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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한복음 16:25-33 (12/29/2019)

 

전 세계에 한 사람의 이름으로 꾸려진 박물관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네델란드 암스텔담에 있는 빈 센트 고흐 박물관입니다. 사실 완성된 800여 점의 작품 중에 생애 팔린 작품은 단 한 점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돈 가지고도 살수 없는 작품들이 되었습니다.

한 점밖에 팔지 못했지만 약 10년간 계속 그림을 그릴수 있었던 것은 형을 믿어준 동생 테오 덕분이었습니다. 사실 화상(작품 딜러)이었던 동생 테오는 형의 생활비만 대어 준 것이 아니고 가장 친한 대화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늘 글쓰기를 좋아하는 빈센트 고흐는 동생에게 편지를 쓰면서 자신의 삶을 나누곤 했습니다. 이제는 그 편지가 세계 명작이 되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습니다.

그는 27세에 화가가 되고 37세에 생을 마감하는데 37세 짧고 굵게 산 삶을 동생 품에서 마칩니다. 그의 품에서 동생에게 쓴 마지막 편지가 발견이 되었습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동생아,

내가 늘 말해왔고, 다시한번 말 하건대

나는 네가 단순한 화상이 아니라고 생각해 왔다.

너는 나를 통해서 직접 그림을 제작하는 일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최악의 상황에도 그 그림들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래, 내 그림들. 나는 일을 위해 목숨을 걸었고

그것 때문에 반쯤은 미쳐버렸지. 그런 건 좋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너는

사람을 사고파는 장사꾼이 아니다.

 

 

이 마지막 편지를 받고 테오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요…? 물론 형이 세상을 떠난 후 동생도 6개월후 형을 따라 갑니다. 아마 형을 보필하는 것이 생애의 목표라고 생각하고 살아 왔을지도 모릅니다. 자기에게 “너는 단순한 화상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형이 그리워 형을 뒤쫓아 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의학적으로 보면 물론 다른 이유도 있지만 형을 잃은 슬픔을 못 이겨서 빨리 생을 마감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오늘 송년예배를 드리는데 동생 테오는 마지막 송년예배를 어떤 마음으로 맞이하였을까 궁금한 생각도 들어 보았습니다. 사실 형은 1890년 7월에 세상을 떠납니다. 6개월후 1891 1월 25일 형을 따라 갑니다.

곧 1890년 12월 마지막 송년주일을 혼자 보내게 되는데 테오는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10년간 형을 뒷바라지했습니다. 그러나 형은 작품 하나만 팔고 나머지는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은채 자기가 보관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송년예배를 드리면서 형의 마지막 말이 귀에 쟁쟁하게 들려 오지 않았을까요?

“너는 단순한 화상이 아니다.”

사실 테오는 형으로부터 최고의 선물을 받은 것입니다. 물론 형의 예언은 적중했습니다. 그 결과 지금 암스텔담에는 형을 위한 박물관이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테오는 형의 말을 가슴 속 깊게 받지 않은 것 같습니다. 평범한 화상으로서 형을 무조건 돌보다가 실패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슬픔을 이기지 못 하고 형을 따라 간 것입니다.

형의 말을 가슴 속 깊이 송년예배시 간직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너는 단순한 화상이 아니다.”

 

엊그제 신년예배를 드린 것 같은데 벌써 2019 송년예배를 드립니다. 신년 예배 시 올해 교회 표어를 말씀드렸습니다.

‘여호와 닛시’ 직역하면, ‘여호와 깃발,’ 의역하면 ‘여호와 승리.’

1년 내내 즐겁고 또한 기대하는 마음으로 여호와 닛시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교우님들 각자가 가정마다 개인마다 임했던 여호와 닛시의 축복을 맛 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송년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주님께서 1년을 ‘여호와 닛시’를 외치며 지냈던 우리에게 어떤 말씀을 주실까요?

오늘 본문 말씀은 주님께서 약3년간의 공생애를 마치면서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송년 설교 내지 고별 설교라고 할까요? 이 말씀이 주님께서 하시는 마지막 고별설교임은 28절을 통해 알수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떠나실 때가 되었다고 주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에 제자들이 한 목소리로 대답합니다. 30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

어떻게 보면 동문서답입니다. 주님께서는 떠나시겠다는 뜻으로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의 관심은 떠나심에 있지 않습니다. 그동안 그들은 늘 궁금했습니다. “과연 주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인가 아닌가?” 이제 고별설교를 하시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하나님께로 가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후자는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백한 것입니다.

“이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

이처럼 떠나시는 주님보다 하나님으로부터 오시는 주님에 대해 온갖 관심을 갖고 있는 제자들에게 꾸짖지 않고 도리어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그동안 궁금했지만 눈 앞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것을 확인하였으니 반쪽의 믿음이라도 그 믿음을 잘 지키라는 뜻인 것 같습니다.

