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어서 미국에 와서 평생을 사신 분이 다음과 같은 글을 쓰셨습니다. 제목은 ‘미국에 오지 않았더라면.’ 몇 문단만 소개해 드립니다.
“돌아갈 수 없는 50년 전을 돌아본다. 나는 그때 20대였었지. 아 그리운 시절이여! 너무나 멀리 떠나와 버렸군.
…
지나온 50년을 뒤돌아보면 번개같이 지나가 버린 세월, 이 나라에서의 세월을 후회하지 않지만, 한국에서 살지 못한 그동안의 세월이 아쉽고, 도둑맞은 것 같다. 그동안 물질적인 면에서는 별 부족함이 없이 살아왔지만, 생각해 보면 잃어버린 것도 많이 있었다. 우선 7080음악 이야기를 한다면, 그 노래들은 모두 생소한 것들뿐이다. 한국에 살지 않았으니 알 수가 없다. 그 당시의 노래뿐만 아니라 그곳 생활을 몽땅 빼먹은 셈이다.
…
그런가 하면 함께 살아온 많은 친구와 정을 끊고 온 셈이니, 돌이켜 보면 그 또한 엄청난 것을 잃고 살아온 셈이다. 이제는 한국 국적에서 미국 국적으로 영원히 바뀌었다. 생각하면 엄청난 변화가 생겼다. 나의 후손은 이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동안 언어의 장벽, 이곳 문화와의 갈등 없이 내 고향의 자연스러운 환경에서 살아왔다면 지금쯤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해 본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염치 없는 일이지만, 아쉬워서 한 번 생각해 보는 것이다.”
70 넘으신 분이 지나간 청년 시절을 생각하면서 쓴 글입니다. 그는 지난 50년이 번개같이 지나가 버렸다고 말하면서 후회 아닌 후회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 마디로 미국에서의 50년의 나그네 생활을 후회하고 있습니다.
이 글을 읽고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분이 만일 한국에 계셨더라면, 후회를 안 하셨을까?’ 사실 이 분은 의사신데, 아마 이 분이 한국에 계셨더라면 지금쯤 ‘미국에 갔었더라면’이라는 글을 쓰시지 않으셨을까요?
어디에 살았느냐가 진정한 후회거리가 될수 없다고 봅니다. 그러면 이런 결론을 내려 봅니다. 후회거리는 어떻게 살았느냐가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청년회 헌신 예배로 드리는데 사랑하는 청년들 미국에 잘 오셨습니다. 어디에 사느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사느냐 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저자 사도 베드로도 어디에 사느냐를 중요시 여기지 않고 있습니다. 어떻게 사느냐를 중요시 여깁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아니지만 1:1절 말씀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라고 기록된 것을 봐서 소아시아 지방에 사는 크리스챤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데 이들을 ‘흩어진 나그네’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만일 베드로가 평생을 산 후에 어디에서 사는 것이 어떻게 사는 것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다면 당연히 빨리 소아시아를 떠나 유대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전혀 그렇게는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도리어 나그네들로서 베드로 전후서를 통해서 ‘어떻게 살아라’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보스톤에서 청년 시절을 보내는 여러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함께 나눠 보고자 합니다. 1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1절 말씀은 우리들에게 어디가 중요하지 않음을 은연중 강조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이든 미국이든 똑 같이 악독과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하는 말이 가득차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한국 신문이나 미국 신문이나 하나는 한글이고 하나는 영어일뿐이지 근본적 내용은 다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마찬 가지로 베드로의 편지를 받는 소아시아 사람들도 이런 세상에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 살지만 이들과 같이 행하지 말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2절 말씀입니다.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여기까지 보면 두 모습이 비교됩니다. 하나는 악독과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가지고 온 힘을 다 해 살아 가는 모습이 보입니다. 세상의 모습입니다. 한 마디로 머리 굴리며 사는 삶의 모습입니다. 곧 하나님 보다 IQ가 더 높다고 생각하기에 머리를 굴리게 되고 머리를 굴리다 보면 악독과 기만과 외식과 시기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또 하나의 모습은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온 힘을 다해서 사모하는 모습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삶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IQ가 훨씬 높음을 인정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품 안에서 매일 매일 재밌게 기쁘게 최고로 좋은 것을 바라며 살아 갑니다. 이러한 삶을 살도록 사도베드로는 권면합니다. 3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여러분은 주의 인자하심을 맛 보았습니까? 그러면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능력의 주님을 의지하여야 합니다.
