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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돌아보아” 히브리서 10:19-25 (02/07/2021)

자크 라캉이라는 학자는 거울을 가지고 재미있는 실험을 했습니다. 사람은 생후 6개월에서 18개월 사이에 처음으로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인지하게 된다고 합니다. 어른의 품에 안긴 채 거울 앞에 선 아이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자마자 자신을 안고 있는 어른을 향해 얼굴을 돌리고 “이게 나예요? 정말요?”라는 눈빛을 보냅니다. 그러면 어른은 아이에게 눈빛으로 때로는 말로 답하며 아이를 안심시킵니다.

“그래 바로 너란다.”

이것은 아이로서는 위대한 발견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신뢰할수 있게 되면서 내적 안정을 찾고 스스로를 인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유전적으로 인간과 가장 가까운 동물로 손꼽히는 마카크 원숭이에게도 비슷한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거울을 발견한 원숭이는 빠르게 거울을 이용하는 지적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등이나 엉덩이처럼 거울이 아니면 볼 수 없는 부위를 거울에 비춰 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거울 앞에 선 원숭이가 다른 원숭이들을 향해 얼굴을 돌리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른 원숭이에게 눈빛으로 질문을 던지지도 않았습니다.

원숭이는 인간처럼 다른 존재에게 의존하며 자신을 발달시키는 동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면 인간은 다른 사람 없이는 인간성을 키우지 못하고 자기 신뢰를 갖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사가 다 그렇지만 교회도 언제나 큰 잇슈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요즘 교회는 팬데믹이 큰 잇슈가 되어 있구요. 어떻게 보면 교회사 가운데 큰 위기 중에 손꼽히는 하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함께 만나지 못하며 신앙생활하는 이 때 오늘 제직 임직식을 드리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어떤 말씀을 주실까요?

 

오늘 본문 말씀은 세 가지 내용이 담겨 있는데 영어 성경을 보면 쉽게 알수 있습니다.

22절에 나옵니다. “Let us draw near God” (“우리 함께 하나님께 가까이 가자.”)

23절에 “Let us hold fast to the confession of our hope.” (우리 함께 소망의 고백을 굳게 붙잡자.)

24, 25절에 “Let us consider one another.” (우리 서로 돌아 보자.)

 

한편 유진 피터슨이 성경을 의역해서 펴낸 Message라는 책에서 22-25절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Let’s do it.”

 

팬데믹 가운데 임직식을 거행하는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주시고 계십니다.

“Let’s do it.”

 

그러면 한 가지 씩 차례로 살펴 볼까요? 먼저 히브리서 기자는 초대교회 교인들에게 권고합니다. “우리 함께 하나님께 가까이 가자.”

이것을 이처럼 강조한 이유가 있습니다. 원래 하나님께 가까이 갈수 있는 길은 제사장을 통해서 였습니다. 제사장에게 소나 양을 가져가면 제사장이 그들의 피를 흘린 후에 대신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21절 말씀입니다.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바로 주님께서 대신 피를 흘리시고 큰 제사장이 되셨습니다. 더 이상 이 땅의 제사장을 통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전에는 제사장의 손에서 소와 양이 피 흘리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께 가까이 간다는 확신을 가졌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그런데도 께름직합니다. “이래도 되나…?”

이런 초대교인들에게 히브리서 기자는 강하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 함께 하나님께 가까이 가자.”

 

존 모피트의 ‘어떤 것을 알고자 한다면’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일부만 소개해 드립니다.

 

어떤 것을 알고자 한다면

정말로 그것을 알려고 한다면

오랫동안 바라보아야 한다.

초록을 보면서

“이 숲에서 봄을 보았다”라고 말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네가 바라보는 그 것이 되어야 한다.

………

시간을 충분히 들여서

그 잎사귀들에서 흘러나오는

평화로움을 만질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해주는 시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은 하나님을 오랫동안 바라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오랫동안 바라 보는 것은 주님을 오랫동안 바라 보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교우님들에게 더 이상 소와 양의 피를 바라보지 말고 십자가의 주님을 오랫동안 바라보며 하나님께 가까이 가자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 이 때 하나님은 우리의 거울이 되지 않을까요?

 

한편 히브리서 기자는 두번째 거울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23절 말씀입니다.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그런데 원어에는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Let us hold fast to the confession of our hope.” (우리 함께 소망의 고백을 굳게 붙잡자.)입니다.

곧 두번째 거울은 우리들의 소망이 담긴 고백입니다. 사실 저희가 주일마다 신앙고백을 하는데 교리를 고백한다기 보다는 우리의 믿는 소망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물론 믿는 소망이 곧 교리가 되곤 하지만….

