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 년 10월 14일 인디아나주 Hall이라는 어느 마을에 John이라는 아이가 농부의 아들로 태어납니다. 그 마을은 전기도 들어 오지 않는 시골 중에 시골이었습니다. 초등학교에 다니기 전까지 아침에 일찍 일어나 소젖을 짜며 농장 일을 도왔습니다.
이 아이가 어느덧 14살이 되어 중학교를 졸업합니다. 졸업한 후 아버지가 다음과 같은 삶의 규범을 가르쳐 줍니다.
- 자신에게 솔직해라
- 매일을 최고의 날로 여겨라
- 남을 도와라
- 좋은 책을 많이 읽어라. 특히 성경을….
- 깊은 우정을 쌓아라
- 어려운 날을 대비하라
- 매일 하나님의 인도를 간구하며 받은 축복을 감사하라.
중학교를 졸업할 때 아버지로부터 이런 훌륭한 삶의 규범을 배운 John은 후에 어떤 사람이 되어 갈까요? 한 마디로 놀라운 성공가도를 가게 됩니다. 잠시 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에는 성공가도를 아깝게 놓친 이야기를 소개해 드립니다. 증기선을 개발한 미국의 발명가 로버트 풀톤이 나폴레옹을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과 프랑스 관리들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는 프랑스가 영국 함대에게 패하는 결정적 이유가 됩니다.
1805년 전쟁에서 프랑스는 훈련 받은 군인 10만명 영국은 훈련 받지 못한 군인 3만명과 싸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영국을 이기려면 영국해협을 건너야 하는데, 바로 영국 해군에게 참패를 당합니다. 결국 영국을 점령하지 못합니다.
영국 해군에게 참패를 당한 이유는 증기선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영국 해협은 바람을 예측하기 어려운 곳이라서 바람을 사용하는 배로는 승산이 없는 곳입니다. 증기선이 필요한 곳입니다.
만일 나폴레옹이 오래 전 증기선을 개발한 미국의 발명가를 만났더라면 역사는 바뀌어졌을 거라고 합니다. 나폴레옹은 영국을 점령했을 것이고 그 당시 프랑스 황제에 저항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을 거라고 합니다. 만일 그랬더라면 지금까지도 프랑스의 왕이 존재하고 나폴레옹 역시 그 자리에 올랐을 거라고 합니다. 만일 나폴레옹이 풀톤을 만났더라면….
그런데 정말로 나폴레옹이 풀톤을 만났더라면 세상의 역사가 뒤바뀌어졌을까요? 증기선을 갖느냐 안 갖느냐가 세상 역사를 좌우하게 되었을까요? 세상 역사가 증기선 하나에 좌우한다면 정말로 세상 역사는 보잘 것 없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세상 역사는 그 보다 더 위대한 무엇에 의해서 움직여지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면 그것이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상고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8절 말씀입니다.
“그 때에 아말렉이 와서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힘든 광야의 길을 가는 이스라엘에게 아말렉이 싸움을 걸어 왔습니다. 그런데 아말렉은 야곱의 형인 에서의 손자입니다. 곧 아말렉과 이스라엘은 한 핏줄입니다. 이 아말렉이 큰 민족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모두 이삭의 자손들입니다. 불행히도 야곱과 에서는 다투게 되었는데 자손대대로 이어갑니다.
그러면 아말렉과 이스라엘이 싸우면 누가 이길 것 같습니까? 사실 아말렉이 광야를 지나가는 이스라엘을 먼저 공격한 것입니다. 이길 자신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말렉은 자신만만 합니다. 아말렉은 프랑스 처럼 잘 훈련된 군인들이었습니다.
반면 이스라엘은 노예 생활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노예들에게 군사 훈련을 시킬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광야 생활에서 어떻게 무기가 제대로 있었겠습니까? 아말렉은 때는 이 때다 생각하고 이스라엘의 씨를 말리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은 어떻게 합니까? 9절 말씀입니다.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 꼭대기에 서리라.”
급한대로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쓸만한 사람들을 골라서 아말렉과 싸우라고 합니다. 사실 쓸만한 사람들이 얼마나 있었겠습니까? 모세는 너무도 잘 알았습니다. 전혀 승산이 없는 싸움이라는 것을…, 그런데 의지할 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본인은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지팡이를 손에 잡고 서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10, 11절 말씀을 보면, 여호수아는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는 아론과 훌과 함께 산 꼭대기에 올라갑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깁니다.
그것까진 좋은데 모세가 혼자서 계속 손을 들고 있을수 없습니다. 결국 아론과 훌이 한 사람은 이쪽에서, 한 사람은 저쪽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립니다. 언제까지? 13절 말씀입니다.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무찌르니라.”
