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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잠히 사랑하시며” 스바냐 3:14-20 (11/18/2018)

매일 걸어서 등교하는 한 학생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날씨가 험하고 먹구름이 몰려들었지만, 소녀는 늘 그러하듯 걸어서 학교에 갔습니다. 오후가 되자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궂은 날씨가 시작되었습니다. 소녀의 어머니는 집에 걸어올 딸이 험한 날씨 때문에 겁을 먹을까 봐 걱정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윽고 칼날처럼 하늘을 찢는 듯 천둥과 번개가 몰아쳤습니다. 걱정으로 가득 찬 어머니는 차를 몰아 딸의 학교로 향했습니다. 그러다가 길을 따라 걸어오는 딸아이를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매번 번개가 내리치는 순간마다 딸아이는 발걸음을 멈추고 번쩍이는 번갯불을 향해 미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차창을 내리고 딸아이를 불러 세웠습니다.

“빨리 오지 않고 뭐 하니? 왜 번개가 칠 때마다 자꾸 멈춰 서는 거야?”

딸이 순진하게 답합니다.

“엄마, 전 예쁘게 미소 짓는 중이에요. 하나님이 제 사진을 계속 찍으시잖아요.”

 

저는 특별히 다른 운동은 하는 것은 없고 시간이 될 때마다 산책을 자주 합니다. 특히 비오는 날 산책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제가 비올 때 산책하러 나가려 하면 집사람이 항상 일기예보를 봅니다. 혹시 천둥번개가 치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으로…. 천둥번개가 칠 확률이 적어 보이면, 플라스틱 우산을 쓰면 된다고 하면서 천둥번개가 치면 곧 들어 오겠다고 약속하고 산책을 나갑니다.

만일 제가 천둥번개가 치는 날 하늘을 향해 미소를 지으면서 환하게 웃으면서 걸어다니면 저희 집사람이 저를 보고 뭐라고 그럴까요? 미쳤다고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을 기록한 스바냐는 천둥번개가 칠 때 그 소녀처럼 환히 웃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스바냐는 상식적으로는 말도 안 되는 예언자입니다.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라는 것입니다. 14절 말씀입니다.

“시온의 딸아 노래할지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지어다. 예루살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이 말씀만 보면 전혀 상식에 벗어나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나 스바냐가 어느 때의 예언자인지를 알면 좀 생각이 달라집니다.

사실 스바냐는 남왕국 유다가 멸망하기 전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을 예언하는 예언자입니다. 그는 특히 스바냐서 전체를 통해서 여호와의 날 곧 진노의 날이 임할 것을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주석가는 스바냐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구약에 이 책보다 무섭게 활활 타는 책은 없습니다. 이슬이나 풀, 나무와 같은 것은 찾아 볼수 없습니다. 모든 곳에 불, 연기, 어두움, 날라다니는 겨, 외딴 곳에 흩어진 파괴물들만이 보입니다.”

사실 오늘 본문 말씀만 제외하고는 스바냐 전체는 거의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스바냐의 이 진노의 말씀을 읽으면서 이스라엘 민족은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요? 당연히 앞으로 올 무서운 진노의 날을 생각했을줄 압니다. 그런데 그중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을줄 압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자체가 매일 매일 하나님의 진노를 늘 느끼고 있는데 여호와의 날은 과연 어떤 날일까?”

 

제가 한국에서 대학생 시절에는 월남전이 한참 진행이 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대학교 선배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늘 기억납니다. 어느 미군 헬멧에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나는 죽어도 지옥에 안 간다. 여기가 이미 지옥이니까.”

곧 스바냐는 우리가 사는 곳이 지옥과 같은 곳인데, 언제가는 우리가 사는 이 지옥과는 비교도 안 되는 더 지옥과 같은 날 곧 여호와의 날이 임할 것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 지옥과 같은 세상에서 어떤 사람들이 살아 남을까요? 소개한 미군처럼 “나는 죽어도 지옥에 안 간다. 여기가 지옥이니까”라고 생각하면서 사는 자들일까요?

 

저는 사실 그 해답의 실마리를 스바냐의 이름에서 찾고 싶습니다. ‘스바냐’의 뜻은 ‘God hides’. ‘하나님은 숨으신다’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지옥으로 향하도록 그냥 놓아 두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숨어 계십니다. 16, 17절 말씀을 통해 보면 알수 있습니다.

“그 날에 사람이 예루살렘에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저는 특별히 숨어 계신 하나님의 모습을 이 표현에서 찾아 보았습니다.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이것이 바로 스바냐 ‘숨으신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많은 어려움 가운데 쳐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더 큰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예언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나 스바냐는 위로합니다. 잠잠히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숨어 계심을 역설합니다.

