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운전사의 이야기입니다. 인적이 드문 시골에서 자동차 바퀴가 터졌지만 그에게 잭이 없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마을도 족히 5km이상 떨어져 있었습니다. 한여름의 뜨거운 햇빛이 내리쬐는 들판에서 그는 오랫동안 도움을 기다렸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마을까지 걸어서 차 정비소에 가서 잭을 빌리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불안해졌습니다. 기껏 거기까지 갔는데 정비사가 빌려주지 않으면 어떡하나 걱정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길을 가는 동안 걱정은 점점 깊어만 갔습니다. 마침내 마을에 도착해 정비소를 발견했을 때, 그는 정비사가 도와주지 않으리라는 확신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 결과, 정비사에게 용건을 말하자마자, 그는 볼멘소리로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잭의 사용법을 알기나 합니까?”
부정적인 생각에 늘 사로잡혀 있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프랑스 철학자인 르누아르가 당신의 책에서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운전사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가 정비사가 되기도 합니다. 지난 주간도 때로는 나도 모르게 운전사가 되기도 했을 것이고, 정비사가 되기도 했을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지난주 월요일에서 수요일까지 출장을 다녀 왔습니다. 지난 주일은 오후에 당회까지 있어서 이른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게다가 요즘은 새교우 반까지 있어서 보통 주일날 보다는 많이 피곤한채로 귀가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새벽 같이 일어나서 공항에 갈수밖에 없었습니다. 비행기 안에서 자야지 생각하고 탔는데, 제가 창가에 앉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려고 제 옆의 창문의 blinder를 내렸습니다. 그런데 바로 앞 좌석의 손님이 blinder를 내리지 않고 있었습니다. 캘리포니아까지 가는 긴 시간이었는데 저는 앞에 분에게 말을 할까 말까 망설였습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감히 말을 못 건넸습니다. 불쾌해 할까봐…. 거절 당할까봐…. 그런데 후에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마 내려달라고 했다면, 금방 저도 볼멘소리로 외쳤을지 모릅니다.
“blinder 내릴줄이나 압니까?”
그랬더라면 앞의 사람이 얼마나 당황했을까요? 물론 저는 부탁도 못해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며 긴 여행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말 못하는 운전사가 되고만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우리들의 삶일까요? 기나긴 시간을 잠도 자지 못하고 피곤한 여행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요?
사실 공항에서 두 목사님을 만나 우버를 타고 호텔로 향했습니다. 물론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지만, 제가 한 시간 가량이라도 잠을 잔 후 만났으면 더 밝은 얼굴로 두 목사님을 만날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처럼 우리의 부정적인 생각은 우리를 지친 얼굴로 살아가게 하고 때로는 엉뚱한 말실수까지 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엉뚱한 말을 들은 사람의 얼굴은 주위 환경을 더욱 어둡게 만들 것이구요.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이런 사회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데 하나님은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살기를 원하실까요?
바울의 모습을 통해 우리들의 모습을 살펴보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은 어떤 모습인지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그렇게도 사랑했지만 종종 차가운 소리를 듣곤했습니다. 3절 말씀을 보면 알수 있습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사도바울이 왜 이런 말을 할까요? 당연히 판단받았기 때문입니다. 곧 정비사 처럼 엉뚱한 소리를 종종 들은 것입니다. 반면 고린도 교인들은 부정적 생각에 사로 잡혀 있는 운전수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에게 말하곤 한 것입니다.
“당신은 성경을 읽을줄이나 압니까?”
당연히 읽을줄 알죠. 그러나 바울은 이런 판단 받는 것이 당신에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고 합니다. 아마도 당신이 판단받는 이유를 너무 잘 안다는 뜻일줄 압니다. 이들도 운전수처럼 부정적인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자기도 모르게 엉뚱한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4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당신들이 나를 판단해도 그 판단은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참된 판단을 하실 분이 계신데 그 분은 바로 주님이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5절 말씀에 하나님의 심판의 실체를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어떻게 보면 사도바울은 느긋합니다. 느긋한 이유는 결국 하나님께서 심판하실텐데 칭찬 위에 칭찬으로 마칠 것을 잘 알고 있으니 말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잭을 사용할줄 알아?” 이렇게 대화를 마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도리어….
