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의 유명한 알렉산더 대왕이 20세에 왕이 되어서 33세에 전쟁터에서 생애를 마감합니다. 이집트에서 인도까지 나라를 확장하다가 폭주와 과로로 인해 젊은 나이에 생애를 마감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는 바벨론에서 술에 취한채 정신을 잃었었는데 간신히 깨어났을 때 부하 장군들이 물었다고 합니다.
“후임자를 누구로 세우시겠습니까?”
“The strongest one.”
알렉산더 대왕다운 답변입니다. 그런데 그의 유언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다섯 나라로 갈라지는데 다섯 명의 장군이 나라를 쪼갠 것입니다. 다섯 명의 장군들은 스스로 strongest one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가장 강한 자를 후계자로 세우고 싶어했는데 우리 주님은 어떠하실까요?
주님의 후계자가 누구냐고 꼭 집어 말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래도 12사도라고 생각하면 무난하고 물론 사도바울까지 합하면 13사도가 됩니다. 그래도 그중 한 사람을 꼽는다면 명실공히 수제자로 알려진 사도 베드로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베드로가 지은 서신인데 본문 말씀을 통해 주님은 어떤 사람을 후계자로 삼으셨는지 알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본문 말씀을 살펴 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8절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표현입니다. 한 마디로 시간에 대해서 자유하시다는 표현인 것 같습니다. 물론 제 이 표현도 좀 철학적인 아니 애매한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알렉산더 대왕의 유언과 비교해서 이렇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주님은 시간에 강하신 분이십니다. 시간을 주물럭 주물럭 하실수 있는 분이시니 말입니다. 반면 알렉산더는 공간 안에서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공간 안에서 제일 강한 자를 후계자로 삼기를 원했습니다.
곧 참 신앙인은 공간 안에 강한 자가 아니라 시간 안에 강한 자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로마 군인들은 공간 안에 강한 자들이었습니다. 그 당시 전세계라는 공간을 점령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 안에 강한 자들은 아니었습니다. 결국 로마 제국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망한 것입니다.
반면 주님은 시간 안에 강한 자였습니다. 공간 안에 강한 로마군인들의 손에 십자가에 못박히셨지만 끝내 시간 안에 강한 자로서 최후 승리를 맛보신 것입니다.
시간 안에서 승리하신 주님을 바라보며 베드로는 정말로 멋진 표현을 지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
그러면 시간 안에서 강한 자들은 공간 안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요? 9절 말씀입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한 마디로 ‘인내’입니다. 이것이 시간 안에서 강하신 주님의 모습이고 또한 주님의 후계자들의 모습입니다. 주님께서 후계자로 삼고자 하는 자들의 필수 조건입니다.
공간 안에 강한 자들은 인내가 없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알렉산더 대왕입니다. 20살 때 왕이 되고 그리스에서 인도까지 국경을 넓혔으며 계속 영토를 확장하려다가 온갖 스트레스와 과로로 인해 33세에 요절하고만 것입니다. 그가 좀 인내할줄 알았더라면 시간을 갖고 천천히 정복했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지구 전체를 한 손에 넣을수도 있었겠죠….
반면 시간 안에 강한 자들은 인내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시간이 이긴다는 것을 아는 자들입니다. 주님께서 시간의 주체가 되신 것을 아는 자들입니다. 시간 안에 인내하는 자들이 이기는 것을 아는 자들입니다. 그러면 시간이 공간을 어떻게 이길까요? 10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마지막 때에 하늘과 땅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공간은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지금 시간이 공간보다 우위임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공간이 사라져도 시간은 그대로 흘러 갑니다.
지구의 종말이 왔다고 생각하십니다. 지구는 사라져도 시간은 그대로 흘러 가게 되어 있습니다.
반면 하나님께서 시간을 중단시켰다고 생각하십니다. 시간이 사라지는 순간 공간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간이 공간 보다 우위에 있습니다.
이러한 일이 마지막 때에 일어납니다. 주의 날에 일어납니다. 시간이 멈춤과 함께 공간은 사라집니다. 그런데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모든 일이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인간의 행위입니다. 행위라는 표현이 좀 무겁다면 인간의 이야기입니다. 공간은 사라지지만 그 안에서 인간들이 행한 자취는 남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행함은 시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주어진 공간에서 어떻게 시간을 사용했느냐가 바로 행함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사순절을 지키고 있습니다. 각자 주어진 공간 안에서 시간을 잘 사용하기 위해서 지키는 것입니다. 그동안 잘 못 행한 것을 회개하고 절제와 구제로 스스로 새로운 존재가 되어서 남은 일년 주님께 시간을 바치기 위해 지키는 것입니다.
곧 공간 안에서 strongest가 되기 위해 시간과 물질을 사용했던 우리의 모습을 깨닫고 시간 안에서 strongest 곧 주님 오실 때까지 인내하며 사는 성도가 될 것을 훈련하는 기간입니다.
이러한 자들에게 사도베드로는 계속 말씀합니다. 11절 말씀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공간은 시간 안에 있다가 사라집니다. 계속 남는 것은 우리들의 시간 안에서의 거룩한 행실이라는 것입니다. 거룩한 행실의 기본은 인내이구요. 곧 거룩한 행실은 인내를 통해 완성됩니다.
