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T 교수였던 Alan Lightman교수가 우리 자신을 돌아 보게 하는 책을 지었습니다. 제목은 ‘Diagnosis’(진단). 내용은 렉싱톤에 사는 한 사업가의 이야기입니다. 렉싱톤에서 보스톤 시내까지 회사를 다니는데 그 회사의 모토가 ‘the maximum information in the minimum time.’ 곧 짧은 시간에 많은 정보를 확보하는게 모토였던 회사입니다. 물론 요즘 모든 회사의 모토일줄 압니다.
여느 때 처럼 렉싱톤에서 기차를 탔습니다. 기차를 탄 사람 모두 laptop을 엽니다. 어떤 사람들은 셀폰으로 대화를 시작합니다. 직장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일은 시작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날은 좀 달랐습니다. 뭔가 이상할 정도로 불편함을 느낍니다. 약간의 열도 느낍니다. 넥타이를 풀고 코트를 벗습니다. 어쩔수 없이 신발도 자켓도 벗습니다.
시내에 도착했는데 웬일인지 자신의 이름이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일하는 곳도 자기가 사는 곳의 이름도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그는 보스톤이라는 거대한 우주 가운데 실종이 된 느낌이었습니다. 뭔가 이상함을 느낍니다. 결국 병원으로 향합니다.
최고의 의사들과 최신 장비로 진단을 받기 시작합니다. 확진도 내리지 못한 채 의사들이 방을 떠나고 본인도 방을 떠나 집으로 갑니다. 그런데 집으로 가는 길을 알수가 없습니다. 다행히 그 날 겨우 집에 도착했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 날입니다. 아침에 깨니 손가락들이 감각을 느끼지 못합니다. 짧은 시간에 많은 정보를 얻어내야 하는 회사에 다니는 사람으로서는 치명적입니다. 콤퓨터 키보드를 전처럼 빨리 칠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회사 동료들도 옆에서 자신의 모습을 눈치챘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마비는 손에서 다리로…, 천천히 몸 전체로 퍼져 나갔습니다.
더 많은 테스트를 해 봅니다. MGH가 자료를 Mayo Clinic등 다른 유수한 병원에도 보냅니다. 그런데 답변은 한결 같습니다.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뼈속 깊이 느낍니다. ‘It is numb.’
새로운 테스트를 해 봅니다. 이번에는 정신과에서 담당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같습니다.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 문제는 있습니다. 이렇게 소설은 마칩니다.
저자인 Lightman교수는 파격적인 예언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the maximum information in the minimum time’이라는 모토가 질병의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이 모토가 사람들을 마비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콤퓨터 앞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It is numb.’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Lightman교수의 생각에 동의하십니까? 아니면 반대이십니까? 우리는 이제 수많은 정보를 언제든지 접할수 있게 되어 그 어느 때 보다 더 활기찬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시지는 않습니까? 정말 그럴까요?
오래 전에 저희 장모님께서 함께 사실 때 장모님을 위해서 한국 TV방송을 시청했습니다. 저녁 식사 후에는 꼭 한 프로그램씩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TV방송을 시청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재미가 없어졌습니다. 콤퓨터 때문에…. 더 재미있는 것을 마음껏 찾을수 있게 되었으니 웬만한 것으로는 전에 느꼈던 감흥을 모두 잃게 된 것입니다. ‘It is numb.’ 한편 이런 현상은 그래도 이해가 됩니다.
더 심각한 현상을 Zengotita라는 학자는 9/11을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9/11 후에 TV를 통해서 비참한 장면이 전 세계적으로 보도 되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비참한 장면을 보면서 사람들은 마음이 움직였다고 합니다. 아니 9/11의 공헌은 비참한 장면을 보면서 그동안 굳어져 있던 마음이 처음으로 아픔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전 세계인들이…. 그러면 좋은 현상이죠….
