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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약할 때에…” 고린도후서 13:3-9 (4/19/2020)

“우리가 약할 때에…” ………………………………………………………………………………..윤경문 목사

저희가 Covid-19 때문에, 서로 만나지는 못하지만 많은 교우님들이 안부 메시지들을 주고 받으며, 아울러 좋은 이야기들을 함께 나누고 계신 줄 압니다. 얼마전 한 교우님께 보내주신 이야기 하나가 저의 마음에 울림을 주었습니다. 이미 많은 분들이 아실줄 압니다. 93세된 한 프랑스 할아버지가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리셨는데, 24시간 산소호흡기로 치료받고 나은 후에 의사가 보여준 치료비를 보시고 눈믈을 흘립니다. 너무 걱정말라고 달래려는 의사에게 이분은 말하죠. “저는 지불하게 될 금액이 걱정되서가 아니라, 받은 산소 금액이 50만 프랑이나 된다는 사실 때문에 눈물이 난 것입니다.” 이분은 93년간 하나님께서 주신 산소를 마시면서 한번도 돈을 지불한 적이 없는데, 그동안 얼마나 하나님한테 많은 빚을졌는가를  이 순간 깨달으셨기에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사실, 우리 모두도 이처럼 살아가면서, 주어진 것들의 귀한 가치를 깨닫지 못한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과 같은 어려운 시기를 겪을대, 오히려 새롭게 그동안 우리들에게 거저 주어진던 것들에 대한 가치를 새삼 깨닫습니다.

지난주일 부활절을 맞았습니다. 부활하셔서 우리르 찾아오신 주님을 믿는, 이 부활 신앙은 사실, 우리 믿는 자들에게는 마치 공기와 같은 것입니다. 다시 사신 주님께서 우리가 숨쉴 수 있도록 부어주고 계신 공기말입니다. 만일, 이 주님의 부활의 기쁨과 승리가 없었다면, 우리의 신앙은 힘을 잃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계시기에, 오늘도 우리가 주님과 함께 동행하고, 그분으로 인해 희망을 얻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그런 부활의 주님을 매일 만나고, 그분과 함께 숨쉬며 생명력있는 삶을 계속 살아낼 수 있을까요? 우리 모두가 부활의 신앙을 일상에서 어떻게 실천하며, 부활에 참여함으로, 부활의 공동체를 만들어갈 수 있을까요?

오늘 읽은 고린도후서 13장의 사도 바울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다시 부활의 삶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사도바울은 주님의 부활에 근거한 신앙을 강조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가 부활을 말씀할때 하나의 특징이 있습니다. 부활만 언급하시지 않고,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아울러, 약함과 강함이란 것이 같이 연결되어 나옵니다. 오늘 4절 말씀처럼.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그에게 있어 십자가와 부활은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이고, 약함과 강함이란 상반된 개념이 따로 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사도 바울이 체험하고 있는 그리스도는 바로, 십자가에서 연약한 모습 그대로를 받으들이시고,  바로 그곳에서 강한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부활의 영광을 누리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에게 있어, 여기, 주님의 약함, 강함은 십자가와 부활이 연결되어 있고, 새로운 의미를 얻습니다. 약함은 주님이 거부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상에서 스스로 안고 계신 약함인데,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곳에 강함이 드러났습니다. 여기 ‘강함’이란 말의 희랍어는 ‘뒤마니스’입니다. 이 말은dynamic란 말의 어원입니다. 어떤 느낌을 주는 말입니까? 이 능력은 그냥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폭팔적인 힘을 가진 능력, 바로  주님의 부활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능력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께서는 이렇게 폭팔적인 부활의 주님의 능력을 믿었기에, 그는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어떤 비난과 수난을 겪던지, 그 하나님의 능력안에 있음을 확신했습니다. 사실, 이 고린도후서를 쓸때, 고린도교회에서 많은 문제들이 발생했고, 사도 바울을 실망시키고, 그에게  비난과 오해가 쏟아지고 있었때입니다. 어쩌면, 그를 대적하는 자들 앞에서, 그는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내기 보다는 감추고 자신의 강한 모습을 내 보이고 싶었을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오히려 담대하게 자신의 약함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4절 후반절입니다.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그는 십자가에서 약하심을 감당하시고, 부활의 그 폭팔적인 능력을 보이신 주님이 이제 그와 함께 계시기에, 담대히 자신의 약함을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앞장인 12장 9절에서는 이렇게까지 말합니다.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가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은, 살아계신 주님 안에 함께 할때,   바로 자신의 약한 그 자리가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곳임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런 확인을 통해서 사도바울께서는 자신의 연약함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됩니다.

