압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올해 표어를 생각하면서 지난 시간들을 뒤돌아 보고 또 남은 한 해를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함도 좋을줄 압니다. 올해 저희 교회 표어가 ‘겨자씨를 심는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여느 해처럼 올해 신년 주일에 교회 표어를 가지고 설교 말씀을 드렸습니다.
겨자씨는 보이지 않는 작은 씨이지만 땅에 심겨지면 자라서 나무가 되어 많은 새들이 와서 깃들이게 된다는 주님의 겨자씨 비유의 말씀을 나눴습니다.
자, 그럼 벌써 반년이 지났는데 지금쯤은 보이지 않던 겨자씨가 싹이 나고 자라서 이제는 제법 눈에 보이는 나무가 되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물론 겨자나무가 몇 년이 지나야 열매를 맺히고 그 가지에 새가 앉게 될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연초에 이런 표어를 정하고 한 해를 시작한 이유는 1년이란 시간 안에 보이지 않는 인생의 겨자씨들이 보이는 나무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시작한 것이 아닐까요? 어느덧 절반이 지나갔지만….
그러면 이제부터 연말까지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매일 매일 얼마나 겨자나무가 자랐는가 살펴 보는 것일까요?
저의 요즘 소일거리 중에 하나는 두 달전에 심은 나팔꽃이 자라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아침 저녁으로 살펴 봅니다. 그런데 볼 때마다 자란 것을 느낍니다. 아침에 봤을 때와 저녁에 봤을 때 다릅니다. 또 그 다음 날 아침에 보면 또 다릅니다. 첫번째 나팔 꽃이 핀것이 너무 예뻐서 사진도 찍어 놓았습니다. 예쁜 이유는 제가 심었기 때문에 예뻐 보이는 거겠죠. 이렇게 나팔꽃이 자라고 피는 것을 즐기고 있었는데 하루는 다음과 같은 글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Don’t judge each day by the harvest you reap but by the seeds you plant.
Robert Louis Stevenson
“하루의 삶을 그 날의 수확으로 평가하지 말고 그 날 뿌린 씨로 평가하라”
저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는 말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날 그 날의 행복을 그 날 무엇을 손에 쥐었느냐에 따라 다르게 느끼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저 나름대로 말을 이렇게 바꿔 보았습니다.
“하루의 삶을 그 날 손으로 무엇을 쥐었느냐로 평가하지 말고 그 날 손으로 무엇을 뿌렸느냐로 평가하라.”
올해 표어에 맞게 또 이렇게 바꿔 보았습니다.
“하루의 삶을 그 날 수확한 삶의 겨자나무 열매로 평가하지 말고 그 날 손으로 뿌린 보이지 않는 겨자씨로 평가하라.”
그러면 어떤 분들이 이런 멋진 삶을 살아 갈까요? 본문 말씀을 상고하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의 시편의 저자는 이런 멋진 삶을 살고 있는 분입니다. 마지막 5, 6절 말씀을 보면 쉽게 알수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라.”
그는 매일 매일을 손에 무엇을 쥐는 것보다 뿌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아무나 이런 삶을 살까요? 이런 삶을 사는 자들의 특징을 본문 말씀을 살펴보면 알수 있을 것 같습니다. 1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먼저 그는 아름다운 경험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과거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정확히는 시인은 자신의 경험 보다는 민족의 경험 공동체의 경험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 시편은 바벨론 포로를 다녀 온 후 감격 가운데 예루살렘 성전을 올라가면서 드리는 찬송시입니다. 이들은 포로된 아픔의 이야기와 함께 해방된 자유인이 되었던 놀라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제 자유인이 된 기쁨을 안고 노래를 부르면서 성전으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노래는 방금 바벨론에서 해방되어 온 자들만의 노래가 아닙니다. 그들이 제일 먼저 불렀을줄 압니다. 그러나 그 후손들이 계속 같은 노래를 부릅니다. 어느덧 조상들의 이야기가 바로 자기들의 이야기가 된 것입니다. 마치 자기들이 해방되어 온 것 처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곧 후손들은 선조들의 경험을 자신들의 경험으로 여기고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오고 가는 세대를 하나로 묶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소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곧 매일 씨를 뿌리는 자들의 축복을 누리려면 이런 아름다운 노래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뿌려진 씨가 자라서 열매를 맺는 경험을 하였고 이에 노래 부르며 새로운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요즘 나이든 세대분들이 젊은 세대를 걱정을 많이 하고 있음을 모두 느끼실줄 압니다. 지난주 NCKPC임원회에 다녀 왔는데 한국의 장래와 차세대를 위해 많이 염려하고 있는 것을 새삼 느낄수 있었습니다.
