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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마가복음 2:1-12 (02/24/19)

 

얼마 전 저희 교회와 깊은 연관이 있는 뉴져지 찬양교회 허봉기 목사님께서 본인이 저술한 책을 보내 주셨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가 눈에 띄었습니다.

허 목사님은 어릴 적부터 앉는 자세가 구부정해서 요즘은 그 영향으로 일 년에 한 두 차례 허리에 가벼운 통증이 오는 벌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자식은 안 그랬으면 바랬는데 아들이 아주 어릴 때부터 앉은 자세가 구부정해서 놀랍기도 하고 우습기 조차 했다고 합니다.

기회 있을 때마다 아들의 등을 손으로 받치며 “허리 펴!”를 외치곤 했는데 어느 날 구부정하게 앉은 자세로 텔리비전을 보는 아빠의 허리를 손바닥으로 치면서 아들이 “허리 펴!”라고 말해서 한바탕 웃었다고 합니다.

 

그뿐 아니고 목사님은 사모님으로부터 남들과 대화를 할 때 다리를 떠는 버릇이 있다고 지적을 받곤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보니 아들이 말할 때마다 다리를 떨고 있었고 딸도 떨고 있었습니다. 걱정하는 엄마에게 딸이 하는 말,

“엄마. 나만 떠는 거 아냐. 아빠 떨지, 오빠 떨지, 우리 다 떨어.”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립니다.

“나는 누군가에게 내 삶을 통해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교육학에서 말하는 바 ‘드러나지 않은 교과과정’이다.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당신은 누군가에게 교재로 쓰이고 있다.”

 

오늘 자녀들과 함께 차를 타고 오셨습니까? 여러분의 운전하는 모습이 교재로 쓰여졌습니다. 물론 오늘 교회에 나오신 것조차 당연히 교재로 쓰여진 것이구요. 아주 좋은 교재로 사용될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 오는 것 말고 요즘 저희 자녀들을 위한 최고의 교재는 무엇일까요? 어떤 삶의 모습을 우리가 자녀들에게 보여줘야 할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상고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주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지 얼마 안 되어서입니다. 주님께서 어느 집에서 말씀을 전하고 계셨습니다.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 왔습니다. 이미 주님께서는 많은 병자를 고치셨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모양입니다. 3절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주위 깊게  읽으면 네 사람이 메워 온 것은 사실이지만 사람들이 네 사람에게 의뢰해서 메고 온 것입니다. 그러니 네 사람말고 또 왔으니 일곱 아니면 여덟 명의 사람이 함께 온 것입니다. 4절 말씀을 보면,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립니다.

옛 이스라엘 집 건축 구조는 지붕을 뜯을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문으로는 도저히 들어갈수 없으니 지붕을 뜯었던 것 같습니다. 암만 쉽다고 해도 남의 집 지붕을 뜯는 것은 꽤 큰 사건입니다. 얼마나 한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느낄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성서기자는 지붕을 뜯은 사건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더 관심이 있었던 것은…, 5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6, 7절 말씀입니다.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사실 지금 서기관들은 혹시 오늘은 어떻게 사람들을 고치나 보러 왔을줄 압니다. 아울러 전혀 정식 신학 교육을 받지 않은 자가 말씀은 어떻게 전하나 궁금해서 비좁은 집에 들어와 앉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을 보게 됩니다. 사람들이 지붕을 뚫고 중풍병자를 내립니다. 아마도 서기관들은 속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를 보고 집 주인이 뭐라고 하진 않겠나? 하여튼 함께 메고 온 친구들은 대단하군…. 나에겐 이런 친구들이 있나?” 이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귀를 의심할수밖에 없는 청천벽력과 같은 말을 듣습니다.

“작은 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병고치는 것 까지도 좋고 말씀을 전하는 것 까지도 참겠는데 도저히 있을수 없는 말을 이 청년이 내뱉고 있는 것입니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나님만이 죄사함의 권한이 있는데 일개 사람이 감히 이런 말을 하니…, 신성모독도 이런 신성모독이 없습니다. 분노할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왜 이러서야만 하셨나요? 아니 그냥 귀속말로 말씀하셔도 되지 않으셨을까요? 주위 사람들 안 들리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그런데 주님은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십니다. 8, 9절 말씀입니다.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어느 말이 더 쉽습니까? 어느 말을 하면 더 주위 사람이 덜 놀랄까요?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말과 걸어가라는 말 중에…. 주님께서 스스로 답변하십니다. 10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주님은 죄를 사한다는 말이 훨씬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말하기도 어려운 것임을 인정하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하실수 밖에 없으셨습니다.

 

  당신이 오신 이유는,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더 어렵지만 이것이 진리입니다. 당신에게는 죄사함의 권세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세상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듣기가 거북하여도 아니 이를 들으면 신성모독이라는 죄를 뒤집어 쓰실 것을 아시면서도 온 세상에게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이기에….

