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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것을 보라VI: 부활의 사람들” 빌립보서 3:7-12 (04/04/2021)

LA 모 신문사에서 코로나 장기화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정의 가장들을 위로하기 위해 ‘모범 가장’ 콘테스트를 마련하고 이에 관한 광고문을 실었습니다.

자격:각 가정의 남편

내역:자신이 모범 남편임을 입증하는 내용의 글

시상식; 5월 15일

 

수많은 응모자 중에서 다음과 같이 적어 보낸 사람이 있었습니다.

“저는 담배를 피우지 않고 술도 안 마시며 도박도 안 합니다. 아내만 바라보며 다른 여자는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일요일마다 꼬박꼬박 교회에 나갑니다.

추신: 저는 6년간 이렇게 지냈습니다. 만약에 제가 당선되면 시상식을 여름까지 연기해 주세요. 제가 그 때 출소하니까요.”

 

부활주일 설교시 늘 말씀드렸습니다. 독일 루터란 교회에서는 부활절 설교를 joke로 시작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물론 요즘도 잘 지켜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방금 소개해 드린 조크는 최근에 나온 것인데 코로나 가운데 지내는 우리들에게 많은 도전을 줍니다. 코로나 가운데서도 이런 조크를 생각해 낸다는 것이 아주 아름다워 보입니다. 이 저자가 크리스챤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우리 크리스챤들이야 말로 이런 때 이런 재미있는 조크를 많이 만들어낼수 있어야 하지 않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럼 사도바울은 어떠했을까요? 성경에는 바울의 모습이 어떠했을지는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서신의 내용을 통해서 엿볼수 있다고 봅니다.

저나름대로 먼저 결론을 내리자면 사도바울은 삶속에 조크가 만발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유는 사도바울은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 과거의 삶이 조크였음을 은근히 고백하고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사실 바울은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아주 복잡한 삶을 살았습니다. 주님을 만난 후 아주 단순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7, 8절 말씀을 보면 쉽게 알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전에는 아주 복잡하게 바리새인으로서 신앙생활을 했지만 이제는 그 모든 것을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기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니 그전에 행한 모든 것은 이제 뒤 돌아 보니 조크였다는 것입니다. 아무 쓸데없는 것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쓸데 없었으면 배설물로 여긴다고 말했겠습니까? 본문 말씀 바로 전인 5, 6절에 사도바울이 배설물로 여기는 여러가지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그러면 왜 이런 것들이 하루 아침에 조크가 되었겠습니까? 8절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주님을 알고 나니 그 전에 했던 모든 것들이 조크였다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한국 방문시 명동성당을 가 보았습니다. 전국에서 명동성당을 성지처럼 여기고 여행 오는 그룹들이 많은 것을 볼수 있었습니다. 한 분은 여행 오신 분은 아닌데 성모상을 향해서 정중히 절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습니다. 잠시 후에도 또 띄었고 또 띄었습니다. 알고 보니 장소를 바꿔가면서 성모마리아를 향해 절을 하면서 기도드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 각도에서 기도드려야 그 정성을 보시고 기도가 응답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저에게는 조크로 보였습니다. 혼자 웃을수 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안 돼 보이기도 했구요….

이처럼 사도바울은 과거의 자신의 모습을 보며 웃었을 것입니다. 그 이유가 9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는데 이것도 모르고 행함으로 애쓰는 모습을 보면 안 됐기도 하면서 웃음이 나올수 밖에 없다고 봅니다.

 

그러면 기독교의 조크란 쓸데 없는 것을 행했던 미련한 것들로 인한 조크뿐인가요? 10절 말씀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바울의 웃음은 한 단계 더 발전합니다. 바울은 고난과 죽음을 향하여 웃고 있는 것입니다. 고난과 죽음은 하나의 조크라는 것입니다. 독일 루터란 교회에서 부활절 설교를 조크로 시작하는 이유는 믿는 자들에게는 주님의 무덤 문이 조크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는 자들에게는 무덤문이 왜 조크일수밖에 없을까요? 저는 이번 설교를 준비하면서 부활의 주님을 믿는 자들의 공통점이 하나 생각이 났습니다. 힌트를 드리겠습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드디어 지난 수요일에 2차 백신까지 다 맞았습니다. 앞으로 1주 반이 지나면 저는 온전히 면역상태가 됩니다. 물론 100%는 아닌줄 압니다. 그러나 중증으로는 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자 힌트를 드렸는데, 그러면 부활의 주님을 믿는 자들의 공통점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부활의 백신을 맞은 자들입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은 부활의 백신은 없다고 생각하고요….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부활의 백신을 맞은 사람들은 삶에서 부활의 능력을 맛보려고 합니다. 이를 위해 고난에도 참여하려고 합니다. 궁극적으로 부활의 주인공이 되려고 합니다.

