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강절 설교 준비를 위해서 몇 권의 대강절 묵상집을 구입해서 읽곤 합니다. 한 묵상글 제목이 금방 눈에 들어 왔습니다.
‘Eulogy Virtues and Resume Virtues’
(조사적 선행과 이력서적 선행)
한국어로 번역하기는 좀 어색합니다만 이렇게 의역해 보았습니다.
‘충실한 조사 와 충실한 이력서를 이루는 행함은 어떻게 다른가?’
아마 이 묵상집의 저자도 저처럼 종종 장례예배 곧 천국환송예배를 집도하시는 것 같습니다. 천국환송예배시 두 가지가 꼭 들어 갑니다. 하나는 조사이고 하나는 약력입니다. 제가 인도하는 천국환송예배에는 저는 조사를 항상 먼저 넣습니다. 그리고 약력을 넣습니다. 조사가 더 중요하니까….
그리고 저는 가족들에게 조사는 가급적 여러 명에게 부탁을 하시라고 요청합니다. 반면 약력은 한번이면 족합니다.
왜 조사는 여러 명께 부탁드리고 약력은 한 번만 할까요…? 약력은 외적으로 어떤 삶을 살았느냐를 알려줍니다. 조사는 내적으로 어떤 삶을 살았느냐를 알려줍니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약력은 누가 나와서 읽어줄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순서지에 적어 넣어만 두면 됩니다. 그러나 조사는 다릅니다. 내적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기에 사람마다 본 것이 다르고 느낀 것이 다릅니다. 간단히 몇 줄로 기록할수 없습니다.
그래서 내적으로 깊은 삶을 사신 분들을 위해서는 많은 분들이 부담없이 조사를 하십니다. 반면에 외적으로만 뛰어난 삶을 사신 분들을 위해서는 조사하시는 분들이 큰 부담을 느끼게 됩니다. 이력서는 화려할지라도….
오늘 대강절 세번째 주일 예배로 드립니다. Advent wreath에 세번째 촛불까지 켜졌습니다. 네번째 촛불이 켜지면 아기 예수를 상징하는 가운데 하얀 촛불을 키고 주님의 탄생을 축하하며 예배를 드립니다. 아울러 아기 예수가 오셨듯이 언젠가 부활하신 주님께서 오시고 시간은 영원 속으로 스며 들어가 온 세상의 완성을 보며 이를 축하하는 마음으로 감사의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금주 곧 대강절 세번째 주간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네번째 촛불이 켜지기 전 곧 우리의 삶의 남은 시간이 영원속으로 스며 들어 가기 전 우리는 어떤 삶을 살 것이냐 결단을 하게 하는 주간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기까지 우리들의 삶은 아마 세번째 촛불을 키고 기다리는 삶이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곧 우리는 금주간 앞으로 켜질 하얀 촛불을 기다리며 하루 하루 지내게 됩니다. 아니 하루 하루 새로이 마음의 촛불을 키는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resume를 좇던 삶에서 벗어나 eulogy virtue를 쌓아가는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요? 그러면 하얀 촛불을 기다리며 하루 하루 마음의 촛불을 키며 사는 삶은 어떤 삶일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살펴 보고자 합니다.
일견해 읽으면 그냥 어두운 이스라엘 땅에 빛이 비치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그런데 1절에 나오는 지명과 아울러 이사야가 누구인지를 생각하며 읽으면 더 깊은 뜻이 담겨 있음을 볼수 있습니다. 1절 말씀입니다.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볼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어디에 빛이 비치고 있냐 하면 북왕국에 비치고 있습니다. 스볼론과 납달리는 북왕국 중에서도 북쪽입니다. 이방인들이 많이 살던 땅입니다. 이 땅에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2절 말씀입니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한편 오늘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입니다. 사실 이사야는 남왕국 선지자입니다. 남왕국을 위해서 불림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잘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서 간단히 말씀드리면 북왕국은 우상을 섬기는 나라이고 남왕국은 북왕국에 비해서는 하나님께 바른 예배를 드리곤 한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남왕국 사람들은 북왕국은 소망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예언을 할 당시는 북왕국은 이미 멸망했던가 아니면 멸망을 얼마 안 남기고 있었던 때입니다.
이러한 때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놀라운 예언을 하게 하십니다. 흑암 가운데 전혀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북왕국에 흑암이 거칠 것을 말씀하십니다. 아니 그냥 흑암이 거치는 정도가 아닙니다.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는 무지 당황했을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남왕국을 바로 세우시게 하려고 자기를 부르셨습니다. 그러니 부름을 받았을 때 당연히 생각했을 것입니다.
“북왕국은 다 끝장이 났으니 남왕국을 위해 나를 선지자로 보내시는구나….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무너져 가고 있는 남왕국만큼은 잘 세워야지….”