그런데 그의 분석은 거기서 머무르지 않습니다. 9/11 후 비참한 장면을 보면서 아픔을 느끼게 된 사람들이 그러한 비슷한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장면을 보면서 계속 아픔을 느낍니다. 그런데 그것도 결국은 타성화가 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아픔을 느낍니다. 또 느낍니다. 어느덧 습관적으로 느끼고 만다는 것입니다. 느끼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무감각해졌다는 것입니다. 마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전혀 돕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현대인들의 모습니다.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많은 정보를 얻으려고 애쓰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사진을 본 결과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손가락뿐 아니라 삶 전체가 말합니다. ‘It is numb.’
사실 올해 저희 표어를 ‘섬기는 공동체’로 삼았는데 어떻게 보면 우리도 이미 numb해져 있지는 않은지요? 그래서 더 이상 어떤 이웃의 아픈 이야기를 들어도 마음은 아픈데 몸은 마비가 되어 있지는 않은지요?
이러한 우리들에게 주님은 어떤 말씀을 주실까요? “직장을 바꿔라.” “콤퓨터를 멀리 해라.”
오늘의 본문 말씀을 들려주시지 않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은 시편 110편 말씀입니다. 사실 이 시편 말씀이 어느 시편 보다 신약에 제일 많이 인용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믿음의 선배들이 제일 좋아했던 시편 말씀입니다.
우리들의 믿음의 선배들 특히 초대교회 교부들 시대는 어떻게 보면 기독교인들은 아주 소수였던 시대입니다. 그리고 로마의 무지무지한 권력 아래 늘 위기 가운데 살아갈수 밖에 없던 시대였습니다. 그들의 삶은 매일 매일이 풍전등화. 바람 앞에 등불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떤 시편을 제일 좋아했어야 합니까? 여러분 머리에 시편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시편이 시편 23편 아닙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곧 현대 신앙인들에게 제일 좋아하는 시편을 고르라고 한다면 거의 많은 분들이 시편 23편을 고르실줄 압니다. 우리도 늘 풍전등화를 느끼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보다 훨씬 약자로 살던 초대교회 선배들은 시편 23편보다 110편을 더 좋아했습니다. 사실 신약에는 23편은 한 번도 인용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왜 110편을 그토록 믿음의 선배들이 좋아했을까요? 1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곧 그리스도께 하시는 말씀으로 시편은 시작됩니다. 이 시편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전체 주제입니다.
온 세계를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앞으로 그리스도를 통해 놀라운 구원을 이루시는 우주적 계획을 갖고 계신 것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최고의 권위를 주시고 계신 것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우주적 구원의 계획에 다윗 자신을 살짝 포함시킵니다. 어떻게…?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냥 ‘그리스도에게 말씀하시기를’이라고 해도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사실 시편 23편에는 ‘나’라는 1인칭이 14번 나옵니다. 곧 시편 23편은 개인의 기도 곧 ‘나의 기도문’입니다. 반면 110편에는 단 한 번 나옵니다. 그러나 단 한 번 나오는 이 표현을 통해 다윗은 스스로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에 참여하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주’에게 위대한 역사를 맡기신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은근히 royal family에 포함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 영국은 Harry 왕자 부부가 더 이상 왕실과의 관계를 끊게 된 이야기로 온 나라가 요란한 것 같습니다. 그처럼 왕자 한 사람이 나라를 뒤흔들어 놓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윗은 자기가 온 세계를 뒤흔드는 자인 것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내 주’께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 계신 분이니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다윗이 ‘내 주’라고 표현한 더 큰 이유가 있습니다. 다윗은 당신이 주님을 ‘내 주’라고 표현하였듯이 모든 사람들에게 이 고백을 할수 있는 길을 열어 놓은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처럼 “내 주”라고 고백하여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에 참여하게 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인류 역사를 뒤집어 놓을수 있음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런 고백을 하는 개개인이 위대한데 이런 고백을 하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는 얼마나 위대하겠습니까? 곧 이 고백을 하는 사람들이 한 위대한 공동체가 되어가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공동체는 하나님의 우주적 구원의 계획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우주적 계획에 어떻게 동참하나요? 2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규를 내보내시리니 주는 원수들 중에서 다스리소서.”
