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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를 받으시고…” 마가복음 1:9-11, 10:35-40 (03/03/2019)

 

얼마전 일본에서 수필가로 활약했던 김소운 선생의 글을 접해 보았습니다. 일본 바둑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일등품 바둑판은 연하고 탄력이 있는 비자나무로 만든다. 두세 판국을 두면 바둑돌에 의해서 움푹움푹 들어가나 며칠이면 다시 평평해진다. 그러나 불의의 사고로 바둑판이 갈라지기도 한다. 균열된 바둑판은 헝겊으로 싸서 1-3년 내버려 두면 계절이 바뀌고 추위, 더위가 여러 차례 순환한다. 그 동안에 바둑판은 제 힘으로 상처를 고쳐서 본래대로 붙고, 균열진 자리에 머리카락 같은 희미한 흔적만이 남는다.

한번 균열이 생겼다가 제 힘으로 도로 붙는 것은 비자나무의 유연성을 실제로 증명해 보인, 이를테면 졸업증서이다. 하마터면 목침같이 될 뻔했던 불구 병신이, 그 치명적인 시련을 이겨내면 되레 한 급이 올라 특급품이 되어 버린다.”

 

비자나무로 만든 바둑판은 깨지면 혼자서 다시 하나가 되고 도리어 한 급 상승하는 특급품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비자나무 뿐이겠습니까? 어쩌면 자연 세계는 이처럼 깨지면 스스로 하나가 되어서 전보다 더 한 급 상승하게 되지 않을까요? 그럴수 밖에 누가 만드셨는데….

 

그러면 인간 세계는 어떨까요? 인간 세계도 저절로 급이 상승하게 될까요? 가만히 놓아 두어도…?

우리 모두 경험으로 아실줄 압니다. 죄로 인해 깨진 세상은 스스로 아물지 않습니다. 아니 계속 망가져만 갑니다.

 

작년에 세계 기독교계는 치명적인 아픔을 겪었습니다. 소위 말하는 동방 정교회가 분리가 되었습니다. 1054년 교황권 문제로 카톨릭 교회가 둘로 갈리면서 동방 정교회가 시작되었는데 그 후 처음으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갈라지는 이유는 이해가 되긴 합니다. 러시아가 Ukraine을 침공함으로 인한 여파입니다. 러시아 정교회가 Ukraine의 Kiev에서 시작되었는데 그래서 러시아 정교회가 계속 Ukraine의 신자들을 콘트롤하고 있기에 결과적으로는 갈라지게 되었고 이를 동방 정교회를 대표하는 대표 주교가 인정을 하였습니다.

Kiev mass, 14 Oct 18

Kiev held a mass to thank Constantinople for recognizing the Ukrainian Church’s independence

Blessing in Kiev, 17 Mar 15

A priest in Kiev blesses Ukrainian troops setting off to fight the eastern rebels (2015 pic)

Russian blessing, 26 Nov 14

A Russian priest blesses an Su-27 fighter jet in Crimea (2014 pic)

 

그러면 왜 이렇게 인간 세계는 하나가 못 될뿐 아니라 교회까지도 계속 갈라지고 있을까요? 원인이 무엇일까요? 자연세계는 희망이 있지만 자연세계를 다스리는 인간 세계는 희망이 없을까요? 먼저 자연 세계를 기가 막히게 회복시키시는 하나님께서는 인간 세계를 향해서는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신지 알게 되면 모든 것의 실마리가 풀리게 될줄 압니다. 9절 말씀입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이로서 알 수 있는 것은 자연 세계는 가만히 놓아 두어도 되지만 인간 세계를 위해서는 무엇인가 하셨어야만 했습니다. 바로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셔야 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연 세계는 스스로 급이 상승하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 세계는 워낙 위대하게 창조되어서 스스로는 고쳐지지 않습니다. 더욱이 상승할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특히 마가에 의하면 바로 사람이 되신 창조주께서 세례를 받음으로 죄사함은 물론이거니와 도리어 급이 상승하는 과정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탄생 기사로 시작되지만 마가복음은 세례요한의 세례 베푸는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그러면 주님은 특별히 따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세례요한이 찾아 오는 사람들을 세례를 주고 있었는데 주님은 그 세례 요한에게 찾아 가셨습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곧 많은 죄인들이 몸을 담그면서 세례를 받는 바로 그 강물에 같이 받으신 것입니다.

로마에서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받았는데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선포한 콘스탄틴 대제가 있습니다. 콘스탄틴 대제는 죽기 바로 전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당시 정치가들은 많은 죄를 지니 바로 죽기 전에 세례를 받곤 했습니다. 물론 혼자서….

