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소개해드렸는데 서강대 교수를 역임했던 한동일 신부님이 ‘라틴어 수업’이라는 흥미로운 책을 펴냈습니다. 서강대에서 강의한 내용을 토대로 쓰셨는데 주로 로마에서 공부하면서 겪고 느꼈던 일들을 재밌게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그중 아주 특이한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로마인의 욕설.’
아마도 죄가 세상에 들어 온 후 처음 인간이 만든 것이 있다면 바로 욕설인 것 같습니다. 어느 문화에도 욕이 없는 문화는 없어 보입니다.
한 교수님은 로마에서 공부할 때 무척 고생을 많이 하신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는 바티칸 변호사가 되었는데 바티칸 변호사가 되기 위해서는 3년간을 라틴어로 공부를 했어야 했습니다. 영어도 아닌 라틴어로…. 생각만해도 머리가 아파 옵니다.
이렇게 정신 없이 공부하는 중 종종 어느 공원을 방문하곤 했다고 합니다. 근데 그 정원을 들어가는 문에는 한 걸인이 항상 서 있었습니다. 그는 낮이나 밤이나 늘 술취해 있었는데 신부님이 지나가면 늘 물었다고 합니다.
“너 일본 사람이니?”
아니라고 해도 볼 때마다 똑 같이 묻곤 하였다고 합니다. 어느 날은 참을수가 없었습니다. 욕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습니다. 다행이 갈등하다가 그 날도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 다음 날도 공부하다가 쉬려고 정원을 찾아 갔습니다. 당연히 똑같은 질문을 받았습니다.
“너 일본 사람이니?”
순간 입에서 뭔가 튀어 나왔습니다.
“Stultus es!” (멍청한 놈!)
라틴어 욕입니다. Stultus 에서 영어 stupid이 유래됩니다. 앞으로 stupid이란 말은 쓰지 마시고 정 쓰시고 싶으면 ‘stultus’를 쓰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신부님의 다음 글이 더 재밌습니다.
“사실 저는 로마로 유학을 가기 전까지 욕이란 걸 하지 않았지만, 로마생활은 저에게 욕의 필요성을 일깨워주었습니다. 로마는 혼잣말로 욕이라도 하고 나면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곳이었어요. 욕에 이런 순기능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왜 거룩한 설교 시간에 욕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하시나 궁금하신 분들이 계실줄 압니다. 사실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베드로의 모습을 생각하다 보니 욕하는 베드로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1, 2절 말씀을 보면, 제가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금방 이해가 되실줄 압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 말고 두 그룹의 사람들이 보입니다. 먼저 1절 말씀입니다.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예수님이 병자들을 고치고 여기 저기서 말씀을 전하신다는 소문을 듣고 무리가 몰려 왔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호숫가에 서 있으셨습니다. 자 얼마나 장관이겠습니까? 한 사람의 말씀을 듣기 위해 무리가 사방에서 몰려왔고 예수님은 호숫가에 간신히 서 있습니다. 그들의 모습에는 말씀을 경청하고자 하는 거룩한 모습이 엿보입니다. 한편 2절 말씀입니다.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다른 그룹은 어부들입니다. 이들은 처음 무리들과는 꽤 대조적입니다. 아마 어부들도 소문으로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을줄 압니다. 그런데 이들은 지척에 와 있는 소식을 접했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이 날도 생업을 위해 호숫가에 나왔습니다.
한 그룹은 말씀을 듣기 위해 나왔고, 한 그룹은 생업을 위해 나왔습니다. 생업을 위해 호숫가에 나온 어부들은 잠시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어떤 마음으로 그물을 씻고 있었겠습니까?
고기를 많이 잡은 후 또 잡기 위해서 신나게 씻고 있었겠습니까? 이들은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도 건지지 못했습니다. 집에서는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빈 손으로 집에 들어 가자니 발이 움직여지지 않습니다. 그물을 씻으면서 오기만 남아서 고기를 몇 마리라도 잡고야 말리라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입에서는 별로 좋지 않은 소리가 나옴직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리가 몰려 옵니다. 한가한 사람들입니다. 한 청년의 소문을 듣고 몰려 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무리를 보면서 별 생각이 오고갔을 것입니다. ‘이들은 가족도 없나? 먹고 살 걱정이 없는 자들인가 보지?’
그런데 문제의 주인공 예수라는 청년이 자기들 배에 슬쩍 올라 탑니다. 그리고는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합니다. 좀 어처구니는 없었지만 기왕 쉬었다가 다시 나갈 생각이었으니…,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 온 것을 보면 그래도 좋은 구경거리인데 가장 가까이서 보게 되었으니, 청년이 요청한대로 합니다.
한참 말씀을 전하는데 귀에는 들어 오는 것이 없습니다. 계속 생계 걱정이 머리에 가득차 있으니…. 그런데 생각 보다는 끝나질 않습니다. 슬슬 입에서 또 다른 말들이 튀어 나오려고 합니다. ‘stultus’ 같은…. 다행이 청년 선생은 말씀을 마쳤습니다. 휴우….