하나님께서 주님께 모든 권능을 주실 것이라는 확신 가운데서 이 위대한 공동체는 주님을 응원합니다. 마음껏 원수들을 다스리시라고…. 주님을 응원함으로 세상을 뒤흔드는 역사에 동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공동체의 기도가 됩니다. 우리의 기도가 됩니다.
곧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힘들고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기도입니다. 공동체의 기도, 함께 우리의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주는 원수들 중에서 다스리소서.”
말씀드린대로 시편 23편은 개인의 기도입니다. 반면 110편은 공동체의 기도이고 우리의 기도입니다. 개인의 기도는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로 이어집니다.
반면 우리의 기도는 “주는 원수들 중에 다스리소서” 고백합니다. 우리의 기도와 함께 놀라운 장면이 펼쳐집니다. 3절 말씀입니다.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수많은 주의 백성들이 주님께 나아갑니다. 그 중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구름떼 처럼 주님 앞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특별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라고 표현한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새벽 이슬은 매일 새롭게 온 천지를 감싸지 않습니까? 곧 매일 새로운 청년들이 새로운 아름다움을 가지고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역사를 새롭게 이어갈 청년들이 주님의 나타나심을 환영할 것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의 놀라운 발전을 보고 있는 다윗의 비전을 느낄수 있습니다. 곧 3세대로 이어지면서 주님께서 주관하시는 인류 역사의 발전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 혼자 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지은 공동체의 기도 곧 ‘우리의 기도’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함께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새벽 이슬 같은 청년들을 보는 우리의 기도를 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어떨까요? 우선 부러운 마음이 들줄 압니다. 새벽 이슬 같은 청년이 되고 싶은 마음이 당연히 들겠죠? 그러면 두번째로 질문이 떠오를줄 압니다. 새벽 이슬 같은 청년은 나이가 젊어야만 하는가?
저는 이에 대한 해답은 조금 전에 본 과테말라 단기 선교단 비디오를 보면서 얻게 되었습니다. 그 비디오를 보면서 무엇을 느끼셨습니까? 저는 주중에 먼저 받아 보았는데 제가 느낀 것은 한 마디로 ‘젊다’였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펼쳐질 하나님의 사역을 기대하는 마음이 용솟음쳐 올라왔습니다. 선교단원들의 나이에 관계 없이 모두 새벽 이슬 같은 청년의 정기를 갖고 있는 모습입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다윗도 새벽 이슬 같은 위대한 공동체를 보면서 이러한 감격을 안고 이 시를 써내려가고 있었으리라 봅니다. 그 위대한 공동체는 세상의 나이와 관계 없이 이루어졌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는 새벽 이슬 같은 청년의 정기를 소유한 자가 될수 있을까요? 먼저 우리의 기도에 동참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줄 압니다. 우리의 기도에 동참하는 자들은 놀라운 주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4, 5절 말씀입니다.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를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주의 오른쪽에 계신 주께서 그의 노하시는 날에 왕들을 쳐서 깨뜨리실 것이다.”
한 마디로 주님께서 제사장이 되어 십자가로서 승리하실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끝으로 승리자 주님의 모습을 다윗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7절 말씀입니다.
“길 가의 시냇물을 마시므로 그의 머리를 드시리로다.”
곧 길 가의 시냇물을 마시고 머리를 드는 멋진 사슴의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이 분이 바로 다윗의 주님이시고 우리들의 믿음의 선배들의 주님이시고 바로 우리들의 주님이십니다. 섬김의 왕이시고 섬김의 제사장 되시는 주님께서 십자가로 승리하신 후 곧 시냇물을 마신 후 머리를 드십니다.
그러면 이 시를 읽으며 기도에 동참하는 사람들의 뇌리에 머리를 드는 멋진 사슴의 모습은 어떻게 이어질까요? 머리만 들고 서 있을까요? 잠시 머리를 들더니 그 사슴은 어디론가 훌쩍 훌쩍 뛰어 가지 않을까요?
하나님으로부터 온갖 권세를 받으시고 왕권과 제사장권까지 다 받으신 주님께서 사슴처럼 어디론가 훌쩍 훌쩍 뛰어 가고 계신 것입니다. 어디로…? 세상을 점령하기 위하여…? 당신을 필요로 하는 곳을 향해 훌쩍 훌쩍 뛰어 가시는 섬기는 자의 모습으로 보이지 않을까요?
