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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세상” 열왕기하 4:42-44 (09/16/2018)

 

벨 여사는 매우 부유했습니다. 매우 크고 아름다운 정원을 가지고 있었는데 많은 사람이 이 정원을 찾아와 휴식을 취했습니다. 젊은이들은 푸른 풀밭에 앉아 햇볕을 쬐었고 아이들은 꽃밭에서 나비를 쫓았으며 노인들은 정원의 작은 연못가에 앉아 낚싯대를 드리웠습니다. 심지어 텐트까지 챙겨 와서 여름밤의 정취를 즐기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벨 여사는 사람들이 자신의 정원에서 노닥이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이런저런 방법을 궁리한 끝에 마침내 좋은 수를 떠올렸습니다. 다음과 같이 적힌 팻말을 정원 앞에 내걸도록 했습니다.

‘정원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여러분의 안전을 위해 한 가지 알려드립니다. 얼마 전부터 꽃 덤불 근처에서 종종 독사가 발견되고 있습니다. 만약 물리게 될 경우, 30분 안에 응급처치를 하지 않으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아주 위험한 독사입니다. 참고로,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병원은 차로 50분 거리에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효과는 금방 나타났습니다. 정중하면서도 무시무시한 내용이 담긴 팻말을 본 사람들이 정원에 발길을 뚝 끊은 것입니다.

한동안 벨 여사는 인적이 사라진 정원을 내려다보며 매우 만족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더 이상 찾아오지 않자, 정원에는 조금씩 잡초 덤불이 우거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습니다. 정원은 어느새 원래의 화사한 모습을 잃고 완전한 숲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벨 여사가 허풍으로 했던 말도 사실이 되었습니다. 숲으로 변한 정원에 독사가 기어다니기 시작한 것입니다. 벨 여사는 홀로 고독하고 외롭게 정원을 지켰습니다. 과거에 그곳을 가득 메웠던 수많은 사람들을 조용히 추억하면서….

 

두 주 전부터 수요 여성 공부가 시작되었습니다. 방학을 마친 첫 시간에 매번 하듯이 원하는 찬송을 함께 부르자고 했습니다. 매주 두 곡씩 부르는데 먼저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을 어느 교우분이 부르자고 했습니다. 그 분의 십팔번이기도 하는데 요즘 자주 불렀더니 수요 여성 공부의 십팔번이 된 찬송입니다.

그 찬송을 마친 후 또 어느 찬송을 원하시냐고 물었더니 어느 교우 분이 바로 다음 장을 부르자고 했습니다. 찬송은 주로 비슷한 내용끼리 묶어 놓았으니 비슷한 내용의 찬송이려니 생각하면서 보았는데 바로 “괴로운 인생길 가는 몸이 평안히 쉴 곳이 아주 없네” 찬송이었습니다. 모두 함께 불렀습니다.

다 부르고 나서 다른 교우분들이 우리가 장례식에 왔냐고 왜 장례예배에서 부르는 찬송을 부르자고 했냐고 농담 섞인 말로 핀잔을 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분들의 표정에서는 공감하듯 보였습니다. 두 찬송은 언제나 함께 가야 하고 어떻게 보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오늘 임직예배 설교 준비를 하는데 다시금 두 찬송이 떠 올랐습니다. 그러면서 저의 마음에 온 확신은 괴로운 인생 길을 아름답게 만들어 가는 삶이 바로 제직들의 삶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떻게…? 오늘 분문 말씀을 통해 살펴 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배경은 38절 상반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엘리사가 다시 길갈에 이르니 그 땅에 흉년이 들었는데….” 가뭄으로 고생하는 땅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42절 말씀입니다.

“한 사람이 바알 살리사에서부터 와서 처음 만든 떡 곧 보리떡 이십 개와 또 자루에 담은 채소를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린지라….”