그런데 그 소망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소망입니다. 궁극적으로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한 소망입니다. 그리고 이 소망을 초대교인들은 늘 고백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하던 그 고백을 굳게 붙잡자고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백을 어떻게 붙잡습니까?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자꾸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소망을 자꾸 고백하면 그 소망의 고백이 우리의 거울이 되어 갑니다. 우리는 어떤 소망을 고백하느냐에 따라 우리들의 얼굴이 변하는 것입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고백하면 우리의 얼굴도 그처럼 변하지 않을까요?

 

지난 주일 오후에는 신임서리집사 교육 시간을 가졌습니다. 첫 소개 시간에 제일 좋아하는 노래를 하나씩 소개하면서 시작했습니다. 가요도 나왔고 복음송가도 나왔고 물론 찬송가도 나왔습니다. 제일 마지막에는 제가 요즘 제일 좋아하는 노래를 소개했습니다.

“르호봇의 노래.”

매일 아침 콤퓨터에 앉으면 서너 번 듣습니다. 그러면 힘이 절로 납니다. 여러분께도 권합니다.

“르호봇.” “넓다.”

요즘 저의 아침마다 저를 보게 하는 두번째 거울은 어느덧 “르호봇의 노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얼마전 어느 교우님이 화상으로 보는 제 얼굴이 무척 좋아 보인다고 하면서 아마 ‘르호봇 이야기’ 덕분인 것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저도 그런 것 같다고 대답했구요. 우리가 붙드는 고백이 우리의 얼굴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 가지 거울이 더 필요한 것 같습니다. 24, 25절 말씀입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처음 소개해드린 거울실험을 통해 알수 있는 것은 사람은 사람이라는 거울이 필요합니다. 누군가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그 때 자아가 바로 섭니다. 자기의 능력이 십분 발휘됩니다.

 

요즘 많은 분들이 코로나 백신을 맞으신줄 압니다. 의료진부터 시작해서 최근에는 75세 이상 어르신들께서도 맞으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얼마전에 이 백신의 원리를 개발한 헝거리에서 온 이민자 Katalin Kariko박사님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그는 UPenn에서 쫓겨나다시피 하고는 N/Biotech회사로 이전했는데 그 때 UPenn에서는 그 회사는 웹싸이트도 없는 회사라고 비웃었다고 합니다. 하여튼 이 말씀을 드리려는 것은 아니고 Kariko박사님이 혼자 개발한 것은 아닙니다. BU출신 Drew Weissman박사를 UPenn에서 만나서 두 분이서 개발한 것입니다. 혼자서는 할수 있었을까요?

 

이들은 서로 서로 거울이 된 것입니다. UPenn의 다른 과학자들은 믿지 않아도 두 분은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확인하고 서로 믿음을 더해 간 것입니다.

이처럼 신앙생활도 혼자 할수 없습니다. 서로 상대방의 멋진 얼굴을 보여주는 거울이 되어야 합니다. 이웃의 멋진 얼굴을 보여주며 함께 외치는 것입니다.

“You can do it. Let’s do it.”

 

하지만 요즘 팬데믹 기간 모일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모여야만 신앙생활을 할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이지 않으면서 모이고 모이면서 모이지 않아야 하는 새로운 헌신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릴수밖에 없습니다.

초대 교회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 혼자 나갈수 있다는 교리를 이용해서 모이기를 힘쓰지 않았습니다. 팬데믹 기간 이 같은 핑계를 갖게 할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이지 않으면서 모인다면 더 놀라운 역사가 이 팬데믹 기간 펼쳐지지 않을까요? 물론 더 많은 지혜와 수고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감사한 것은 작년에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 많은 분들의 수고로 모이지 않으면서 모일수 있었습니다. 곧 모일수는 없지만 여러 방법을 통해 예배와 교제를 나눌수 있었습니다. 수고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특히 11월말에는 쉐마의 밤 행사가 있었고 곧 이어 오아시스 뮤직 나이트 행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직회 성탄이브 행사로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행사들이 가능했던 이유를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두 세 사람이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인 것입니다. 그 결과 훌륭한 행사가 치뤄질수 있었습니다.

“Let’s do it.”

어쩌면 올해가 절호의 챤스입니다. 서로의 얼굴을 직접 보지는 못해도 줌이나 이멜, 서신들을 통해서 고개를 끄덕일수 있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세 가지 거울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십시다. 곧 하나님의 거울 앞에 가까이 서십시다. 그리고 우리의 소망의 고백의 거울 앞에 서십시다. 다시 오실 주님을 바라보며 ‘르호봇의 노래’를 부르십시다. 아울러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이십니다. 그리고 함께 복창하십시다.

“Let’s do it.”

이 때 올해 저희 교회 표어가 빛을 발하게 되지 않을까요?

“이 모든 것을 보라.”

이 모든 일을 보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올 한 해도 펼쳐질 것을 믿고 고백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서로 돌아 보아…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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