요즘 많은 분들이 코로나 백신도 맞으셨겠지만 코로나 검사도 받아 보신 분들이 많이 계실줄 압니다. 그런데 코로나 검사를 하는 약품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채취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1964년 지금부터 약 60년전에 Tom Brock이라는 미생물학 교수가 처음으로 Yellowstone 국립공원을 방문합니다. 제일 인상 깊었던 것은 온천이었습니다. 온천 한 가운데는 섭씨로 70-100도가 되어서 어떤 미생물도 살수 있을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궁금해서 귀가한 후 뜨거운 물에서 사는 미생물이 있는지 연구를 시작합니다. 다음 해 다시 Yellowstone공원으로 학생과 함께 찾아 왔습니다. 그가 알고 싶었던 것은 ‘이런 극한 상황에 어떤 생물체가 살수 있는가’ 였습니다.
Brock박사님과 학생은 섭씨 70도 이상에서 살고 있는 박테리아를 발견합니다. 이름을 ‘Thermus aquaticus’라고 붙입니다.
이 박테리아 안에 코로나 바이러스를 검색할수 있는 물체가 담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뜨거운 열에 파괴되지 않는 물체가 있는 박테리아였던 것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를 검색하려면 뜨겁게 하여야 하는데 다른 종류의 물체들은 다 뜨거운 곳에서는 파괴가 되기에 사용할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단지 이 용광로와 같은 Yellowstone온천과 같은 곳에만 이 박테리아가 살고 있고 이 박테리아는 수 천년을 기다렸다가 드디어 요즘 온 세상을 위해서 기여하게 된 것입니다. 그야말로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것을 증명하는 박테리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처럼 박테리아를 수천년 후 꽃피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광로에 잠시 있게 하는 것은 더 놀라운 뜻이 있지 않을까요?
사실 지금 베드로는 흩어진 나그네와 같은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이 나그네들은 모두 신앙으로 인해 핍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위로와 함께 격려의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뜨거운 용광로 가운데 지내고 있는 성도들에게 시간은 지나가고 사라지는 것 같지만 이 시간 안에서 산 그 삶은 영원히 남는다고 일깨워 주고 있는 것입니다. 12, 13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용광로와 같은 세상에서 거룩한 행실을 쌓아가며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자고 격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다림의 시간을 거룩한 행실로 채워가자는 것입니다. 물론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 보면서….
우리들의 거룩한 생활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언젠가 빛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사순절 둘째 주일이자 남선교회 헌신 예배로 드립니다. 작년도에 3월중에 팬데믹이 시작되었는데 다행히 남선교회는 팬데믹 전에 헌신예배를 드릴수 있었습니다.
그 날 제가 남선교회 헌신 예배시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나눈 것이 기억납니다. 남선교회원들의 등을 보면 가슴이 찡해 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민자 가정의 가장이 되어서 살 때 오는 온갖 고뇌가 등에 그대로 써 있는 것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지난 일년간은 더 했을줄 압니다. 그런데 일개 박테리아도 당신의 뜻 가운데서 사용하시는 하나님께서 지난 일년간의 수고와 땀을 주님은 하나도 잊지 않으실줄 압니다. 이에 우리도 응답해야 하지 않을까요? 주님의 우리를 위한 수고를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요?
남은 사순절 우리의 작은 행위를 잊지 않고 기억해 주시는 주님 앞에서 우리도 주님의 우리를 위한 수고를 기억하며 감사의 시간을 가지십시다. 그리고 묵묵히 박테리아처럼 세상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존재도 없는 자들이지만 주님 앞에서 귀한 자로서 인내의 삶을 살아 가십시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습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지난주 어느날 타운 산책을 나가려는데 그 날이 쓰레기차가 오는 날이었습니다. 눈이 아직 쌓여 있어서 제 차 뒤에 쓰레기통이 놓여 있었고 아직 쓰레기차가 오지 않았을 때입니다. 차를 뒤로 빼다가 쓰레기통을 치을 것 같아서 쓰레기통을 옆으로 치우고 차를 타고 타운에 가서 늘 걷는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어느집 근처를 걷고 있는데 집주인이 차를 백엎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은 차 뒤에 쓰레기통이 있는 것을 모르는듯 천천히 빼고 있었습니다. 제가 쓰레기통을 살짝 치워 주었습니다. 그리고 운전석을 보았는데 전혀 모른채 길을 떠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순간 섭한 생각은 들지 않았고 주님도 내가 모르는 사이 자주자주 이렇게 치워 주시겠다 생각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산책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집에 와서 설교 준비를 하는데 생각이 나기를, ‘내가 한 이 작은 일을 그 차 주인은 보지 못했어도 주님께서는 보셨겠지…. 세상은 사라져도 이 작은 행위는 영원히 남겠지….’
교우 여러분, 남선교회 여러분,
용광로와 같은 어려운 이 때 거룩한 행위를 인내심을 갖고 계속 쌓아가십시다. 고난의 시간은 하루 처럼 지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행위는 영원토록 하늘 나라를 빛나게 할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