그러나 주님은 요단강에서 많은 죄인들과 함께 받으셨습니다. 이것이 주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은 죄인들의 죄로 물든 그 물에 스스로 잠긴 것입니다. 그들의 죄와 함께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는 10절 말씀입니다.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주님께서는 물에서 올라 오시는데 그때 성령께서 내려 오심을 보십니다. 주님은 내려 오시는 성령을 보시면서 두 가지 기쁨에 충만하셨을줄 압니다.

하나는 당신이 이제 공생애를 시작하실텐데 당신을 위해서 성령께서 늘 함께 하실 것을 보시면서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사실 오늘 본문 다음 귀절을 보면 주님께서는 성령의 강권하심을 따라 광야로 떠나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것만 보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콘스탄틴 대제 처럼 혼자 세례를 받지 않고 요단강에서 많은 사람과 함께 같은 물에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당신에게 성령이 내려 오심을 보시면서 주님은 당신과 함께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에게 성령께서 내려 오시는 것을 느끼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앞으로도 당신과 함께 물 세례를 받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이처럼 성령이 내려 오실 것을 보시면서 감격하셨을줄 압니다. 그런데 그뿐이 아닙니다. 11절 말씀입니다.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이것도 두 가지로 생각할수 있습니다. 먼저 주님은 당신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셨을 것입니다. 이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을 느끼면서 힘든 공생애를 시작하십니다. 두번째로는 이 음성은 당신과 함께 당신의 세례를 받는 모든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임을 생각하시면서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과 함께 세례를 받는 사람들은 당신과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모두 주님과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자연 세계는 가만히 놓아 두어도 한 급 상승합니다. 한편 인간 세계는 누군가의 세례가 필요합니다. 주님의 세례가 필요합니다. 주님의 세례로 인해서 인간은 성령을 받게 됩니다. 아울러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온 인류는 한 성령을 받게 되고 또한 모두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이런 유토피아가 또 있겠습니까? 이처럼 우리 인류를 최고의 존재로 승격시키시기 위해 주님의 세례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2천년전 주님께서 물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온 세상에는 복으로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하는 길이 열리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이 열렸으니…. 모든 사람이 하나가 될테니….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최상급이 된 세상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느끼시나요…?

 

미네소타 라디오 방송국에서 캘리포니아에서 도난 당한 차에 대한 보도를 하였습니다. 경찰은 차와 운전수를 잡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방송에서까지 보도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 이유가 있었습니다. 앞 자리에 과자 상자가 놓여 있는데 그 과자에는 독물이 묻혀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 독물이 묻혀진 과자는 쥐를 잡기 위한 미끼였습니다. 사실 경찰과 차의 주인은 차를 찾기 위한 것이 목적이 아니였습니다. 도둑이 독물이 뿌려진 과자를 먹고 죽을까 봐…. 결국 누구를 위해서…? 차 주인을 위해서? 아닙니다. 도둑을 위해서….

 

이처럼 요즘도 많은 사람들이 차를 훔친 도둑처럼 살고 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인데 그 죄의 삯을 받기 직전에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주님은 이런 자들을 하루라도 빨리 구원하시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곧 최상의 세계는 이미 왔고 또한 오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은 한편으로는 계속되는 구원 사역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 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이 구원 사역을 주님은 혼자서 하시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공동체를 통해서 이루시길 원하십니다.

그러면 어떤 공동체를 통해 이루실까요? 어떤 사람들이 이런 놀라운 공동체의 일원이 될까요? 예수 믿고 세례를 받은 자들일까요?

 

두번째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두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께 나와서 자기들을 주님께서 왕위에 오르실 때 하나는 주님의 좌편에 하나는 우편에 앉게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좌의정 우의정이 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에 주님께서 묻습니다. 38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이에 마실수 있다고 당당하게 대답합니다. 저 같으면 한참 망신을 줄텐데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39절 후반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곧 주님은 망신을 주긴 커녕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그들이 지금은 도둑처럼 미련하게 보여도 언젠가 당신의 세례를 받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주님은 여기서 모든 믿는 자들이 받는 구원을 상징하는 물세례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곧 이웃의 죄를 위한 고난의 세례를 뜻한다고 볼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과 함께 자동차 도둑을 잡기 위해 날뛰는 노력을 하는 것이 바로 주님의 세례에 동참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므로 물세례를 받아 주님과 하나가 된 사람들은 또 주님과 함께 도둑을 잡기 위한 두번째 세례에 동참하여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사순절을 지키는 것입니다.

