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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 VI: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마태복음 6: 5-13a (05/30/21)

Barbara Brown Taylor라는 신학자가 있는데 한 때 예일 신학대학에서 안식년을 갖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안식년 기간에 여러 책을 많이 보셨을텐데 어느 원하는 책이 아무리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사무실에 알아 보니 아무도 check out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어쩔수 없이 도서관 직원에게 물었더니 직원이 하는 말, 신학대학 도서관이 예일 전체 대학원 도서관들 중에 제일 많이 도둑질을 당한다고 하였습니다. 기가 막혀서 물었습니다.

“어찌 그럴수가…?” 직원이 대답하길,

“Grace, 모두 잘 못을 저지르기 전에 이미 용서를 받았다고 믿기 때문이죠…!”

 

아주 믿음이 좋습니다. 한 사자성어가 생각이 나네요.

‘我田引水’ (아전인수). 자기 밭으로 물을 끌어 들인다는 뜻이죠. 곧 자기 이익을 위해서 해석하는 것을 뜻한다고 할까요? 이런 사자성어가 생겨난 것을 보면 인간의 죄성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인간의 죄성을 너무도 잘 아시고 주님은 주기도문의 여섯번째 창문을 마련해 주신 것 같습니다. 다시 주기도문의 창문들 앞에 서 볼까요? 또 다시 반복해 말씀드려 죄송하지만 교육의 제일 중요한 것은 새로운 것을 가르치는 것보다 반복이 더 중요하다고 교육학자들은 열심히 강조하고 있는 줄 압니다.

 

첫번째 창문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우리는 매일 아침 기도의 창문을 열면서 오늘 만나는 이웃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이름을 기대하게 됩니다.

두번째 창문은, “나라가 임하시오며.” 자주 자주 하나님께서는 침묵으로 응답하시지만 침묵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기대하며 하루를 힘차게 시작하게 됩니다.

세번째 창문은,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인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아낌없이 아들을 내어주셨습니다. 이제는 땅에서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역사가 펼쳐질 것을 기대하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네번째 창문은,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매일 나려 주시는 양식은 기도의 응답인 동시에 우리들의 기도가 이루어지고 있는 증거로 받고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이웃과도 양식을 나눕니다.

다섯번째 창문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하나님의 이름과 나라와 뜻을 위한 기도가 이루어지려면 우리들의 죄가 해결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함을 받아야 하고 이웃으로부터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이 때 우리들 안에는 새롭고 놀라운 이야기 꽃이 피게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이야기의 꽃들이 피어집니다.

 

이제 여섯번째 창문 앞에 섰습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당연하지 않습니까? 이제 죄사함을 구했고 죄사함을 받았는데, 그리고 이미 드린 기도들이 눈 앞에서 이루어지고 있는데, 계속 이 축복의 세계에 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죄에 빠져서는 안 되고 죄에 빠지지 않으려면 시험에 들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여섯번째 창문에 서서 하루를 시작하며 이 기도를 드리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아마도 예일대 신학생들은 이 주기도문을 드리지 않고 학교 생활을 하곤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일대뿐이겠습니까? 아마 조사해 보면 다른 미국 신학교에도 비슷한 일들이 많이 일어날줄 압니다.

한편 제 중고등학교 친구 두명이 한국의 장신대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 중 한 친구가 저에게 하는 말이, 또 다른 친구는 수단이 무지 좋은 친구라고 하면서 신학교 다닐 때 교회 일은 열심히 했지만 학교 공부는 등한히 했다고 합니다.

학교 성적이 잘 안 나올까봐 교수들을 찾아 다니면서 교회일 때문에 공부를 못했다고 성적을 올려 달라고 부탁을 하곤 했다고 합니다.

그것까진 좋은데 나중에 알고 보니 너무 많이 올려줘서 1등으로 졸업을 했다고 웃지 못할 이야기를 저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오늘 제가 미국과 한국의 신학교의 치부를 드러내네요. 이유는 너무 믿음이 좋습니다. 죄사함의 확신이 삶 전체를 꽉 메우고 있습니다. 그 결과 시험에 쉽게 빠지고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곧 죄사함의 확신이 강한만큼 우리는 여섯번째 창문 앞에 자주 서야 합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아전인수’는 우리들에게 깊이 뿌리박혀 있는 죄성이기 때문입니다.

 

여섯번째 창문을 제일 눈여겨 본 사람 중 한 사람이 C. S. Lewis였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제 보기에는 사탄이 제일 싫어하는 책은 물론 성경책일줄 압니다. 두번째 싫어하는 책은 바로 C. S. Lewis의The Screwtape Letters 라는 책일 것 같습니다.

이 책에서 C. S. Lewis는 악마의 전략에 대해서 자세히 살핍니다. 이 책은 Screwtape이라는 큰 악마가 조카뻘인 작은 악마에게 쓴 31개 편지로 엮어진 책입니다.