임원회에 다녀 온 후 오늘 설교 말씀을 준비하는 중 깨달음이 왔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은 과거의 이야기를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바벨론 포로 이야기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들 역사의 최고의 순간은 바벨론에서의 해방입니다. 그런데 그 날이 최고의 순간이 되기 위해서는 그들은 바벨론 포로 생활을 잊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아픔을 기억하였고 그러기에 꿈꾸는 기쁨도 가득찼던 것입니다.
반면 우리는 자녀들에게 어떤 것을 가르쳤습니까? 새마을 운동과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그리고 월남전을 통한 외화수입 등만을 가르치지 않았습니까? 한국 땅에 새마을 운동의 노래 소리가 아침마다 전국을 울렸습니다. 그러는 사이 일제시대의 아픔은 잊혀져 갔고 6/25의 처참한 이야기도 멀어져 갔습니다.
물론 경제개발을 해야 했습니다. 새마을 운동을 했어야 했습니다. 그 가운데 잊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일제시대의 아픔이요 동족상잔의 비극이었습니다. 곧 과거의 이야기였습니다. 아픔의 땅 위에 피어오르는 축복의 세계를 노래했어야 하는데 우리는 과거의 아픔은 묻어 두고 열심히 “잘 살아 보세”만 불렀던 것입니다.
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과거의 아픔이 축복으로 변한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며 성전을 올라가곤 한 것입니다. 2절 말씀입니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이처럼 그들은 1주일에 한번 안식일을 지키면서 과거의 아름다운 경험을 노래로 불렀던 것입니다. 바벨론의 아픔과 해방의 기쁨이 어느덧 이들의 삶의 최고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된 것입니다. 이 노래를 부르는 이들의 마음은 어떠할까요? 3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이처럼 과거의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기억하며 노래 부르다보니 자연적으로 기쁨이 솟구쳐 오릅니다.
한편 이들의 기쁨은 그 다음 단계로 넘어 갑니다. 4절 말씀입니다.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 보내소서”
왜 ‘남방 시내들 같이’라고 시인은 고백할까요? 이 당시 남방 시내들의 특징을 보면 도움이 됩니다. 마른 골짜기들이 갑자기 물이 철철 넘치는 시내가 되곤 했습니다. 깜짝쇼를 벌이곤 했던 것이 이스라엘 남방 시내들인 것입니다. 곧 시인은 바벨론 해방의 이야기로 놀라게 하신 하나님께 그와 같은 일을 또 일으켜 달라고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루 아침에 전혀 예상치 못했고 상상치 못했던 일을 베푸신 하나님께 그와 같은 일들을 또 일으켜 달라고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나 이런 일을 간구할수 있을까요? 과거의 하나님께서 베푸신 아름다운 일들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자들만이 이것을 노래하는 자들만이 자연스럽게 이런 간구를 하게 되지 않을까요?
사실 저희 교회적으로도 함께 기억하고 기뻐해야 할 여러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몇 년전 하늘 나라 가신 역사학자이신 백린 장로님께서 저에게 우리 교회의 중요한 사건을 세 가지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첫번째가 65년전에 창립한 날이라고 합니다. 그 날이 없었으면 오늘 저희 교회가 없었을줄 압니다.
두번째가 저희 교회가 1985년도에 현재 교단인 PCUSA로 가입한 일이라고 합니다. 저희 교회는 더 이상 독립교회가 아니라 미국 유수의 교단에 속해서 새로운 지평을 넓히게 된 것입니다.
세번째가 8년전 ECC를 건축한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이 지역에서 공부도 하시고 목회도 하신 어느 목사님께서 저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보스톤에서 교회가 건축을 하면 그것은 기적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후에 한국에 나가서 건축을 마쳤다고 하니 다른 말씀은 더 안 하시고 사모님이 화가신데 사모님 작품 세 점을 저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frame해서 parlor에 붙여 놓았습니다. 저는 parlor에서 그 작품을 볼 때마다 우리와 함께 우리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축복하시는 목사님 생각이 납니다. 아울러 우리 가운데 기적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만 하시려고 그 작품들을 우리가 늘 보게 하실까요? 기적을 일구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한편으로 새로운 기적을 사모하게 하심이 아닐까요?
교우 여러분,
종종 그 그림을 보시면서 과거의 이야기를 생각하며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새롭고 놀라운 일을 또 펼쳐 달라고 간구하십니다.