이렇게 자기를 부르시고는 지금 보여주는 것은 엉뚱한 것을 보여 주십니다. 빛이 필요한 곳은 남왕국인데 남왕국은 조금만 하나님께서 비쳐주시면 되는데…. 도리어 하나님은 빛을 낭비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이제 곧 무너져 없어지던가 이미 무너져 버린 곳에 빛을 비추어 아름답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뿐이 아닙니다. 3, 4절 말씀입니다.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아름답게 할 뿐 아니라 승전고를 울리며 기뻐하게 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북왕국은 이미 멸망했거나 아니면 곧 멸망의 길을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패자에게 승자의 면류관을 씌우고 계신 것입니다.
승자의 면류관이 필요한 나라는 남왕국인데…, 남왕국이 잘 된 후 북왕국을 살릴수가 있는데….
사실 비행기를 타면 늘 스튜어디스들이 처음에 하는 주의 사항들이 있죠. 만일 비행기가 위기를 당하면 산소마스크가 내려 오는데 먼저 어른들이 쓰고 후에 아이들을 씌우게 하라고 하지 않습니까? 어른들이 정신을 차린 후 아이들을 돌보라는 뜻입니다.
지금 북왕국은 다 무너져 있고 산소 마스크도 제대로 쓸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반면 남왕국은 먼저 산소 마스크를 쓰고 북왕국을 도와 줘야 할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엉뚱한 북왕국에 먼저 승리의 면류관을 씌우고 계신 것입니다. 승리의 면류관을 씌워줘 받자 다 죽은 송장인데…. 이에 이사야는 더 이상 예언하기도 싫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어떡합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예언이니 계속해야죠. 그런데 당황하며 예언하던 이사야의 모든 의혹을 풀게 하는 놀라운 예언의 말씀을 주십니다. 6절 말씀입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이 모든 일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 곧 하나님께서 한 아기가 되어서 태어나실 것을 예언하면서 그는 무릎을 꿇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아기가 되시는데 오셔서 못 하실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이렇게 생각을 가다듬으며 기뻐하고 있는데 계속 하나님은 예언의 말씀을 주십니다. 7절 말씀입니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곧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 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이 아기는 다윗의 왕좌에 군림하신다는 표현에 크게 마음을 놓습니다. 다윗왕 때는 남왕국 북왕국으로 갈라지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통일왕국의 왕이었습니다. 이 아기는 남과 북을 아우르는 왕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결국 남왕국와 북왕국을 최고의 아름다움으로 가꾸시고 승리의 면류관을 씌우실 아기 예수가 태어날 것을 기다리는 이사야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하나님과 이사야의 생각은 너무도 달랐던 것입니다. 하늘이 땅에서 먼 것처럼 달랐습니다. 이사야는 당연히 남왕국에 빛이 먼저 비치고 그 빛으로 북왕국까지 비쳐질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남왕국 사람들에게 버려진 북왕국에 빛이 비쳐질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앞으로 오실 아기 예수는 북왕국을 통해서 오셔서 남왕국까지 빛을 비춰 주실 것을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한 마디로 하나님은 resume virtue를 따르는 하나님이 아닌 것 같습니다. Resume는 상식에 근거한 반복되는 보편적 삶의 정석이라면 eulogy는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특별한 이야기입니다.
학교나 직장에 apply할 때 resume가 중요합니다. 사실 사회가 원하는 resume가 있습니다. 원하는 격식과 모델이 있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은 그 resume에 맞추기 위해 온갖 시간과 정성을 다 합니다. 곧 사회가 원하는 상식에 근거한 반복되는 숫자와 기호가 가득찬 resume가 있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resume virtue를 따르시는 분이라면 아기 예수는 남왕국에 오셨어야 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요, 유다지파이니…. 유다지파는 남왕국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를 모르실리가 없으십니다. Resume를 따라 갔다가는 주변을 더욱 어둡게 만들 것을 잘 아셨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인들의 resume를 따라 남왕국에 빛으로 오셨더라면 북왕국은 영영 버림받은 곳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Resume를 따르지 않는 하나님은 도리어 거꾸로 가장 어두운 곳을 찾으셨습니다. 버림받은 곳을 선택하셨습니다.
왜 버림받은 곳을 택하셨을까요? 첫번째 이유는 하나님은 resume가 필요하지 않으신 분입니다. Resume의 power가 필요 없으신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전능자요 기묘자요 모사이시기 때문입니다.
한편 기묘자요 모사이신 하나님은 기가막히 아이디어를 펴내십니다. 그것은 어둠 속에 가장 아름다운 약속의 땅을 펼치실 계획을 하신 것입니다. 이를 만세전에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곳을 비추신 것입니다. 결국 가장 어두운 곳으로부터 시작하여 온 세계에 빛을 보내주시길 원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약속이십니다.