오고 가는 세대 가운데 수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잠시 살았습니다.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 이와 같은 말을 할수 있는 분은 딱 한 분이십니다. 주님이십니다. 사실 주님은 어려운 말씀 곧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말씀을 하신 후에 쉬운 말씀을 하십니다. 11절 말씀입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곧 중풍병자를 일으켜 세우심을 통해서 주님은 당신이 죄사함의 권세를 갖고 계심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확증시키신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이 전에도 많은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마가복음 2장인데 1장에 이미 많은 병자들을 고친 기사가 나옵니다.

그러면 그동안은 한번도 죄사함의 권세를 발휘하시지 않고 병만 고치시더니 왜 이번에는 죄사함을 선포하시고 계실까요? 지붕을 뚫고 내려 왔기에…? 물론 조금 연관은 있어 보입니다…. 5절 말씀에서 실마리를 잡을수 있다고 봅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누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죄 사함을 선포하셨습니까?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여기에 ‘그들’은 중풍병자를 메고 온 네 사람뿐이 아닙니다. 네 사람들에게 중풍병자를 메게 한 사람들도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곧 여러 사람을 뜻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믿음을 보시고 병자의 죄를 사하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늘 각자의 믿음이 자신의 죄를 사하게 하고 구원에 이르게 한다고 귀가 따겁도록 들어 왔습니다.

맞습니다. 대표적인 말씀이,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자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주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낫게 하실뿐 아니라 그의 죄까지 사하셨습니다.

 

시간 관계상 길게 구원론에 대해 언급할수는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구원론이 주제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주님께서는 죄인을 사하러 오셨는데 이 놀라운 사역을 어떻게 이루실 것인가가 주제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자마자 이 사건을 통해서 보여 주시고 계십니다. 곧 주님은 인간의 죄사함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는데 이 놀라운 죄사함의 사역은 인간 공동체와 함께 이루시겠다는 당신의 뜻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서 죄사함의 역사를 펼치시기를 원하십니다. 이 최고의 선물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이 놀라운 일을 거져 주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와 함께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중풍병자를 고치기 위해 여러 사람이 달려들어서 메고 왔는데 그런 깊은 우정이 있는 공동체와 더불어 펼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죄 사함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사실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처음 말씀드린 ‘드러나지 않는 교육 과정’에 기여한 ‘그들’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 ‘그들’은 바로 중풍병자를 메고 온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 ‘그들’을 후세를 위한 교재로 남겨 두신 것입니다. 이를 깨달은 마가는 마가복음에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기록한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이 없이는 당신은 한 사람도 구원하실수 없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후에 주님은 12명의 사람을 제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12제자들은 중풍병자의 친구들을 교재로 삼은 자들이 되었고, 또 그로 인해 12 제자들은 후세를 위한 ‘그들’이라는 교재가 되어 간 것입니다.

 

이 ‘그들’의 모습을 유명한 C. S. Lewis가 잘 그려주고 있습니다. C. S. Lewis가 남녀간의 사랑과 우정을 아주 쉽게 비교하고 있습니다. 남녀간의 사랑은 얼굴을 마주 보는 관계로 표현합니다. 반면 우정은 멀리 있는 목표를 함께 보는 관계로 표현합니다. 아주 잘 표현된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 믿는 자들은 남녀간의 사랑의 관계는 아닙니다. 바라보는 것이 같습니다. 같은 분을 바라보며 매 주일 만나다 보면 우정이 싹트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같은 분을 바라 보기에 우정이 싹트게 되는데 그러다 보면 또 서로의 얼굴을 후에 보게 됩니다. 그래서 더 깊은 사귐이 있게 됩니다.

곧 남녀간의 관계는 서로를 마주 봄으로 시작하면서 후에는 같은 것을 바라보는 것으로 발전합니다. 반면 우정은 같은 곳을 바라봄으로 알게 되었는데 후에 서로를 바라보게 됩니다. 그런데 서로에게 있는 광채를 모두 조금씩 보게 되어 있지 온전히 볼수 없다고 C. S. Lewis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곧 ABC세 친구가 있으면 A와 B가 C를 만나게 되는데 두 사람이 보는 C의 모습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다를수 밖에 없는 이유는 한 사람의 광채를 한 사람이 다 볼수 없다는 것입니다. 곧 A가 볼수 있는 C의 광채가 있고 B가 볼수 있는 C의 광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A는 B를 통해 자기가 보지 못하는 C의 광채를 볼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공동체가 누리는 축복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로 생각해 보면, 우리는 각자가 보는 하나님의 모습이 다릅니다. 내가 보지 못하는 하나님의 모습은 이웃을 통해 볼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공동체의 위대함입니다. ‘그들’의 모습입니다. 그들의 위대함입니다.