이처럼 새로운 기적을 사모하는 자들은 간구만 하고 가만히 있을까요? 5, 6절 말씀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시인은 큰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씨를 뿌리면 또 다시 놀라운 역사가 펼쳐질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런 경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한편 이 놀라운 이야기의 새로운 주인공이 되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닌줄을 시인은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눈물을 흘리며”,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일들을 생각하면서 그 날의 아픔을 참는다는 것이 어쩌면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삶이 아닐까요? 아니 아름다운 일을 생각하면서 그 날의 아픔을 참을 때 겨자씨는 뿌려지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매일 매일 우리가 뿌린 겨자씨로 인해서 하루가 평가되는 것이 아닐까요?
사실 겨자씨는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름다운 일을 꿈꾸면서 매일의 아픔을 견디는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겨자씨가 아닐까요?
교우 여러분,
지난 반 년 동안 아름다운 이야기를 생각하며 감사하며 지냈습니까? 아울러 놀라운 일들을 기대하며 보내셨습니까? 계속 그리하십시다. 계속 꿈꾸십시다. 전에 우리에게 일어난 일보다 더 놀라운 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편 여기에 한 가지를 더 하십시다. 그 날 그 날의 아픔을 견디십시다. 그 날 그 날 주어진 아픔에 성실히 임하십시다. 그 때 보이지 않는 겨자씨는 뿌려집니다. 뿌려진 겨자씨는 언젠가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깃들이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오늘은 신년 주일에 소개해드렸던 이야기를 다시 들려 드리겠습니다.
아버지가 6. 25 전쟁에서 한쪽 눈을 잃고 팔다리를 다친, 장애 2급 국가 유공자였던 자녀가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그에게 반갑지 않은 이름이었습니다. ‘병신의 아들’이라 놀리는 친구들 때문이었습니다. 가난은 그림자처럼 그를 둘러쌌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고 싶을 때마다, 술의 힘을 빌려 말했습니다.
“아들아, 미안하다.”
후에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중학교 때 축농증을 심하게 앓은 적이 있습니다. 치료를 받으려고 병원을 찾았는데 국가 유공자 의료복지카드를 내밀자 간호사들의 반응이 싸늘했습니다. 다른 병원에 가보라는 말을 들었고 몇몇 병원을 돌았지만, 문전박대를 당했습니다. 이런 일들을 겪으며 이 사회가 장애인과 그 가족들에게 얼마나 냉랭하고 비정한 곳인지 잘 알게 됐던 것 같습니다.”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자신을 받아 줄 다른 병원을 찾던 중 그는 자기 삶을 바꿀 의사를 만나게 됩니다. 어린 학생이 내민 의료복지카드를 보고는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가 자랑스럽겠구나.”
의사는 진료비도 받지 않고 정성껏 치료하곤, 마음을 담아 이렇게 격려했습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꼭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
그 한마디가 어린 학생의 삶을 결정합니다.
‘의사가 되어 가난한 사람을 돕자,
아픈 사람을 위해 봉사하며 살자’
그의 삶의 원칙도 그 때 탄생됩니다.
“환자는 돈 낸 만큼이 아니라, 아픈 만큼 치료받아야 한다.”
아주 의과대학교 이국종 교수입니다.
이국종 교수도 훌륭합니다. 그러나 더 훌륭한 사람은 어린 이국종이 내민 의료복지카드를 보며,
“아버지가 자랑스럽겠구나” 라고 말한 의사입니다. 그 의사는 하찮은 어린 아이 안에 피어질 놀라운 세계를 보았습니다. 아마 당신의 삶 속에 놀라운 경험을 했던 분임에 틀림 없습니다. 그는 이국종이라는 학생 안에 피어질 놀라운 세계를 상상하며 겨자씨를 뿌린 것입니다. 결국 아름다운 나무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올해도 두 단기 선교단이 잘 마치고 돌아 왔습니다. 준비하는 과정에 그리고 일하는 동안 보이지 않은 겨자씨를 뿌리셨을줄 압니다. 공동체적인 아픔도 있었을줄 압니다. 선교단원 각자만 아는 겨자씨도 뿌리셨을줄 압니다. 그러나 과거의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생각하면서 끝까지 기쁨으로 씨를 뿌렸으리라 확신합니다. 언젠가 나무가 되어 많은 새들이 와서 깃들일 것입니다.
새로운 이국종 교수가 뉴 멕시코에서 과테말라에서 탄생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들의 매일의 삶의 평가는 무엇을 거두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무엇을 심느냐에 있습니다. 겨자씨를 매일 매일 심으십시다. 놀라운 기대를 안고…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