결국 이사야는 암흑의 땅 스볼론과 납달리 안에 꿈틀거리며 솟아 오르는 빛나는 약속의 땅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고백하는 것입니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이를 때달은 이사야는 더 이상 resume를 따르는 자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둠 속에 기가 막히게 하나님의 약속의 축복이 담겨져 있음을 믿으며 평생 eulogy virtue를 쌓아 갔을 것입니다.
곧 어두움 가운데 있는 자들 안에 빛이 있다고 생각할 때 그는 어둠에 있는 자들에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 되겠습니까? 언젠가 멋진 eulogy의 주인공이 되지 않을까요?
한편 약속의 완성자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Resume는 간단합니다. ‘목수의 아들’ 딱 하나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약속의 완성자로 오셨습니다. 곧 어두운 곳에 오셔서 빛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Eulogy는 지금까지도 계속 씌어지고 있습니다. 버림받은 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간증은 실은 주님을 향한 조사입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계속 씌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해 조사를 쓴 많은 사람들 중에 막달라 마리아가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거리의 여인이었다고 추측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막달라 마리아가 이제는 성인이 되어서 천주교에서는 추앙을 받고 있습니다.
이 막달라 마리아에게도 resume가 있다면 딱 하나입니다. ‘거리의 여인.’ 이 막달라 마리아가 이제는 많은 사람들에게 eulogy virtues의 삶을 살게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조르주 드 라 투르라는 17세기 화가가 ‘작은 등불 앞에 막달라 마리아’라는 작품을 남겼습니다.
언뜻 보면 두 가지가 눈에 띄지만 자세히 보면 세 가지가 보입니다. 촛불, 해골, 그리고 책상에 십자가가 놓여져 있습니다.
촛불을 바라 보며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주님의 빛이 어둠 가운데 있는 자기에게 비치어서 자신의 숨은 아름다움을 창조하셨고 아울러 승리의 면류관을 주신 은혜를 깊게 생각하고 있어 보입니다.
아울러 손에 해골을 들고 얼마 안 남은 삶 하루 하루를 자기처럼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빛이 되어 그들도 아름다움을 회복하고 승리자가 되게 하는 삶을 살게 하고자 결단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를 위해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을 잊지 않는 막달라 마리아의 모습입니다.
아무나 이런 삶을 살게 될까요? 오늘도 우리들의 예상을 뒤엎고 가장 어두운 곳에 빛으로 오시는 약속의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이런 축복의 삶을 살게 됩니다. 이들에게 승리의 면류관이 씌워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아직 어둠 안에 있는 자들 안에 싹트는 약속의 땅을 보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Resume를 쌓아가는 자들이 아니라 빛을 따라 사는 자들입니다.
교우 여러분,
아기 예수는 목수의 아들 이외에 resume가 필요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이름은 이미 기묘자요 모사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아기 예수께서 오늘도 가장 어두운 곳을 찾아서 그곳을 가장 아름다운 약속의 나라로 가꾸어 가고 계십니다.
우리는 기묘자도 모사도 전증하신 하나님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두움 안에서 약속의 땅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면 아기예수의 빛을 발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남은 1주간 가장 어두어 보이지만 그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하나님의 약속의 세계를 바라 보십시다.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를 본받으십니다. 촛불을 바라보며 한 손에는 해골을 만지십시다. Resume virtue를 쌓기 보다는 eulogy virtue를 쌓아 가십시다. 가장 어두운 곳 한 가운데서 하얀 촛불이 켜질 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한 랍비가 제자들에게 “새벽은 언제 오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제자 하나가
‘저 멀리 한 동물이 있는데 그 짐승이 양인지, 개인지, 알아볼 수 있는 시간입니다’ 하고 답했습니다. 랍비는 “아니다”라고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러자 다른 제자가
“멀리 있는 나무를 보고, 그 나무가 무화과나무인지, 배나무인지 알아볼 수 있는 시간 아닐까요?” 라고 되물었습니다. 랍비가 이번에도 “아니다”며 고개를 젓자, 나머지 제자들은 궁금해 하며
“스승님, 그러면 도대체 새벽은 언제 옵니까”고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랍비는
“너희가 어떤 사람의 얼굴을 보았을 때 그가 너희 ‘형제’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때가 바로 새벽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주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저는 감히 말씀드립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실까요?
“가장 어두운 곳에서 엄청난 약속의 세계가 펼쳐지고 있음을 보게 된다면 그때가 바로 새벽이다.”
대강절 셋째 주간 eulogy지혜를 가지고 새벽을 맛 보십시다. 어두운 세상 안에 금방 피어날 환한 약속의 세계를 기대하십시다. 새벽의 빛을 발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어두움이 약속의 하나님을 이기지 못합니다. 아기 예수가 끝내 어둠의 골짜기 골고다에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세상의 어두움이 아기 예수의 오심을 막지 못했습니다. 세상의 어두움이 주님의 재림을 막지 못 할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