사실 요즘 저희 집에서 가끔 이 노래 가사를 부르곤 합니다.
“잘했군, 잘했어….”
가요를 잘 아시는 분은 쉽게 무슨 노래인지 아실줄 압니다. 아니면 지난번 연합 부흥회 주일저녁 시간에 참석하신 분들도 기억 나실줄 압니다. 찬양대원들이 참석했으니 꽤 많은 교우님들이 강사님의 재미있는 말씀을 들으셨을줄 압니다.
저도 이 가요는 알고 있었는데 복음으로 연결시키지는 못했었습니다. 강사님은 이 노래를 복음과 연결시켜 은혜롭게 말씀을 전해 주셨습니다. 강사님은 노래를 잘해서 아주 돋보였는데 제가 부르면 맛이 갈까봐 가사만 불러 드리면….
영감 (왜 불러)
뒷 뜰에 뛰어놀던 병아리 한쌍를 보았소 (보았지)
어쨌소 (이 몸이 늙어서 몸보신 할려고 먹었지)
잘했군 잘했어 잘했군 잘했군 잘했어 그러게 내 영감이라지
하춘하 가수가 부르는데 어떤 표정으로 불러야 할까요? 심각한 표정으로…? 당연히 느긋한 표정으로 불렀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어떻게든 칭찬할 조건을 만드시고 칭찬을 퍼부우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이런 멋진 모습을 익히 알고 있는 사도바울은 어떻게 할까요? 6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 일이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판단하는 것입니다. 판단하는데 부정적인 생각을 갖지 않고 하나님의 판단을 본받았다는 것입니다. 곧 사도바울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판단을 본받아 실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처럼 어떻게든 당신을 판단하는 사람들에게도 칭찬할 조건을 만들어 칭찬을 퍼붓곤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잘했군 잘했어”를 입에 달고 다녔을줄 압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을 잘 아는 사도바울이 칭찬만 퍼부었을까요? 구체적으로 어떻게 본받았을까요? 7절 말씀입니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사도바울은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면서 스스로 교만해진 고린도 교인들을 꾸짖고 있는 것입니다. 그 꾸짖음은 계속됩니다. 8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이미 배 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가 왕이 되기를 원하노라.”
한 마디로 하룻 강아지 범 무서운지 모르고 까분다는 것입니다. 이들을 생각하면서 무척 염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사실 두 가지 모습 사이에 끼어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칭찬의 마음, 한편으로는 책망의 마음. 그런데 이것이 참 하나님의 모습이 아닐까요? 눈 앞에 보이는 철없는 죄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아파하십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어떻게든 칭찬거리를 없는데서 만들어 갑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신비한 모습을 어떻게 나타내고 있나요? 사도바울은 칭찬만을 하자니 하룻 강아지 더욱 교만해질 것만 같고 야단치자니 하나님의 이들을 향한 칭찬이 귓전에 울리고…. 결국 사도바울은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은 이들에게 한 그림을 보여 줍니다. 9-13절 말씀입니다.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얼뜻 보면 사도바울은 스스로 자랑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 사도바울은 최고의 선물을 부정적 사고 가운데서 교만해졌고 그래서 늘 이웃에게 상처를 주는 고린도 교우들에게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선물은 바로 자화상입니다. 아마 사도바울이 그림을 잘 그렸더라면 자신의 모습을 그림을 그려 주었을 것입니다. 대신 편지 안에 글로 자신의 자화상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저는 사도바울의 자화상의 타이틀을 10절 상반절 말씀에서 찾을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사도바울의 자화상의 제목은 ‘그리스도 때문에’.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의 글을 읽으며 온 세계에 구경거리가 된 바울의 모습을 봅니다. 모욕을 당하면서 도리어 축복하고 비방을 받으면서 권면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 안에서 칭찬을 찾아가는 놀라운 자비의 모습을 느낍니다. 그 모습에 매료되지 않았을까요?