첫번째 세례인 물 세례는 한 번이면 족합니다. 그러나 주님과 하나가 되어 이웃을 위해 받는 세례는 계속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올해도 사순절을 지키는 것입니다.

 

금주 수요일에 재의 수요일 예배를 시작으로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사순절은 이미 물세례를  받고 주님과 하나가 된 사람들이 기도, 절제, 구제를 통하여 주님을 닮아 가며 궁극적으로는 아직도 물세례를 받지 못하고 독물을 마시며 사는 분들을 위해 주님의 세례를 받기 위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물세례는 이미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직 이웃을 위한 삶을 사는 제2의 주님의 세례를 받지 못했습니다. 물론 후에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사순절은 내가 좌의정이나 우의정이 되기 위해 지내는 절기가 아닙니다. 단지 주님의 세례를 받아 온 인류를 하나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에 동참하게 되는 축복된 절기입니다.

한편 감사한 것은 이 세례는 고난의 세례이지만 성령을 통하여 이길수 있는 세례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재미 있는 세례입니다. 성령의 임재가 고난을 이기고도 남게 하기 때문입니다. 고난의 세례를 받을 때 진정한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축복을 즐기는 분이 계십니다. 오래 전 한번 소개해 드린 거리의 여인들을 위해 공동체를 만들고 최근에는 농장을 만들어서 Thistle farms(엉겅퀴 농장)을 운영하시는 Becca Stevens 목사님이 있습니다. CNN에서 선정하는 올해의 Hero가 되신 분입니다.

Thistle farms를 통해 여러가지 물품을 만드는데 이런 물품을 만들게 된 동기가 있습니다. Thistle은 엉겅퀴인데 거리의 여인들을 엉겅퀴로 비유한 것입니다. 그 공동체에 속한 여인들은 특별한 기술이 없어서 직업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공동체의 책임자로서 책임이 컸습니다.

이미 세 자녀를 두었는데 가장 개인적으로 시간을 즐길수 있는 시간이 모두가 잠들었을 때 막내 아기를 목욕시키는 시간이었다고 합니다. 목욕통에서 아이디어가 떠 올랐습니다. 여인들이 돈도 벌고 치유를 받을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생각하던 중 농장에서 나오는 식물들로 비누나 화장품을 만드는 생각이 났습니다. 아이디어를 나눴더니 모두 좋아 해서 드디어 모든 여인들과 함께 물건을 만들어 팔게 되었습니다. 그냥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물건을 만들면서 기도합니다. 만들어진 물건을 기도하면서 판매합니다. 성공적인 비지니스가 되었습니다. 여인들도 좋고 그 물건을 사용하는 사람들도 좋고…. 공동체를 이끄는 일이 힘든 일이지만 성령의 도움으로 놀라운 기적을 맛보며 공동체를 운영하고 많은 사람들이 치유를 받는 기쁨을 누리고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에게 주시는 고난의 세례입니다. 정말 필요한 고난의 세례는 이미 주님께서 다 치루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올해 사순절을 통하여 고난의 주님을 바라보며 우리가 받아야 할 복된 고난의 세례에 함께 동참하십시다. 기도와 절제와 구제를 통하여…. 그러나 이 고난의 세례에 진정으로 동참할 때 우리는 어느새 즐기고 있을 것입니다. 성령의 임재를….

 

말씀을 거둡니다.

“피고석의 죄수!”하고 종교재판 법정의 재판장이 말했습니다.

“당신은 우리 거룩한 종교의 법과 전통과 관례를 깨뜨리도록 사람들을 선동했다는 고발을 받았소. 어떻게 변호하겠소?”

“유죄입니다, 재판장님.”

“그리고 이교도, 창녀, 죄인, 착취자 세리, 우리나라를 정복한 식민주의 통치자 등- 간단히 말해서 파문된 자들과 자주 어울린다는 고발이 있소. 당신은 어떻게 변호하겠소?”

“유죄입니다, 재판장님.”

“끝으로, 우리 신앙의 거룩한 교조들을 개조하고, 수정하고, 거기에 이의를 제기한다는 고발도 들어와 있소. 어떻게 변호하겠소?”

“유죄입니다, 재판장님.”

“당신 이름이 무엇이오, 피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재판장님.”

 

이렇게 해서 주님은 스스로 고난의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온 세계가 한 급 상승하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우리도 함께 우리가 받아야 할 세례를 받음으로 주님의 나라를 이루는 일에 동참하십시다. 성령과 더불어 기쁨의 삶을 누리실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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