오늘 청년부 헌신 예배를 드리는 이유는 세상을 닮지 말고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 아름다운 청년들이 되기 위함입니다.
사실 머리 굴리는 삶이나 어린 아이의 마음을 갖는 삶이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아도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여러번 이랬다 저랬다 할수 있습니다. 주의 인자하심을 맛 본 사람은 한결같이 1년 365일 24/7 어린아이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그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요? 우리 청년들은 어떤 사람들이 될까요?
결론적으로 먼저 말씀드리면 ‘산 돌’이 되어 갑니다. 아울러 제사장이 되어 갑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드리면 산 돌이 되어서 신령한 집을 이루게 되고 아울러 그 안에서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이 되어 갑니다. 우리가 어린 아이의 믿음을 가진다면…. 먼저 4절 말씀입니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베드로는 아주 특이한 표현을 합니다. ‘산 돌’, 영어로는 living stone. 베드로는 주님을 산 돌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왜 산 돌이라고 표현했을까요?
사실 주님께서는 당신 스스로를 living water, 생수로 표현하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주님을 산 돌, living stone으로 표현합니다. 생수라는 의미는, 마시면 살게 된다 해서 생수입니다. 그러면 living stone은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이 돌을 만지면 산다’라는 뜻일줄 압니다. 곧 예수님은 사람들에게는 버린 바 되었지만 이제 산 돌이 되셨습니다. 누구나 이 돌을 버리지 않고 만지면 살게 됩니다.
하바드 대학교가 이 곳에서는 관광명소 중에 하나인데 많은 관광객들이 꼭 가보는데는 하바드 도서관이 아니라 창설자 하바드 목사님 동상입니다. 다 들 보셨겠지만, 하바드 목사님 신발이 닳아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두 그 신발을 와서 만지고 가기 때문입니다. 이유는…? 자녀를 위해서…?
하바드 목사님의 동상을 만졌다고 해서 정말 기적이 일어났습니까? 그러나 베드로는 주님이라는 ‘산 돌’을 만졌을 때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는 확신에 가득차 있습니다. 5절 말씀합니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말씀드린대로 ‘산 돌’을 만진 사람들에게 생기는 두 가지 기적이 있습니다. 먼저 ‘산 돌’을 만지는 사람들이 ‘산 돌’이 되어 갑니다.
한편 산 돌과 산 돌이 함께 만나면 어떻게 될까요? 그야말로 산 돌들이기 때문에 함께 연결이 되어서 아주 든든한 신령한 집이 세워집니다. 이것이 첫번째 기적입니다.
지난번 올랜도에 회의차 갔었는데 어느 교우님댁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플로리다이니 당연히 태풍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태풍이 오면 창문을 베니야판으로 막는다고 하면서 그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바람이 창문을 부수고 들어 온 후에는 더 이상 나갈 때가 없으면 제일 약한 지붕을 치고 나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태풍을 준비 안 하면 지붕이 다 손상을 입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산 돌로 만들어진 신령한 집은 어떨까요? 너무나 든든히 서로를 붙들고 있어서 왔던 바람이 다시 들어 온데로 도망 나가지 않을까요? 이처럼 우리는 기적의 집이 되어 갑니다.
언제 이렇게 된다구요?
“갓난 아이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어린아이들의 깊음을 가질 때, 우리는 기적의 집이 됩니다. 산 돌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집에 들어 오고 싶어 합니다. 이 집에 들어와 쉬고 싶어 합니다.