사실 이 숨으신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십자가를 통해 밝히 드러납니다. 십자가를 믿는 사람들은 곧 숨으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숨으셔서 하나님은 당신의 영원한 사랑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한편 숨어 계신 하나님의 사랑은 언젠가 놀랍게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19, 20절 말씀입니다.

“그 때에 내가 너를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벌하고 저는 자를 구원하며 쫓겨난 자를 모으며 온 세상에서 수욕 받는 자에게 칭찬과 명성을 얻게 하리라. 내가 그 때에 너희를 이끌고 그 때에 너희를 모을지라 내가 너희 목전에서 너희의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에 너희에게 천하 만민 가운데서 명성과 칭찬을 얻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주님 안에서 수욕을 받던 자들과 포로된 자들이 언젠가 명성과 칭찬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숨으신 하나님의 사랑이 아닐까요?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언젠가 명성과 칭찬이 따라 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들을 통해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아름다운 빛을 온 세상에 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믿는 자들은 어떻게 행해야 할까요? 다시 14절 말씀으로 돌아갑니다.

“시온의 딸아 노래할지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지어다. 예루살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어려운 세상 가운데서 숨어서 우리를 잠잠히 사랑하시고 계시는 하나님을 믿고 미리 춤추고 노래하는 삶을 사는 자들이 하나님의 진노의 세상에서 살아남을뿐 아니라 바로 명성과 칭찬을 얻게 되지 않을까요? 세상 사람들이 전혀 보지 못했던 빛의 사람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어느 분으로부터 본인이 쓰신 묵상 수필집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다음과 같은 글이 눈에 띄었습니다.

“어느 봄에 정원 청소를 하는 사람을 고용하고 선불을 했는데 내가 없는 사이에 일을 시작하다 말고 도망을 가버린 작은 사기부터 직원이 놀면서 먹고 살겠다고 가게를 상대로 부당한 고소를 하여 우리를 곤경에 빠뜨린 대단한 일까지 겪으면서 산다.

그러나 그런 어려움이 자주 반복된다면 “주님, 도대체 저에게 왜 그러세요?”를 외치며 하나님의 백성을 악인의 꾀에 빠뜨린 이해할 수 없는 사실에 울화가 치밀어 올랐을 것이다.

정말이지 이제 고난을 겪는 것이 너무나 싫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삭의 온유한 믿음과 이사야서의 말씀으로 고난 앞에서 나의 태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이 아침에 다시 생각해 보게 하신다.”

 

이 분의 모습에서 처음 소개해드린 소녀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천둥번개를 보면서 환히 미소를 짓는…. 반복되는 고난의 연속 가운데서도 웃고 계시는…. 아무나 천둥번개를 보고 웃을수 있을까요? 천둥번개 가운데서 숨어서 잠잠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알기에 웃을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런 분들로 인해서 하나님은 즐거워 하십니다. 아울러 하나님을 즐겁게 한 이런 분들이 밝은 빛을 발하며 바로 명성과 칭찬을 얻게 되지 않을까요?

 

제가 한 두번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제가 설교를 위한 독서 말고 항상 읽는 책이 두 가지가 있다고 말씀드렸었습니다. 하나는 이민신학에 관련된 책이고 또 하나는 아시아 기독교 역사책입니다.

아시아 기독교 역사책은 두 권으로 되어 있어서 두 권 합하면 거의 1,500 페이지가 됩니다. 매일 조금씩 읽기에 아직 얼마 남아 있습니다. 매번 한 페이지 내지 두 페이지 어떤 때는 반 페이지밖에 읽지 못하지만 아무리 적게 읽어도 늘 공통적인 것이 있습니다. 짧은 페이지 안에 기록된 이야기지만 거의 매번 고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까 소개해 드린 분은, “정말이지 이제 고난을 겪는 것이 너무나 싫다.” 고백하셨는데, 실제로 요즘은 이런 생각이 듭니다. 제가 아시아 기독교 역사책을 짓는다면 그럴리는 없지만, 그 제목이 생각이 났습니다.

“고난은 지겹다.”