이스라엘이 완승을 거둡니다. 한편 모세도 아주 신기한 경험을 한 것입니다. 모세는 승리 후에 혼자서 골똘히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냥 이기게 하실수도 있는데 왜 내 손이 올라가야만 이기게 하셨나?” 이 생각 저 생각을 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14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억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없이하여 천하에서 기억도 못 하게 하리라.”
하나님의 말씀이 아주 위트가 있습니다. 하나는 기억하라 하고 하나는 기억하지 못하게 하길 원하십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가 깊은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기억하길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개입하셔서 전쟁에서 승리케 되었음을 기억하길 원하십니다. 반면 아말렉을 천하에서 기억도 못 하게 하시길 원하십니다.
첫번째 이유는 금방 이해가 됩니다. 이유는 사람은 쉽게 교만해집니다. 훈련받지 못한 군인들은 자기들이 잘 해서 승리한줄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아닌 것을 알리시기 위해 모세가 손을 들고 있을 때만 이기게 하셨고 손을 내리고 있을 때는 지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기록하게 하신 것입니다.
한편 더 궁금한 것은 아말렉을 천하에서 기억도 못 하게 하시는데, 왜 아말렉을 천하에서 기억 못 하게 하셨나요? 자비하신 하나님의 모습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래도 이유를 생각해 본다면, 야곱의 형 에서의 자손들이라서…? 사실 신명기 23:7절에 보면,
“너는 에돔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그는 네 형제임이니라.”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서의 후손들이 에돔 사람들인데 에서의 후손 중에 한 족속이 아말렉 족속입니다. 그러니 에서의 후손들이라서 아말렉을 기억 못 하게 하신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럼 왜 에서의 후손 중 유독 아말렉을 기억치 못 하게 하실까요? 오늘 본문은 아니지만 출애굽기 19:5, 6절 말씀을 보면 나타나 있습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이스라엘은 온 세계를 위한 제사장 나라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온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통하여 온 세상을 구원할 계획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온 세계는 물론 에서의 후손들이 세운 나라 에돔도 포함이 됩니다. 그래서 에돔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스라엘을 없애려 하는 족속이 있었는데 바로 에서의 후손인 아말렉입니다. 이스라엘이 없어지면 온 세계를 향한 구원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쩔수 없이 아말렉을 향하여 이렇게 지독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곧 모세는 아말렉을 천하에서 기억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됩니다. 아말렉 처럼 제사장 나라를 없애려는 민족은 없애시겠다는 것입니다. 아말렉은 제사장 나라를 없애려는 자들의 상징적 존재인 것입니다.
이에 이 귀한 것을 다시 깨달은 모세는 남은 아말렉을 치러 가는 것이 아니라 후세에 길이 남는 행위를 합니다. 15절 말씀입니다.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제사장 나라임을 보여 주기 위해서 제단을 세웁니다. 그리고 이름을 붙입니다. ‘여호와 닛시.’ 제사장 나라인데 당연히 제단을 쌓아야죠. ‘닛시’의 뜻은 ‘나의 깃발’, ‘My flag’입니다. 보통 전쟁에서 승리하면 깃발을 꼳습니다. 제단을 쌓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두 가지를 다 하고 있습니다. 제사장 나라이기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로 정한 것입니다.
또한 제단 이름을 ‘여호아는 나의 깃발’이라고 정한 이유를 16절에 밝히고 있습니다.
“이르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여호와께서 대대로 아말렉과 싸우시려는 이유는 바로 이스라엘은 온 세상을 위한 제사장 나라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제사장 나라에 대적하는 모든 아말렉과 대신 싸우시겠다는 뜻입니다.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대로 이 나라를 지켜 주실 것임을 확신한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스라엘이 온 세상을 위한 제사장 나라임을 밝히고 이를 자자손손 알리기 위하여 ‘여호와 닛시’라는 제단을 광야 한 군데 쌓은 것입니다.
그러면 여호와 닛시의 제단을 쌓는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대하실까요? 오늘 본문 말씀 첫 절인 8절 말씀을 다시 보면,
“그 때에 아말렉이 와서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기록되어 있는데 ‘그 때’가 어느 때라는 말씀은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그 때’라는 표현이 아주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전쟁의 승리의 기적 기사인 반면 바로 전에는 두 가지 기적 이야기가 연거푸 나옵니다.
첫번째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보내시는 기적이고 두번째는 반석에서 물을 나게 하시는 기적입니다. 그리고 세번째로 승리의 기적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연히 세 기적 기사가 나란히 기록되었겠나요?
하나님께서는 제사장나라를 광야에 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먹이시고 입히시고 마시게 하시고 전쟁에서 보호하십니다. 이들을 통해서 온 세상을 구원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곧 그들을 온갖 기적의 힘을 가지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십니다.