그러기에 공동체 안에서만 하나님의 광채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멋진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주님은 기뻐하셨을줄 압니다. 아니 ‘그들’의 모습은 주님을 압도했을 것입니다. 친구를 지붕을 뚫고 내리는 그들의 모습에 압도 당한 채 주님은 당신이 이 땅에 오신 그 비밀을 쏟아내고 마신 것입니다.

“네가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감사한 것은 저희 교회에 여러 ‘그들’이라는 공동체가 있습니다. 오늘은 남선교회 헌신 예배로 드립니다.

얼마전 저희 교회 남선교회에서 한국에서 온 학생들을 1박2일 맞이한 행사를 하였습니다. 작년부터 우리 교회가 동참하였는데, 저희 교단 남선교회와 한국 통합 측 남선교회가 매년 함께 협력하는 사역입니다. 어느 교우님이 봉직하는 대학교에서 함께 점심을 하고 교수님의 강의를 듣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저에게 짧게 격려의 말씀을 하라고 해서 다음과 같은 요지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학생들에게 장성한 후 후배들에게 똑 같이 베풀라고 먼저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강조한 것은 이 사역은 누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고 미국에 흩어져 있는 남선교회 회원들이 하나가 되었고 또한 한국의 남선교회와 손을 잡고 하는 행사임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은 표현을 하였습니다.

“나쁜 일은 혼자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일은 함께 해야만 가능합니다.”

제가 말하고도 아주 잘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까지도….

 

사실 남선교회는 후배들을 위해 좋은 교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온 학생들이 장차 커서 비슷한 일을 행하게 될줄 압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이들이 듣고 본 것을 행하시는 것을 보시고 주님은 가만히 계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십니다. 우리가 전혀 예측 못한 말씀과 일을 하십니다. 은밀히 죄 사함의 역사를 펼치십니다. 아울러 중풍병자를 일으키십니다. 이 모든 일의 시작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왜냐하면 주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실 때 가만히 계시지 못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 일들을 펼치십니다. 죄사함을 받은 중풍병자가 누었던 상을 들고 가는 역사가 펼쳐집니다. 이 놀라운 일들은 남선교회 뿐 아니라 우리가 속한 ‘그들’이라는 공동체를 통하여 전개될줄 믿습니다.

 

교우 여러분, 남선교회 회원 여러분,

지금도 상에 누운 중풍병자들은 ‘그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직도 구원받지 못한 모든 사람들은 중풍병자들입니다. 이들을 위한 ‘그들’이 되십시다.

 

말씀을 거둡니다.

C.S. Lewis는 공동체의 모습을 문학적 감각을 가지고 표현하였는데 어떤 분은 군사적 용어로 표현하고 있는 것을 얼마전 읽게 되었습니다. 어느 기독교 책에서 ‘Fire team’(공격대)이라는 단어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군사 용어를 빌려 온 것입니다. Fire team은 육군이나 해병대에서 가장 작은 작전 팀 규모인데 3-4명으로 구성된다고 합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큰 전통적인 부대 보다는 훈련된 fire team을 소유한 부대가 항상 더 큰 위력을 과시한다고 합니다. 서로 가깝게 돕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 책의 저자는 fire team의 구성원들의 특성을 몇 가지 나열하고 있습니다. 아니 다음과 같은 사람을 뽑아야 한다고 합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푸는 자

-자신의 약함을 보여줄수 있는 자

-자신감을 가진 자

-약속을 지키는 자

-상대방의 불완전함을 받아드리는 자

-자신의 허물을 알고 자신의 실수와 죄를 인정하는 자

-은혜를 베풀줄 알고 진실을 말할줄 아는 자

 

이런 사람 3-4 사람이 있으면 ‘그들’이 됩니다. Fire team이 됩니다. 그런데 어렵게 보이지만 지금 우리 가운데 이미 fire team은 존재하지 않을까요? 우리 눈에 띄지 않지만 분명히 있습니다.

 

여러분이 속한 그룹, 곧 구역이나 소그룹, 남녀 선교회나 청년회가 바로 여러분 주위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분들이 바로 여러분의 fire team입니다.

 

남선교회는 서로를 신뢰함으로 fire team이 되었습니다. 후배들은 남선교회를 통해 배웠고 그대로 행할 것입니다. 그들이 배운 것은 ‘좋은 일은 함께 해야만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자들은 모두 fire team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Fire team들을 통해서 주님은 여호와 닛시의 깃발을 꽂게 하시지 않을까요? 죄사함의 역사가 펼쳐지지 않을까요? 중풍병자를 낫게 하실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 함께 그들의 믿음을 소유하십시다. Fire team이 되십시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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