다시 물고기를 잡으러 나갈 마음을 먹고 있는데 젊은 선생이 말합니다. 4절 말씀입니다.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여기서 시몬은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청년 예수의 이 말을 듣고 어떠했을까요? 사실 그동안도 이해가 안 되는 말을 듣고 있었습니다. 물론 머리에 생계 걱정이 가득차서 이해가 안 되었을테지만, 이제 다시 고기 잡으려고 나가려고 하는데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말을 또 합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합니다.
아니 젊은 선생이 말씀은 권위가 있게 해도 고기 잡는 것을 자기에게 이래라 저래라 한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습니다. 소문에 의하면 아버지에게 목수일을 배워서 가사일을 도왔다는 소문도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모습에는 목수의 모습은 보여도 어부와는 너무도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그런데 감히 평생 고기를 잡아 온 자기에서 목수가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합니다. 제가 세탁소에 심방가서 ‘빨래는 이렇게 해야 합니다’ 말하는 것과 똑 같습니다.
그런데 아마 두 가지 생각이 났을 것입니다. ‘밤새껏 해도 안 되었는데 한 번 더 실패하면 어떠냐’, 또 하나는 ‘그래도 이처럼 수많은 사람이 따르는 신통한 사람이니 한 번 순종하면 어떠냐’.
그렇지 않습니까? 세탁소에 하루 종일 손님이 없었는데 제가 가서 뭐라고 말씀드리면 밑져야 본전으로 따라 하시지 않겠습니까? 속으로는 비웃으면서…. 물론 지혜로우신 분이라면 안 따라 하셔야겠지요. 5절 말씀입니다.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베드로는 청년 선생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립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베드로가 이렇게 표현한 저의가 있습니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짓을 자기가 하고 있다고 불평쪼로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젊잖은 욕이라고나 할까요? 6절 말씀입니다.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베드로는 어떻게 반응할까요? 7절 말씀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베드로는 놀랍니다. 놀라 예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고백합니다.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베드로가 왜 놀랐겠습니까? 이해가 안 되는 일이 벌어졌으니 놀란 것입니다. 이해되고 기대되어진 일이 일어나면 놀랄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만 놀란 게 아닙니다. 같이 있는 많은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9절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는 자기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라고.”
모두 놀랐습니다. 모두에게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일이 벌어졌기에 놀란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만 유독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모두 똑 같은 것을 보았는데 왜 유독 베드로만 이런 고백을 할까요?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사실 이 때만 해도 베드로는 성령을 받지 않아서 죄에 대한 정의도 잘 몰랐던 때입니다. 단지 베드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일은 하였습니다. 불평어린 마음으로…. 그런데 놀라운 일을 보았습니다.
이에 그는 감동합니다. 도저히 자기와는 같이 있을수 없는 분임을 느낍니다. 그래서 떠나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떠나 달라는 것을 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자기는 죄인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당신과 같은 분과 함께 할수 없는 죄인임을….
이 모든 것의 시작은 바로 놀람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감동받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감동 받음의 최고의 고백을 한 것입니다.
이처럼 감동하는 베드로에게 주님은 어떻게 반응하시나요? 10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예수님은 모두에게 이 말씀을 하시는게 아닙니다. 감동받은 베드로에게만 합니다. 사람을 취하는 어부가 되게 하시겠다고 약속합니다. 왜 베드로에게만 이 말씀을 하시죠?
감동받은 자들만 올인을 할수 있음을 잘 아셨습니다. 주님은 입이 거칠고 순하고가 당신의 제자가 되는 첫 조건이 아니었습니다. 감동할줄 아느냐가 첫 조건이었습니다. 감동하는 자들만 올인을 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랬더니…, 11절 말씀입니다.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말씀은 감동받은 베드로에게만 했지만, 함께 놀랐던 다른 친구들도 따라 옵니다. 아마도 예수님을 따르면 놀라운 일들이 또 많이 생겨 날 것을 기대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자기들도 언젠가 놀라운 일을 보고 또 보면 베드로와 같은 고백을 하게 될지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여튼 이렇게 해서 예수님은 당신의 수제자를 부르셨고 더불어 두 명의 제자까지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의 시작은 어떻게 되었다고요? 베드로와 어부들은 처음부터 예수를 따른 자들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주님께로 몰려 오는데 이들은 자기 생업을 먼저 생각했던 자들입니다.
아울러 그 날도 고기가 안 잡혀서 낙심하고 한편으로는 불평 내지 몰려 오는 무리를 보고 욕도 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목수의 전직을 가졌던 선생의 말에 이해는 안 되지만 마지 못해 순종합니다. 놀라운 일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에 감동합니다.
서강대 교수였던 장영희 교수가 어느 날 잡지에서 치매 예방법에 대한 글을 유심히 보았다고 합니다.
‘하루 두 시간 이상씩 책을 읽는다.’ ‘의도적으로 왼손과 왼발을 많이 쓴다.’ ‘많이 웃는다.’ ‘오랫 동안 혼자만 있는 시간을 피한다,’ ‘일회용 컵이나 접시를 쓰지 않는다’, ‘가능하면 자주 자연을 접한다,’ 등등 상식적인 예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재미있는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감동을 많이 하라.’