매순간 그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목숨까지도위협받는 상황을 만나고, 그의 육체적, 외적 조건들속에서 때로는 심한 고통의 순간을 맞지만, 그는 그럴 때에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연약하여지셨던 순간을…아울러,  바로 그곳에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난 곳임을  깨닫고는 자신의 연약함을 보는 시각이 변화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약해졌을때, 그 약함은  곧 하나님의 능력을 만나는 곳이라는 것으로 말입니다.

스위스 사람인 알베르토 자코메티란 조각가가 있습니다. 이 조각가는 20세기 초에 프랑스에서 활동했던 작가입니다. 어느날, 조각가로서의 길을 가려고 결심하고 존경하던 조각가에게 배우려고 함께 여행을 떠났다가 얼마 안되어서 그의  스승의 죽음을 맞습니다.  1차 대전 전쟁도  경험하며, 인간의 삶이 얼마나 연약한지( fragile)를 깨달은 자코메티는 그후 자신의 조각에  인간의 연악함이 철저히 베어있는 아주 독특한 모습의 인물상들을 만들어냅니다.

   

유명한 작품중 하나는 바로, 이 걷는 사람(Walking Man)이라는 것입니다.철사처렴 길쭉하게 늘어난 팔과 다리, 살은 하나도 없는 앙상한 인간의 모습을 표현하는 작품들입니다. 인간들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속에서 위태로움에 놓여있는  나약한 존재들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의 작품들의 얼굴에는 심각한, 그러나 철저히 현실을 직시하고 있는 모습이 서려있곤 합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연약함을 드러내는 길고 앙상한 몸이지만, 그는 이 연약한 몸으로 누워있지 않습니다. 앞을 향하여 한발을 내딧으려 하고 있습니다.

작가인 자코메티는 말합니다 “나는 살아있는 인간들이 부서지기 쉽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매 순간 아주 많은 힘이 필요하다. 서 있기 위해서는 우리는 매순간 넘어질 위기에 있다.”

서 있을 때에도 위기를 맞고 있는 인간의 모습, 그런데 바로 그때, 한발을 앞으로 내딪을 때 많은 힘이 필요함을 느끼는 작가의 고백입니다.

만일 사도바울이 20세기에 오셔서 이 작가를 만났다면, 어떤 이야기를 해주셨을까요?

인간들 모두에게 매 순간 필요한 그 힘, 그 힘을 얻을 수 있는 곳이 있다고 말씀해 주시 않으실까요? 바로, 그가 확신했던 주님의 연약한 자리에서 드러난 부활의 능력, 그 안에서 그가 필요한 힘을 얻을 수 있음을요…, 그 안에서 우리는 그 힘을 발견하고도 남을 수 있다고요.