 

이 주님의 질문에 제자들은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기록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쉽게 생각할수 있습니다. 당연히 자신만만하게 고백했겠죠.

“우리가 믿나이다.”

어떤 생각을 하며 이 고백을 했을까요? 그동안 3년간 고생고생하면 따라 다녔던 모든 수고가 열매를 맺게 되는 시간이 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드디어 각자의 마음의 꿈꾸던 바들이 이루어지는 때라고 생각하며 귀를 모았을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베드로는 아마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자기가 늘 수제자로서 주님을 따랐으니 그야말로 주님의 오른팔로서 온 세상을 좌지우지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다른 모든 제자들도 각자 자기에게 주실 놀라운 특권을 생각하면서 성경에는 기록이 되지 않았지만 하나 같이 주님께 답변하였을 것입니다.

“내가 믿나이다.”

 

사실 말씀드린대로 올해초 신년 예배시 ‘여호와 닛시’를 말씀드렸습니다. 이 때 우리는 모두 마음속으로 고백하지 않았나요?

“여호와 닛시! 내가 믿나이다.”

 

 그리고 우리는 1년 내내 하나님의 놀라운 승리를 기대하며 1년을 보냈고 이제 송년예배를 드립니다. 송년예배를 드리는 우리들에게 주님은 어떤 말씀하실까요? 신년예배에 하신 말씀도 중요하지만 송년예배에 하시는 말씀 어쩌면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고별설교시 12제자들에게 하신 바로 그 말씀을 우리에게도 하시지 않으실까요? 32절 말씀입니다.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여러분, 좀 어리벙벙해 지지 않습니까? 당연히 주님의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어리 벙벙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당신을 버리고 도망 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니 제자들이 도망가긴 왜 도망가겠습니까? 제자들은 주님께서 아버지에게 가시기 전에 큰 능력을 받고자 기다리고 있는데 도망가다니…? 그러나 주님은 확신에 차 있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버리지만 당신은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 곧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을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크게 실망합니다. 아니 이제 시작인데 자기들이 주님을 떠난다고 하니 기가막힙니다.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는 아마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안드레의 가장 큰 공헌 중의 하나는 주님께서 하루 종일 말씀을 전하셨는데 무리는 움직이지 않고 끝까지 들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허기져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너희들이 먹을 것을 주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 안드레가 한 아이로부터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받아 와서 주님께 드립니다. 장정만 5천명 이상이 먹고 12광주리에 차고 넘쳤습니다.

그러니 안드레는 이런 생각을 했겠죠. “이제 주님께서는 나에게 그 때 그 능력을 주시겠네. 그러면 그 능력으로 온 세상을 위해 큰 일을 행해야지….”

이제 드디어 자기의 때가 왔다고 생각하는데 주님은 찬물을 끼얹습니다.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리니 벌써 왔노라.”

 

큰 실망에 빠진 제자들에게 주님은 계속 말씀하십니다. 33절 말씀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제자들은 더 혼란스러워집니다. 이를 병주고 약주고 라고 표현할수 있겠죠.

제자들이 생각하고 계획한 것을 넘은 주님의 계획이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 가운데 평안의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주님이 세상을 이기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 송년예배를 드리는 우리들에게도 주님은 이 말씀을 주시지 않으실까요?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사실 신년예배를 드리며 ‘여호와 닛시’의 하나님께 우리 모두 “아멘”으로 화답하지 않았습니까? 아울러 베드로와 안드레처럼 각자의 소원을 안고 “아멘”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오늘 송년예배를 드리는 우리들의 모습을 너무도 잘 아시는 것 같습니다. 어떤 분들은 “아멘” 한대로 이루어지신 분도 계시도 어떤 분들은 아직 응답을 받지 못하신 분도 있음을 너무도 잘 아신 것 같습니다.

한편 ‘여호와 닛시’는 우리들의 소원을 뛰어 넘는 축복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 닛시의 축복은 우리들의 마음의 소원이 이루어졌던 안 이루어졌던 이 모든 것을 뛰어 넘는 평안의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수제자가 되어서 유명인이 되어 뻐기길 원하는 베드로에게, 또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온 세상의 인기를 독차지하려는 안드레에게 그리고 각기 유명인이 되려고 자기 생각에 잠겨 있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것을 넘어 평안을 주시려고 하십니다. 왜…?

주님은 먼저 제자들에게 평안의 축복을 주시길 원하셨고 아울러 이들을 통하여 온 세상에 평안을 안겨다 주는 평안의 그릇으로 삼길 원하신 것이 아닐까요?