오늘 신년 주일 예배로 드립니다. 올해 저희 교회 표어를 ‘여호와 닛시’로 정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제사장 나라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로 말미암아 온 세계를 위한 제사장 나라가 되길 원하십니다. 브루클라인, 보스톤 그리고 미국과 한국, 또한 전 세계를 위한….
그래서 우리에게 기적적으로 먹을 것과 마실 것과 또한 승리의 기적을 올해도 베푸실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제단을 쌓는 것입니다. ‘여호와 닛시.’ 우리들의 이웃과 우리들의 자녀를 위하여….
한편 우리가 쌓는 제단은 우리를 지켜 줄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을 지켜 줄 것입니다. 우리들의 이웃을 지켜 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제단을 자녀들이 보지 않을까요? 그래서 우리들의 자녀들도 제사장 나라가 되어서 기적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처음 소개한 John이라는 소년은 부모님이 쌓은 ‘여호와 닛시’라는 제단을 보면서 아니 그 제단 앞에서 함께 예배를 드리며 자라났습니다. 성경을 많이 읽으라고 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늘 감사하라는 가르침을 통해서도 쉽게 알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UCLA의 전설적인 농구 코치인 John Wooden입니다. 그가 얼마나 ‘여호와 닛시’라는 제단을 쌓는 사람임은 그의 다음의 고백을 통해 잘 알수 있습니다.
“나는 항상 이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농구가 삶의 목적이 아닙니다. 농구는 우리가 사는 삶에 작은 부분에 불과합니다. 오직 승리를 주는 삶은 단 하나입니다. 그것은 구세주의 손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바로 ‘여호와 닛시’의 제단 앞에서 삶을 산 것을 나타내 주는 고백입니다. 이런 John Wooden이 이끄는 UCLA는 NCAA 10차례 champion이 되었습니다. 한 때는 7년 연속 챔피온이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기록입니다.
이들이 이처럼 승리자가 될수 있었던 것은 이들에게는 게임의 승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세상을 위한 제사장의 삶입니다. 나머지 게임의 승부는 하나님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렇다고 제단만 쌓고 다른 준비를 안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John Wooden코치는 선수들을 훈련시킬 때 게임 보다 연습하는 시간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그가 이끄는 팀 선수들의 모습을 보면 게임에서 졌는지 이겼는지를 알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더 중요했던 것은 연습 과정이었고 그 과정을 멋지게 마쳤으면 게임의 승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승컵에 목표를 두었더라면 7년 연속 챔피온이 될수 없었을 것입니다.
제가 어릴 때 농구를 좋아했는데 골인 시키려고 애를 쓰면 안 들어 갑니다. 자연스럽게 쏘면 들어갑니다. UCLA 선수들은 자연스럽게 게임에 임하도록 훈련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장 나라가 되려면 제단을 쌓는 일과 함께 주어진 일도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목표가 세상 사람들과 다를뿐입니다. 우승컵이 목표가 아니라 매일 매일 제사장으로서 승리하는 것입니다. 제사장으로서 이웃을 위해 사는데 하나님께서 지켜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지난주 설교 말씀을 통해 가나안 2019가 기다리고 있으니 함께 뛰어 들어가자고 말씀드렸습니다. 어떤 분들은 1주일 생활하고 나서 말씀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작년과 똑 같이 광야인데요…?”
맞습니다. 우리는 광야 2019에 들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 광야에서 여호와 닛시의 제단을 쌓는다면 바로 가나안 2019로 변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온 세상을 위한 제사장 나라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니 함께 여호와 닛시의 제단을 쌓아 가십시다. 삼 세대가 함께 이 제단을 쌓아가고 이 제단 앞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다.
사실 2천년전에 주님께서 쌓은 제단도 바로 이 제단이 아닐까요? 여호와 닛시의 제단! 주님은 온 인류를 위한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영원한 여호와 닛시의 제단을 쌓으신 것입니다.
한편 주님은 이런 미국 땅에서 여호와 닛시의 제단을 쌓는 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격려의 말씀을 하시지 않으실까요? 영화 트로이에 나오는 대사입니다.
“제군들! 나는 수천 명의 병사보다 자네들을 더 믿는다. 용맹을 떨쳐보자. 우리는 사자다. 저 해변에 뭐가 기다리는가? 승리다! 가서 쟁취하자!”
작년도 표어는 ‘겨자씨를 심는 공동체’ 여성적인 표어를 주셨습니다. 올해는 남성적인 표어를 주십니다. ‘여호와 닛시’.
말씀을 거둡니다.
롱펠로우의 ‘인생 찬가’라는 시의 마지막 연입니다.
‘넓고 넓은 세상의 싸움터에서,
또는 인생의 진영 안에서,
말 못하고 쫓기는 짐승이 되지 말고,
싸움에서 이기는 영웅이 되라!’
2019년도 삼세대가 제사장 나라가 되어서 여호와 닛시 제단을 쌓는다면 우리 모두 영웅이 될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