 

사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난  순간 부활의 백신을 맞은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그후 어떻게 살았을까요? 11절 말씀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당연지사 아닙니까? 부활의 백신을 맞았는데….

생각해 보십시다. 제가 한 주 반 후에도 계속 그동안 생활했던 것 처럼 생활한다면 얼마나 미련한 것입니까? 그것도 하나의 조크입니다. 물론 무리해서는 안 되지만 정부에서 나오는 지침 안에서 자유롭게 생활해야 합니다. 아니 그렇게 살 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백신을 맞았으니 말입니다.

 

한편 사도바울은 부활의 백신을 맞은 자신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12절 말씀입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 가노라.”

얼마나 멋진 모습입니까?

 

한국의 어느 화가가 자기에게 깊은 영향을 준 그림들을 모아서 책을 펴냈습니다. 얼마전에는 다음 그림을 인상 깊게 보았습니다.

그림 제목이 아니고 우선 글 제목을 소개해드립니다.

‘자신감이 부족할 때 보면 좋은 그림.’

어떤 그림일까요?

Henri Matisse | Icarus, plate VIII from the illustrated book "Jazz" |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앙리 마티스의 Icarus라는 그림입니다. 사실 Icarus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인데 그 내용은 오늘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 생략합니다. 한 가지는, 어디론가 떨어지고 있는 모습입니다. 책의 저자는 이 그림을 보고 계속 이렇게 서술합니다.

“짙은 파란색은 강인하고 씩씩한 젊음을 상징합니다.

그 가운데 나의 존재가 적나라하게 전신을 드러내며 노란 빛의 조명을 받고 있죠. 노랑은 희망을 상징합니다.

나의 심장 한복판에는 빨간 점이 찍혀있습니다.

아직 나의 안에는 붉은 열정이 숨 쉬고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땅으로 떨어지는 Icarus의 모습에서 젊음과 열정 희망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모습이 바로 부활의 백신을 맞은 사도바울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케 되었습니다. 죽음을 향해 떨어집니다. 그러나 부활의 백신으로 인해서 그의 가슴은 젊음과 열정 희망에 가득찼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목표를 향해 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고난과 죽음을 넘어서….

 

교우 여러분,

우리는 그동안 고난과 죽음을 피하며 신앙생활하지 않았습니까? 고난과 죽음이 없는 곳만을 찾아 다니시느라 얼마나 힘드셨습니까?

우리는 부활의 백신을 맞은 자들입니다. 고난과 죽음은 우리로 하여금 놀라운 부활의 영광을 체험하게 하는 도구인 것입니다.

 

이번 사순절은 올해 교회 표어를 주제로 6차례 ‘이 모든 것을 보라’ 씨리즈로 말씀드렸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가르치며 천사들에게 말씀하게 하십시다.

“이 모든 것을 보라.”

어떤 사람들을 보라고 하실까요? 아니 우리의 어떤 모습을 보시고 말씀하실까요?

 

교우 여러분,

사도바울처럼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는 모습을 보여 드리십시다.

부활의 백신을 맞은 특권을 올 한 해 마음껏 누리십시다. 부활의 확신 가운데 항상 웃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부활의 주님을 찬양하십시다. 구난과 죽음이 우리를 이기지 못합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아폴로 14을 타고 우주 비행을 했던 우주인이 다음과 같은 글을 썼습니다. 이 우주인은 세명이 타는 우주선을 혼자 타고 있었다고 합니다. 특히 달의 뒷쪽으로 가면 태양과 지구가 보이지 않은채 달의 ¼을 그렇게 가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 때 느낌이 어떠했을까요?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 칠흑같이 깜깜한 어둠을 지날 때, 정말로 표현할수 없을 정도로 깜깜하게 된다. 우주선 온도도 떨어지고 정말로 축축한 느낌으로 가득차게 된다. 그런데 갑자기 아무 예고도 없이 유리창을 통해 햇빛이 들어 온다. 정말로 말할수 없는 최고의 느낌을 갖게 된다.”

아마 창문을 통해 햇빛이 갑자기 들어 오는 것을 보면서 놀람 가운데 폭소를 터뜨리지 않았을까요?

고난과 죽음의 시간을 지날 때 때로는 축축한 느낌에 압도 당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달리는 자에게는 예고도 없이 섬광처럼 부활의 세계가 찾아 옵니다.

 

이처럼 고난 가운데서 부활을 체험할 때 최고의 폭소를 터뜨리게 되지 않을까요? 남은 한 해 자주 자주 고난과 죽음이 우리를 찾아 올 것입니다. 그 때마다 부활의 백신을 맞은 자답게 폭소로 답하십시다. 폭소를 터뜨리며 앞으로 달려 나가십시다. 이 폭소를 매일 매일 하늘나라까지 상달하게 하십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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