베드로는 전설에 의하면 십자가에 거꾸러 매달려 순교했는데, 제 명을 다 살았어도 분명히 치매는 걸리지 않았을줄 압니다.
예수님은 제 발로 자기를 따라 오는 자들 가운데서 당신의 수제자를 택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을 이해를 잘 못 하는 자들을 내치지 않으셨습니다. 반면 이해가 안 되는 일을 말도 안 되는 일을 하는 자를 좋아하셨습니다. 게다가 쉽게 감동받는 자를 좋아하셨습니다. 툭하면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니이다’ 입버릇 처럼 고백하는 자를 택하셨습니다.
감동받은 베드로는 쉽게 올인할 것을 주님은 아셨습니다. 그래서 놀라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이는 더 놀라운 일들을 약속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더 이상 물고기를 취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취하는 자가 될 것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베드로와 친구들이 다시 물고기를 잡으러 나갔습니다. 밤새 일했으나 하나도 잡지 못 했습니다.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말씀하십니다. 그 때도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잡혔는데 큰 물고기 백쉰세 마리가 잡혔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런데 후에 성령을 받고 베드로가 설교를 하니 단 번에 3000 명이 주님을 믿는 역사가 벌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을 취하는 놀라운 기적이 아니었겠습니까?
물고기 백쉰세 마리도 많지만, 한번 설교에 3000명! 이 놀라운 기적을 주님께서 감동의 사람 베드로에게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의 시작이 무엇이라구요? 말이 없고 젊잖은 자들을 통해서…? 그렇지 않습니다. 입은 거칠지라도 이해가 안 되는 일도 순종하는 자들에게 주어집니다. 쉽게 감동하는 자들에게 주어집니다. 올인하는 자들에게 보여집니다.
지난 주일에는 제직 임직식을 거행했습니다. 서약 중에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옵니다.
“당신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온 정성과 지혜와 상상력과 사랑으로 섬기기를 힘쓰겠습니까?
‘상상력’이란 표현이 들어가 있습니다. 상상력은 바로 이해가 안 되는 일에도 놀라운 세계가 펼쳐질 것을 상상하는 것을 뜻한다고 봅니다.
저희 교회가 작년 65주년을 맞이하여서 이웃 초청 한국 문화 축제를 열었습니다. 성대한 축제였습니다.
정확히 16년전에 첫번째 한국 문화 축제를 열었었습니다. 평가회에서 귀한 고백을 들었습니다. 한 교우님께서는 도저히 이런 축제를 왜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결정한 것이니 속으로는 의심이 많았어도 끝까지 도왔다고 합니다. 다 마치고 난 후 Brookline 학교 뿐 아니라 주위 분들로 부터 많은 좋은 평가를 받고는 당신의 마음이 바뀌었다고 고백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후에 집사회장이 되어서 축제를 책임지기도 하셨습니다. 끝내 축제에 올인 하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순종이란 이해가 안 되는 일을 따라 하는 것입니다. 이해가 안 되는 일을 했기에 놀라게 됩니다. 놀란 사람들만이 감동하게 됩니다. 감동의 사람들만이 올인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을 주님은 부르십니다.
사실 주님도 평생 이해가 안 되시는 길을 가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결국 놀라운 사건의 주인공이 되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올해도 때로는 이해가 안 되는 일들이 주어질 때가 있습니다. 아니 1년 내내 이해가 안 되는 일들이 주변에 항상 있을줄 압니다. 아니 그래야 됩니다. 그래야 우리는 계속 놀라운 일을 체험하게 되고 우리는 항상 감동의 사람이 됩니다. 치매도 안 걸리구요…!
그러니 이해가 안 되는 일로 감사하십시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 때마다 상상의 날개를 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이해는 안 되어도…. 놀라운 일이 생기질 않을까요? 감동의 마음을 가지고 ‘여호와 닛시’를 외치십시다.
물론 이 고백도 잊지 마십시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말씀을 거둡니다.
Mary Hartman시인의 ‘삶은 작은 것들로 이루어졌네’라는 시입니다.
삶은 작은 것들로 이루어졌네
위대한 희생이나 의무가 아니라
미소와 위로의 말 한마디가
우리 삶을 아름다움으로 채우네.
간혹 가슴앓이가 오고 가지만
다른 얼굴을 한 축복일 뿐
시간이 책장을 넘기면
위대한 놀라움을 보여주리.
Life’s Made up of Little Things
Life’s made up of little things,
no great sacrifice or duty,
but smiles and many a cheerful word
fill up our lives with beauty.
The heartaches, as they come and go,
are but blessings in disguises,
for time will turn the pages o’er
and show us great surprises.
우리들의 삶은 이해할수 없는 작은 것들로 이루어졌습니다. 교회 일은 더욱 그렇구요. 그러나 시간이 책장을 넘기면 위대한 놀라움을 보게 될줄 압니다.
이해할수 없는 일로 인해 거친 말을 하는 대신 순종의 덕을 쌓아 가십시다. 놀라운 일을 보게 될 것입니다. 감동케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우리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