가뭄 중에 한 사람이 바알 살리사에서부터 와서 처음 만든 떡 보리떡 이십개와 자루에 담은 채소를 하나님의 사람 곧 엘리사에게 드렸습니다. 그냥 떡이 아니라 처음 만든 떡인 것을 봐서 이 사람은 혼자서 정성껏 준비해서 엘리사에게 드린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떤 마음으로 무엇을 원해서 드렸는지는 알수 없습니다. 우리가 알수 있는 것은 흉년에 많은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고생하는 때 이 사람은 그 귀한 것을 자기가 먹지 않고 엘리사에게 드린 것입니다. 그것도 처음 만든 것을…. 이를 엘리사가 받고 어떻게 하죠?

“그가 이르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이를 듣고 당연히 그 사람은 놀랐을 것입니다. 멀리서 엘리사를 위해 처음 만든 떡을 가져 왔는데 엘리사는 무리에게 먹게 하라고 합니다. 더 놀란 사람이 있습니다. 43절 말씀입니다.

“그 사환이 이르되 내가 어찌 이것을 백 명에게 주겠나이까 하나….”

사환이 자기 머리로 계산해도 도저히 계산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 곳에 백 명이 있었는데 두 세 사람만이 겨우…. 아마도 그 사람은 엘리사의 하루 식량으로 가져 왔을지도 모릅니다. 사환의 말을 무시한채 엘리사는 말합니다. 43절 후반절 말씀입니다.

“엘리사는 또 이르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이 먹고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엘리사가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고 사환에게 말씀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아마 그 사람이 이 귀한 양식을 엘리사에게 가져 왔을 때 이미 하나님께서는 엘리사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먹고 남으리라.”

결과가 어떻게 되었죠? 44절 말씀입니다.

“그가 그들 앞에 주었더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대로 먹고 남았더라.”

흉년 중에 풍년을 대풍년을 맞이하였습니다.

 

흉년 중에 대 풍년을 맞이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괴로운 삶의 터전에서 놀라운 아름다운 세계를 보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몇 가지로 생각할수 있겠습니다만, 저는 이 곡식의 흉년을 이길수 있었던 것은 바로 관계의 풍년이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멀리서 한 사람이 흉년 가운데서 엘리사를 존경해서 음식을 만들어 찾아 왔습니다. 이렇게 찾아 올수 있었던 것은 관계의 풍년에서 온 결과라고 봅니다. 흉년 가운데서 자기가 먹을 것을 생각하지 않고 엘리사에게 가져 온 것은 두 분의 상상을 초월한 관계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제 엘리사는 사환에게 명령합니다.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엘리사가 명령한 것이긴 하지만 하나님께서 아무에게나 이런 명령을 하시겠습니까? 엘리사의 가슴에 있는 흉년 가운데 고생하는 무리를 보고 안타까워 하는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 엘리사의 무리를 향한 풍성한 사랑의 마음을 보신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이 아닐까요?

그뿐 아닙니다. 만일 사환이 엘리사의 명령을 무시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처음에는 미덥지 않았지만 사환은 엘리사의 명령에 순종합니다. 엘리사를 존경하기 때문에…. 사환과 엘리사의 관계도 풍성한 관계였습니다.

결국 보리떡 20개와 채소가 풍성한 관계를 만났을 때 100명의 사람들이 먹고 남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을 함께 누리게 된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일을 약 천년이 지난 후 주님께서 이어 받으시죠. 잘 아시는 한 어린 아이가 바친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로 장정만 5000 명이 먹고 12광주리에 가득차게 남습니다. 그런데 두 주 전에 드린 말씀드린대로 주님은 혼자서 이 놀라운 일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세 사람의 풍성한 관계 가운데 이루어졌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우선 빌립과 안드레의 깊은 우정이 있었습니다. 이들의 우정을 보면서 감동한 한 아이의 헌신이 뒤따랐습니다. 이 세 사람들의 관계의 풍년을 보시고 주님께서는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정말로 온 세상은 괴로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도 아름다워질수 있습니다.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 우리들 손에 많은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만 있어도 족합니다. 정말로 필요한 것은 관계의 풍년입니다.

 

처음 소개해 드린 벨 여사는 모든 것이 풍족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관계의 흉년을 자초했습니다. 그랬더니 모든 것을 잃게 된 것입니다.