그러면 사도바울을 통해 보여진 그 매력적인 자화상은 과연 어떠했을까요? 렘브란트가 많은 자화상을 그렸는데 그 중 사도바울의 자화상과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되는 자화상을 찾아 보았습니다.
말년에 그린 자화상입니다. 어느 작가는 이 그림을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이제 막 어둠 속으로 사라지려는 렘브란트, 그의 뒤에 서 있는 건 혹 저승사자일까? 그 순간, 누군가가 렘브란트를 불러 세운다. 뒤를 힐끔 바라보는 렘브란트의 얼굴 위로 쏟아지는 빛, 그리고 그의 문드러진 육신을 뚫고 솟아오르는 천진한 아이의 미소!’
사도바울의 모습도 이와 같지 않았을까요? 그리스도 때문에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가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린 아이의 미소를 잃지 않았던 사도바울…. 어린 아이가 되어 늘 세상을 새롭게 긍정적으로 보면서 매일을 고난 가운데서도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 소망을 잃지 않았던 사도바울의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이 모습은 부정적 사고와 말에 찌들어진 온 세상에 주는 아름다운 한폭의 그림이 되지 않았을까요?
사실 렘브란트가 말년에 이런 멋진 자화상을 그렸는데, 그는 평생 80여점의 자화상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대개는 엄숙한 분위기의 자화상입니다. 유독 말년에 그린 이 자화상에는 늙은 자신의 모습 안에 어린 아이의 해맑은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물론 나이가 들어 더 해맑아져서 이렇게 그렸을수도 있습니다. 한편 저는 제 마음대로 상상해 보았습니다.
평생 화가로서 칭찬도 물론 많이 받았겠지만 그 만큼 비판도 많이 받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누구 보다도 부정적 시각의 아픔을 많이 느꼈을 것입니다.
이제 말년에는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미소를 잃지 않고 싶은 자신의 모습을 그린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되고 싶은 이 모습을 마지막 선물로 그림 애호가들에게 남긴 것이 아닐까요? 이 세상이 필요한 것은 해맑은 어린 아이의 미소가 담겨진 노인의 얼굴임을 확신하고….
사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화가들이 예수님의 얼굴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33세에 삶을 마쳤기 때문에 모두 주님의 얼굴은 젊은 청년의 얼굴입니다. 물론 고난 받는 얼굴입니다.
한편 주님께서 사도바울처럼 60이 넘게 사셨더라면 그 얼굴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사도바울과 비슷하지 않았을까요? 렘브란트의 자화상과 많이 닮지 않았을까요?
이런 얼굴을 그리워하며, 언젠가 소개해 드렸는데, 함석헌 선생이 ‘얼굴’이라는 시를 짓지 않았을까요? 그 중 일부입니다.
이 세상 뭘 하러 왔던고?
얼굴 하나 보러 왔지.
참 얼굴 하나 보고 가잠이
우리 삶이지.
온 세상 사람들에게는 고난 받으시는 주님의 젊은 모습도 필요합니다. 한편 나이 많은 바울의 모습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한편으로는 “잘했군 잘했어”의 미소가 있고, 또 한편으로는 세상 되어짐으로 인한 초조함과 아픔의 흔적이 잔뜩 담긴 주름살이 가득찬 얼굴…. 우리도 이 얼굴의 주인공이 되십시다. 우리들의 자화상의 타이틀도 ‘그리스도 때문에.’
교우 여러분,
이 세상은 잘 될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칭찬거리를 찾아 우리 안에서 애써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사도바울처럼 그리스도 때문에 “잘했군 잘했어” 노래부르는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사도바울을 본받으려는 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온 세상은 소망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이 일에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장자’에 나오는 한 구절입니다.
“당신은 나이가 많은데 얼굴빛이 마치 어린아이 같은 까닭은 무엇입니까?”
“나는 도를 들었기 때문이오.”
사도바울이라면 어떻게 대답했겠습니까?
“그리스도 때문이오.”
우리 모두 사도바울을 닮아 갑시다.
세상이 어려워질수록 “잘했군 잘했어”의 노래를 부르십시다. 한편으로는 우리 얼굴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흔적을 채워 가십시다. 세상은 변화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말씀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