그러면 어디론가 훌쩍 훌쩍 뛰어 가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는 자들은 어떻게 될까요? 함께 뛰어 가지 않을까요? 각자를 필요로 하는 곳을 향해 섬기는 자가 되어서….
제가 온 세상이 마비 증상이 오고 있는 이 때 이 시편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것이라고 말씀드린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우리는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해 동분서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어느새 우리는 여기 저기 마비 증세가 찾아 오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아파하는 사람을 봐도 마음으로는 아파하는 것 같지만 더 이상 나가지 못합니다. 마비가 와 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것을 아시고 성령께서는 다윗을 통하여 이 놀라운 시를 짓게 하셨고 이를 공동체의 시로 삼게 하신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이 놀라운 시편을 이스라엘 민족은 아니 우리들의 믿음의 선배들은 공동체의 기도로 삼고 늘 함께 기도해 온 것입니다.
그들은 매번 기도를 마치면서 사슴처럼 시냇물을 마시고 머리를 높이드시는 주님의 모습을 바라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아니 믿음의 선배들은 상상합니다. 주님은 힘차게 역사의 주인공이 되어서 새벽 이슬 같은 청년들을 이끌고 영원한 나라 건설을 향하여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른 제사장이 되어 역사의 한 복판으로 뛰어 들어 가셨던 것입니다. 섬기시기 위하여….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는 자들은 삶에서 결코 마비되는 것을 느끼지 못합니다. 도리어 이들은 사슴과 같이 사뿐 사뿐 역사의 한 복판에서 춤을 추는 자들입니다. 곧 역사를 비판만 하는 자들이 아니라 역사에 리듬을 마련해 주는 자들입니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우리의 기도’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를 드리는 자들은 매일 매일 춤을 추되 그 춤은 세상 문화를 바꾸게 합니다. 그 춤은 세상을 섬기게 합니다. 그 춤을 추는 자들이야말로 ‘섬기는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를 두 세 사람이 함께 모여 드릴 때 비로서 위대한 ‘섬기는 공동체’는 탄생되는 것입니다.
‘어린 왕자’의 저자 생떽쥐베리가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두 사람이 서로 마주보는 것이 아니고 두 사람이 함께 같은 방향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시냇물을 마시고 머리를 드신 주님을 볼 때 우리는 저절로 같은 방향을 바라 보게 되지 않을까요? 이것이 진정한 섬기는 공동체의 모습이지 않을까요? 함께 멋진 사슴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서 계신 주님을 바라 보십시다.
주님은 2020년도 우리들 앞에서 어디론가 훌쩍 훌쩍 뛰어 가십니다. 그 주님을 따라 훌쩍 훌쩍 뛰어 가십시다. 주님을 바라 보는 자들은 결코 마비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새벽 이슬과 같은 청년들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소설가 최인호의 묵상이야기 책에서 ‘아침 이슬’이란 글을 읽어 보았습니다. 작자미상의 ‘아침 이슬’이란 글을 소개합니다. 마지막 부분만 읽어 드립니다.
“아이야, 사랑하는 마음에 태양을 받아들여 습한 땅에다 사랑을 잉태시키는 미소한 이슬방울처럼 되어라. 겸손한 자태로 한껏 세상의 아름다움을 반영하는 이슬처럼 되어라. 태양의 열기와 빛을 흡수하여라. 이슬방울에게 존재를 부여하는 것이 바로 태양이기 때문이다.”
태양으로 인해 이슬방울이 빛을 발하듯이, 우리도 태양이자 사슴이신 주님을 기도 중에 바라 보노라면 놀라운 빛을 발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의 기도 안에 주님이 찾아 오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놀라운 빛을 발하는 섬기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함께 공동체의 고백을 하십시다. 우리의 기도를 드리십시다.
“주는 원수들 중에 다스리소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길 가의 시냇물을 마시므로 그의 머리를 드시리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