반면 아무리 작은 보리떡 일지라도 관계의 풍년 가운데 있는 사람을 만나면 흉년을 풍년으로 뒤바꿀수 가 있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 주보에는 숫자가 늘 나옵니다. 출석수 헌금액…. 그러나 거기 나오지 않는 숫자가 있습니다. 관계의 숫자입니다. 관계의 흉년이 들었는지 풍년이 들었는지….

 

저의 대학 친구가 자기가 쓴 수필을 종종 보내 오는데 다음과 같은 글을 썼습니다. 제목은 ‘던바의 수.’

 

“영국 옥스포드대학의 로빈 던바 교수는 세계적인 진화심리학자이다. 그는 한 개인이 사회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최대치가 150명이라는 사실을 밝혀내었고, 학계에서는 ‘던바의 수數’라고 부른다. 원시시대 수렵 채집 사회 집단의 평균 규모가 150명 정도였고, 예전 개인 전화번호 수첩에 적은 지인의 숫자가 얼추 150 정도였 단다. 지금도 회사에서 150명 단위의 작업반이 가장 효율적이라는 주장이다.”

던바의 숫자가 몇명이라구요? 150명. 사실 저희 교회는 매주 출석이 400-500명이 되는데 매주 출석하지 못하시는 분들까지 생각하면 600명은 족히 되리라고 생각됩니다.

150명 안에는 가족도 학교 직장 친구도 포함되어야 하니 여러 교우님들께 교인들 600명중 150명과 깊은 관계를 가질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50명까지는 깊은 관계를 가질수 있지 않을까요? 아니 숫자에 매일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분의 형편에서 관계의 풍년의 주인공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여튼 50명으로 가정한다면, 50명 안에 상록회 어르신들과도 청년들과도 중고등부 학생들과도 주일학교 자녀들도 모두 포함시키시기 바랍니다. 3세대가 어우러지는 관계의 풍년의 주인공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 때 엘리사의 기적이 나타나지 않을까요?

 

지난번 BNI공개강좌에 오신 김현철 목사님께서 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준비된 자를 부르시지 않는다. 부르신 자를 준비시킨다.”

 

오늘 제직 임직을 받으시는 교우분들을 부르신 이유가 있습니다. 이미 관계의 풍년이 되었기에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을 관계의 풍년의 주인공이 되도록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관계의 풍년의 주인공이 될수 있을까요? 주님은 관계의 풍년의 주인공들을 좋아하십니다. 엘리사가 그랬고 빌립과 안드레와 한 아이가 그랬습니다. 이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몇 번 소개해 드렸던 건축 설계회사 하형록 회장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 사람 주변에는 늘 사람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보고 싶어요,” “존경해요,” “당신이 맞는 것 같아요,” “용서해 주세요”, “저를 믿어 주세요,” “제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이해합니다”, “한번 해 보세요”, “사랑합니다,” “고마워요.”

 

주님은 이런 말을 잘 사용하는 사람들을 좋아하십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바로 관계의 풍년의 주인공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하나님과 관계의 풍년의 삶을 사셨습니다. 주님은 한 사람 한 사람과 관계의 풍년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보혈을 마음껏 십자가상에서 흘리신 것입니다.

이제는 당신께서 흘리신 보혈이 헛되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 관계의 흉년 가운데 있는 자들을 불러서 관계의 풍년의 사람들이 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많은 사람들이 괴로운 세상이라고 생각하는 이 세상을 아름다운 세상으로 바꾸십니다.

 

신임제직 여러분,

이 귀한 일에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관계의 풍년의 주인공으로….

 

함께 임직 받으시는분들끼리 늘 좋은 관계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아니 그것을 넘어 교우50명과 관계의 풍년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다음과 같은 말로….

“보고 싶어요,” “존경해요,” “당신이 맞는 것 같아요,” “용서해 주세요”, “저를 믿어 주세요,” “제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이해합니다”, “한번 해 보세요”, “사랑합니다,” “고마워요.”

 

여러분으로 인해서 어떤 흉년 가운데서도 풍년의 노래가 울려 퍼지게 되길 바랍니다.

“먹고 남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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