어쩌면 이 많은힘을 필요로 하는 연약한 사람들의 모습이,  바로, 당시 초대교회에서 많은 문제들 안에서 복음의 능력을 상실하고, 부활하신 능력의 주님에 대한 신앙을 잃어가려 했던 신앙인들의 모습이 아닐까요?  또한, 오늘 이 불확실한 사태 속에 살아가고 있는  연약한 인간들의 모습이 아닐까요? 우리 자체는 너무나 앙상하고, 나약한 존재이지만, 한발짝 내딧을때에 바로 부활의 능력을 필요로하는 자들말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실 줄 압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5절)” 부활하신 주님께서 너희 안에, 너희와 함께 계시고 있음을 그들에게 일깨우실 것입니다.  만일 믿는 자들이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라고까지 강하게 말씀하시면서요.

교우 여러분, 만일, 누구나 자신들 안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다는 확신을 갖는다면, 어떤 연약함에 처한 상황에서도 담대하게 한발짝 앞으로 나아가고도 남음이 있지 않을까요? 그 연약함의 자리에 폭발력을 지닌 하나님의 능력, 부활의 능력이 함께 하심을 믿는다면요.

사도바울을 말씀합니다. 9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가 강한 것을 기뻐하고 또 이것을 위하여 구하니 곧 너희가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 여기 온전하게 되기를 구하신다고 했는데, 온전함이란 원어는 ‘회복’이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께서는 자신이 약함 가운데 있음으로서, 믿는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의 능력을 통해 그 안에서 강하게 되어, 회복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빛에서 연약함을 새롭게 보시고, 그것이 곧 강함이 됨을 확신하셨습니다.

교우 여러분,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가 연약할 때, 오히려, 그때가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때라는 이 사실, 이것이 오늘 부활신앙을 살아가는 모든 자들에게 필요한 말씀이 아닐까요?

어떤 어려움과 불확실한 상황일지라도, 부활의 신앙으로 새로운 삶을 향해 한발짝 내 딧어야 하는 우리들에게 말입니다.

우리 모두는 요즘 그 어느때보다 우리들의 연약함을 느끼는 때를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구해야 할것은 사도바울이 구하셨던 것처럼, 십자가의 연약함가운데서 드러나는 부활의 능력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그곳에서 부활의 주님이 주시는 힘을 찾아야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푹발적인 능력이 드러난 바로 그곳에서 한발짝 앞으로 나갈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그리고 다른 믿는자들과 함께 회복으로 나아갈 수 있은 힘을요.

[일상, 부활을 살다]라는 책에서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부활의 ‘실천’이란 표현을 하십니다. 부활은 이를 믿는 자들로 하여금, 참여케하고 실천하게 요구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이분은 아주 중요한 한가지를 덧붙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부활은 우리를 다른 사람과 엮어 놓는다”

여러분, 왜, 예수님의 부활이 다른 사람과 우리를 엮어 놓을까요?

부활의 주님을 만났던, 그 안에서 부활의 능력을 본 사도 바울께서는 그냥 자신의 믿음에서 머물르지 않으셨습니다. 많은 이들에게 주님의 복음의 전하고, 신앙을 상실해가고 있는 자들의 회복시켜시기 위해 자신 스스로 주님과 같이 연약함에 거하셨습니다. 그가 약함 가운데 강함으로 기쁨을 누리는 자들이 되어, 온전하게 회복되어 갈 것을 고대하며,  그들로 하여금 부활의 공동체를 만들어가길 원하셨습니다.  마침내, 초대교회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난 부활 신앙을 중심으로 성령 안에서 서로 관계를 맺어가게 되고 그곳에 부활의 공동체가 세워져 갔습니다.  그후,  그리스도 인들의 삶은 바로 부활의 주님의 능력에 응답하는 삶이 되었고,  바로 그 곳에서 성령 안에서, 부활의 주님과 함께 삶을 누리어 가게 되었죠.

이러한 부활을 증거하는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사도 바울께서는 그리스도처럼 스스로 약함 가운데 거하며, 다른 이들이 부활의 주님 안에서 강하게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의 강한 것을 기뻐하고’ 말씀하시면서요.