 

 주님은 환난 가운데 있는 세상에 이들을 평안의 그릇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이것이 이루어지는 길은 단 하나입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온 세상 한 가운데 여호와 닛시를 꽂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 세상을 위한 평화의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요즘 ‘아마존’하면 회사가 생각나지만, 원래 아마존은 세계가 필요로 하는 산소의 20%를 만들어내는 밀림지역입니다. 그런데 브라질 사람들이 산불을 내고 요즘 농토로 바꾸고 있어서 세계 사람들의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제가 그들을 비판하려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은 아마존에서 나오는 산소가 필요하듯이 이 세상은 ‘평안’이라는 산소가 필요합니다.

사실 오늘 아침 좀 일찍 집을 나왔고 holiday분위기도 있어서 그런지 조용하고 한적한 동네를 지나왔습니다. 그런데 운전하면서 든 생각이 있었습니다.

“이 동네 사람들은 조용하고 공기 좋은데 산다고 하는데 나는 경치를 즐기느라 이산화탄소를 내뿜고 운전하네…!”

생각해 보니 미국에 사는 사람들은 남의 나라에서 만들고 있는 산소를 사용하고 대신 이산화탄소를 내뿜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아무리 미국이 세계 최강국이라고 할지라도 어느날 갑자기 산소가 다 사라졌다고 합시다. 세계 최강대국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베드로가 주님의 오른팔이 되고 안드레가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는 자가 되었다고 하십시다. 그 모든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산소가 다 사라졌는데…. 이 세상이 산소가 필요하듯이 평안이 필요하신 것을 주님은 너무나 잘 아신 것입니다.

그러면 누구를 통해서 ‘평안’이라는 산소가 만들어질까요? 주님께서 세우신 ‘여호와 닛시’의 깃발을 보는 자들입니다. 어떠한 삶의 환경 가운데서도 여호와 닛시를 외치며 “아멘”하는 자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누구로부터 만들어지고 있는 것도 모르고 그 덕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통해 ‘평안’이라는 산소를 만드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제는 오늘 송년예배를 드리는 우리를 통하여 온 세상을 위한 평안의 산소를 만드시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 세상을 위하여 평안이라는 산소를 소모하는 자들이 아니라 남몰래 만들어 내는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여호와 닛시의 깃발을 보며 송년 예배를 드리는 우리 모두에게 주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야…. 나를 위한 평안의 그릇이야.”

이를 위해 주님께서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이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19년도를 보내고 새 해를 맞이하십시다.

 

올 한해 우리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테오가 평범한 화상이 아니고 형 고흐의 작품에 함께 참여한 자였던 것 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평안의 산소를 만들어내는데 일익을 담당한 소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새해에도 평범한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온 세상을 위한 평안의 그릇입니다. 주님께서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환경에서도 ‘여호와 닛시’를 외쳤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산소가 쉽게 만들어집니까? 나무들의 수고로 만들어집니다. 평안이라는 산소는 어떻게 만들어지겠습니까?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여호와 닛시’를 외치는 자들을 통해 만들어지지 않을까요?

 

그러므로 여호와 닛시의 깃발을 바라보는 자들에게는 어떤 축복이 임할까요? 우선 2019년도가 하나의 평안으로 가득찬 해로 순식간 뒤바뀌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 한 해 곧 2019년도도 우리는 평안의 그릇이었음을 감사하게 됩니다. 한편 이를 감사하는 자들이 2020년도에도 풍파 많은 세상 속에서 평안의 그릇으로 빛나게 되지 않을까요? 우리는2020년도를 평안의 사람이 되어서 맞이하게 됩니다.

 

이를 위해서 오늘 송년예배를 통해서 주님은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말씀을 거둡니다.

에밀리 디킨슨의 ‘무명인’이라는 시입니다.

난 무명인입니다! 당신은요?
당신도 무명인이신가요?
그럼 우리 둘이 똑같네요!
쉬! 말하지 마세요
쫒겨날 테니까 말이에요.

얼마나 끔찍할까요. 유명인이 된다는 건!
얼마나 요란할까요. 개구리처럼
긴긴 6월 내내
찬양하는 늪을 향해
개골개골 자기 이름을 외쳐대는 것은.

교우 여러분,

올해 유명인이 되는 것에 실패하셨습니까? 잘 되셨습니다. 우리는 여호와 닛시를 부르는 무명인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주님을 위한 평안의 그릇입니다. 무명의 별이 되어 2020년도 밤 하늘 한 구석을 밝히게 될 것입니다. 2019년도의 밤 하늘을 밝혔듯이… 우리가 있는 곳에서 온 세상이 필요한 ‘평안’이라는 산소를 만들어 내십시다. ‘평안’이라는 빛을 발하십시다. 새해에도 평안의 그릇이 되어 늘 여호와 닛시를 부르십시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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