우리 청년들이 산 돌이 되어서 든든한 신령한 집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집만 아무리 잘 지어 놓아도 무엇합니까? 비어 두면 어떻게 되죠? 누가 그 안에서 일을 해야죠? 5절 말씀 다시 봉독해 드립니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두번째 기적은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 이들 곧 산 돌을 만지는 이들은 바로 신령한 집에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되어 갑니다. 곧 산 돌을 만져서 산 돌이 되는 사람들은 1인2역을 하게 됩니다. 한편으로는 신령한 집이 되어 갑니다. 또 한편으로는 그 신령한 집에서 일하는 제사장이 되어 갑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하바드 동상을 만진다고 하바드 학생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산 돌이신 주님을 만질 때 우리는 신령한 집이 되어 갑니다. 아울러 그 안에서 일하는 제사장이 되어 갑니다. 우리로 인하여 온 세상이 복을 받습니다. 신령한 집에서 뿜어나오는 제사장들의 축복 때문에…. 제사장들의 말과 움직임은 바로 온 세상의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생각할지 모릅니다. “나는 산 돌도 아니고 그래서 신령한 집을 이룬 적도 없고 제사장과는 물론 거리가 멉니다.”
예수를 영접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나도 모르게 산 돌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신령한 집이 되어 가고 있고 또한 그 안의 제사장이 된 것입니다.
청년 교우 여러분,
여러분이 공부하는 곳에서 일하는 곳에서 여러분은 그 곳에 있는 신령한 집입니다. 아울러 여러분은 그 신령한 집에 거하는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의 가장 큰 임무는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쉬운 표현을 하면 마음의 소원을 하나님께 올리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마음속으로 “이런 세상이 속히 왔으면 좋겠다” 생각합니다. “이 세상은 이런 인물이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면 이미 제사장이 된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마음의 소원은 아주 큰 능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사장의 마음의 소원이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밝은 세상 좋은 세상을 원하고 바라지 않습니까? 이미 제사장은 되신 것입니다. 이 세상 역사의 중심에는 제사장들의 기도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의 소원대로 이 세상 역사는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제사장들이기 때문입니다.
산 돌들인 제사장들의 기도의 행진을 다음 글에서 느낄수 있습니다.
“교회학교 교사인 Edward Kimball은 1858년에 보스턴의 한 구두 판매원을 주님께로 인도했다. 그 구두 판매원은 드와이트 무디였다. 무디는 전도사가 되어 1879년 영국에 있는 한 작은 교회의 목사였던 Frederick Meyer의 복음을 향한 열정을 일깨웠다. 마이어는 미국 대학 캠퍼스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Wilbur Chapman이라는 학생을 주님깨로 인도했다.
YMCA에서 일하던 채프먼은 전직 야구 선수였던 빌리 선데이를 전도하는 일에 고용했다. 선데이는 샬롯크리스천 스쿨에서 부흥회를 인도앴다. 지역의 젊은이들이 큰 은혜를 받았고 Mordecai Hamm을 초청해 복음을 전하는 또 다른 캠페인을 열고자 계획했다. 이 부흥회에서 빌리 그레이엄이라는 청년이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께 자신의 삶을 바쳤다.”
이들은 모두 이웃을 위한 신령한 집이자 제사장들이었습니다. 그야 말로 산 돌들이었습니다. 한편 여기 나온 ‘산 돌’들의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뭘까요? 모두 다 청년들입니다. 세계 복음 역사의 불꽃을 일으킨 사람들은 모두 청년들입니다. 청년 시절에 ‘산 돌’이신 주님을 만나 ‘산 돌’들이 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청년의 때에 어디에 사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산 돌’이신 주님을 늘 만나며 사시기 바랍니다.
‘산 돌’은 차가워 보이지만 따뜻합니다. 왜냐하면 신령한 집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친구들이 여러분을 만나 놀라게 하십시요. 차가워 보이지만 내면에 있는 따뜻함을 느끼게 하십시요. 그러기 위해서는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늘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신령한 집이자 이웃을 위한 제사장들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Alice Walker가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We are the ones we have been waiting for.”
“우리는 바로 우리가 기다리던 사람이 되어 간다.”
정의로운 세상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어느새 정의의 사람이 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평화로운 세상을 사모하는 자들은 어느새 평화의 사람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의 구원을 바라는 자들은 어느새 복음의 사람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기적의 사람들이 아닐까요?
청년 교우 여러분,
언제 어디서나 신령한 젖을 사모하십시요. 산 돌이 되십시요. 신령한 집을 이루어 가십시요. 세상을 향한 마음의 소원을 가지십시요. 여러분은 거룩한 제사장들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