교우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주님의 약함 가운데, 부활의 능력을 누리게 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이 부활의 신앙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묶여진 사람들입니다. 동시에, 부활의 능력을 증거하는 부활의 공동체로 엮겨진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다시 꼭 기억해야 하는 것은 부활의 주님께서 성령으로 우리를 그의 능력 안에서 하나되게 엮어 놓고 계시고, 함께 부활의 능력을 드러내야 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께서 확신하셨듯이, 그리스도의 연약함 안에서, 또, 그 부활의 능력 안에서 우리 모두는 함께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오늘 우리는 과연 그 폭발적인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을 어떻게 느끼며, 이 세상에 드러낼 수 있을까요?

뉴욕 타임지에서 얼마전에 요즘 Covid-19으로 인해 고립되어 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한 아티스트의 프로젝트를 소개했습니다. LA에서 주로 활동하는 Liza Lou란 아티스트입니다. 그분은 자신의 instagram을 통해서, [Apartogether]란  A communal Art Project를 만들어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제목이 참 인상적입니다 [Apart Together].  “떨어져 있지만, 함께 한다”라는 뜻인데, 이 시기에 참 적절한 제목이라 제 눈길을 끌었습니다. 아티스트들이 서로 고립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social distancing을 하느라 멀리 떨어져서 낙담하고 있는 분들에게 각자 자기 집에 가지고 있는 것들을 가지고 art work을 할 수 잇게 격려합니다 또 사진을 함께 나눔으로써 계속 art work을 해나가도록 돕고 있습니다. 자신이 어린 시절에 가지고 있었던 comfort blanket을 보며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합니다. 누군가에게 위로를 느낄 수 있는 작품들을 만들어가자고…내가 현재 가지고 있는 것들로요

여러분, 우리가 꼭 이런 art work을 해야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사실, 부활의 신앙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 부활의 능력을 이 세상에 들어내며 살아야 하는 그리스도인 모두는, 위로와 소망을 전해주는 일들로, art work을 해나가야 하는 주님의 아티스트들이 아닐까요?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와 아름다움을 이 세상에 표현해 내야하는 아티스트들이 아닙니까?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와 부활을 능력을 세상에 표현하며, 이를 통해 부활의 공동체를 만들어가고, 이를 통해 절망과 고립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전하는 아티스트들 말입니다. 떨어져 있지만 주님 안에서 함께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도록이요.

우리가 그 주님 안에서 강한 능력을 찾으며, 바로,  그 약함 가운데 강함을 드러내는 그런 부활의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주님의 부활의 능력을 함께 거한다면, 그곳에서 하나님의 다이나마이트 같은 폭팔적인 능력을 품어내는 그런 자들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교우 여러분, 오랫동안 서로가 떨어져 얼굴도 잘 보지 못하지만, 우리는 부활의 주님에 거함으로써 주님과 함께, 부활의 사람들과 함께하고 있음을 기억하십시다. 하나님의 능력이 폭발적으로 드러났던 부활의 능력의 주님 안에 우리가 함께 있음을 기억하십시다.

동시에,  그 십자가의 주님의 연악하심 안에서 함께하고, 또, 부활의 능력 안에서 주님이 우리와 함게 계심을 기억하십시다. 보이지 않지만, 공기처럼, 여러분들 안에 부활의 능력으로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 주님의 능력에 의지하고, 그분으로 인해 호흡하고, 그곳에서 힘을 한발짝 앞으로 내딧을 힘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그곳에서 흔들리던 우리들의 삶의 온전한 회복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부활의 공동체의 일원으로 서로에게 위로를 전하며, 사랑의 마음을 전하십시다. 그때, 우리 안에서 약할 때에  주님 안에서 강하게 되어지는 부활의 능력의 삶을 이 세상에 드러내는 부활의 사람들이 되어 갈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그런 부활의 사람들을 바라며,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부활의 능력 안에서 함께함을 확신하며, 고린도후서의 끝에 이렇게 고린도교인들에게 문안합니다.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고후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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