한 마디로 기독교 역사는 고난의 역사입니다. 지겨운 고난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기독교 역사를 지겹게 만드신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칭찬과 명성입니다. 물론 숨으신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칭찬과 명성입니다. 고난의 이야기 가운데서 웃음을 버리지 않는 사람들에게 칭찬과 명성이 주어집니다. 이들을 통해 신비한 빛을 발하게 하십니다. 왜? 이들은 하나님을 기쁘고 즐겁게 하셨기 때문에….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이자 창립 65주년 기념예배로 드립니다. ‘감사’하면 늘 생각나는 말씀이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 말씀이 바로 사도바울을 통해 스바냐의 하나님 숨어 계신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닐까요? 이를 행하는 자들에게 칭찬과 명성이 따라 올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감사한 것은 저희 교회 65년의 역사 가운데 이런 분들을 많이 주셨습니다. 말씀드린대로 교회사는 지겨운 고난의 역사입니다. 저희 교회도 교회이니 예외가 될수 없습니다.

사실 몇 년 전에 저희 교회 60년사를 편찬했습니다. 지난주 당회시 60년사 책에 대해서 이야기가 나왔는데 어느 장로님이 “얼마전에 좀 읽어 봤는데 재밌던데요.” 말씀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어떤 의미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재미 있을수 밖에 없습니다. 지겨운 고난의 이야기 속에 잠잠히 교회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으니 말입니다. 아니 잠잠히 교회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맞다고 봅니다. 신비한 빛의 사람들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계속되는 고난 속에서 춤추고 기뻐하고 축제를 벌이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 것이 우리 교회 60년사입니다. 만일 지겨운 고난 속에서 춤추고 기뻐하는 믿음의 이야기가 없었더라면 과연 지난 65년을 우리 교회가 버텨 올수 있었을까요?

 

두주전에는 올해 65주년 기념행사로 이웃초청 한국 문화 축제를 열었습니다. 4-5 백명의 주민들이 모여서 한국음식과 함께 한국 문화를 접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많은 주민들이 좋아하였고 언제 또 하냐고 문의하시는 분도 많았습니다.

그 분들은 아마 이렇게 생각하셨을지 모릅니다. “이 교회는 모든 면에서 잘 갖추었고 아무런 어려움도 없어서 이런 행사를 이렇게 잘 하는구나.”

고난을 기쁨으로 감당하시는 분들이 있기에 이런 축제도 가능한 것입니다. 부엌에서 뒷전에서 말 없이 수고하시는 분들이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선뜻 희사하시는 분들로 인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어려움 없이는 교회 달력은 넘어가지 않습니다. 인생의 달력처럼…. 그러나 고난이 오기 전에 미리 춤출 때 교회 달력은 가볍게 넘어가는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은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넘기십니다.

우리 각자의 인생의 달력도 매한 가지입니다. 한 달 한 달 춤추며 넘기십시다. 언젠가 명성과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65년간 잠잠히 우리 교회를 사랑해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추운 북극 하늘에서 펼쳐지는 장관이 있습니다. 저는 아직 직접 보진 못했습니다만, 오로라입니다. 나두섭씨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습니다.

 

오로라

나두섭

 

구름도 없는 한밤중에

어데선가 나타난 연초록 물체들

구름처럼 나타났다 바람처럼 사라지네

 

초롱초롱 비추는 별들은 아랑곳 않고

매섭게 내치는 찬바람인들 두려울가

잔잔한 하늘에 뿌려지는 빛줄기들

 

왔다가 없어지고 또다시 나타남은

못잊을 님을 찾아선가

 

어차피 못잊고 다시 올거면

나와 함께 거하는 것이 어떠하리

나 그대 벗되면 너의 초록빛 더 진해 지리라.

 

시인의 오로라를 잠잠히 사랑하는 모습이 담겨져 있음을 느낍니다. 추운 하늘을 아름다운 춤으로 수 놓는 오로라, 바로 하나님의 눈에 비친 우리들의 모습이 아닐까요? 우리가 추운 삶의 시간 안에서 기쁨으로 춤을 춘다면 말입니다.

잠잠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기뻐하십시다. 오로라가 되십시다. 따뜻한 곳에서는 오로라가 생기지 않습니다. 오로라와 같은 삶을 사는 자들에게 명성과 칭찬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세상을 비추는 오로라 교인들이 되십시다. 오로라 교회가 저절로 탄생될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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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Title Writer Date
355 “나는 세상의 빛이라” 요한복음 8:12-20, 9:35-41 (04/21/2024) webmaster 2024.04.22
354 “나는 생명의 떡이라” 요한복음 6:22-35 (04/14/2024) webmaster 2024.04.15
353 “마지막 아담: 살려 주는 영” 고린도전서 15:42-46 (03/31/2024) webmaster 2024.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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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1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요나서 4:5-11 (03/17/2024) webmaster 2024.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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