이 책에서 아버지는 사탄입니다. 원수는 하나님이고요. 그리고 교회는 환자입니다. 어떻게든 환자가 회복치 못하게 하려는 것이 악마의 작전입니다. 이를 기가 막히게 C. S. Lewis는 풀어가고 있습니다. 악마가 작은 악마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8번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우리들의 계획은 인간이 더 이상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할 때 흔들리기 시작하지,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자취가 다 사라져 간 후 그래도 왜 자기들이 버려졌는지 질문을 하면서도 계속 순종하려 할 때 우리의 계획은 위태로워지는거야.”

큰 악마의 계획은 교회가 아니 크리스챤들이 욕심을 버리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욕심을 버리고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 갈 때 악마의 계획은 무너지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곧 악마의 계획은 교회는 다니지만 욕심은 버리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악마가 인간을 향한 계획인 것입니다. 이 계획은 자주 자주 성공했습니다.

 

곧 사탄의 계략은 바로 ‘아전인수’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욕심에 대해서 별로 겁을 내지 않게 합니다. 왜냐하면 ‘죄사함’의 은총을 알기 때문에….

사탄은 이 계략을 가지고 교인들을 늘 시험에 빠뜨리곤 했던 것입니다. 죄사함의 확신으로 인해서 욕심에 대해서 둔감해 지게 하는 것입니다. 어느덧 무엇이 욕심인지 아닌지 구분을 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욕심일지라도 회개하면 되니…. 결국 죄에 대해서 둔감해진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 별로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회개하면 되니깐….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이와 같은 현상을 너무도 많이 보아 왔던 야고보는 야고보서 1: 14, 15절에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우리가 아전인수로 생각하며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들로 인해 결국 사망을 낳게 된다는 것입니다. 회개하기 전에 사망이 온다는 것을 야고보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야고보가 깨달았고, C. S. Lewis가 악마의 계략을 그의 책에서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탄이 얼마나 야고보와 C. S. Lewis를 싫어하겠습니까?

 

사실 저는 요즘 기독교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이슬람교에서도 관찰할수 있었습니다. 요즘 세계에서 가장 빨리 성장하는 종교가 어느 종교인지 잘 아실줄 압니다. 이슬람교입니다. 저는 오래 전에 터키를 다녀 오고는 왜 이슬람이 가장 빨리 성장하는 종교가 되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슬람교의 특징은 알라신을 무지 높이는 것입니다. 너무 높여서 감히 상상 조차 할수 없습니다.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터키에 가 보니 곳곳에 모두 알라를 섬기는 우상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 우상들 앞에서 자기의 마음의 소원을 아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의 소원은 모두 세상적인 것들이었습니다.

곧 이슬람교는 하나님을 높이 올려 놓은 후 이 세상에는 안 계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안 계시니 우상을 대신 만들어 놓고 온갖 육신적 욕심에 따라 알라신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좋습니까? 알라신을 섬기면서 마음껏 자기들이 원하는대로 살수 있으니 말입니다.

 

사실 겉으로 보기엔 기독교인들은 우상을 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찌 보면 이슬람교인들과 큰 차이는 없다고 봅니다. 하나님을 십자가를 통해 만나지만 죄사함을 언제든지 받는다는 생각 하에 결국 비슷한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영원한 상급을 위해서 기도는 하지만 어찌보면 너무 추상적이니 결국 많은 경우 이슬람 교인들처럼 현세적인 기도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저에게 반문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일은 이슬람교나 아니면 신학교에서나 있지 우리 평신도들은 안 그렇죠….”

 

장례식장에 가 보면 제일 분위기가 좋은 곳이 기독교인들의 장례식이라고 합니다. 죄사함을 믿고 부활을 믿으니…. 한편 제 친구 목사님이 어느 의사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마지막 임종을 제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 땅의 삶을 위해서 많은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아직 그 기도들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아야 하니 하늘 나라로 갈 때가 되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나라와 뜻을 이루기 위한 기도였다면 기쁨으로 임종을 맞이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야고보의 예언이 이루어지는 것뿐 아닐까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이 모든 것을 아시고 주님께서 기도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주님께서 주기도문에 오늘의 이 기도를 넣으신 또 다른 이유가 있으셨습니다. 이 당시 유대인들은 이런 기도를 드리곤 했다고 합니다.

“나를 시험하사 내가 순종함을 증명케 하소서.”

유대인들은 자신들 안에 있는 아전인수의 죄성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얼마나 강한지를 자랑했습니다. 이에 주님께서 새로운 기도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한 제자는 주님의 기도를 따라합니다. 다른 제자는 유대인의 기도를 따라합니다. 주님의 기도를 따라한 자는 베드로입니다. 유대인의 기도를 따라한 자는 가롯유다입니다.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길을 가게 됩니다.

결국 베드로는 주님을 배반한 후 닭의 울음 소리를 들으며 통곡합니다. 가롯유다는 목매어 자살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벧로는 닯울음 소리를 들을 때마다 통곡하였다고 합니다. 통곡 중에 기도하지 않았을까요?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이에 주님은 베드로를 수제자로 삼으십니다. 베드로가 베드로가 된 이유는 자신의 약함을 알고 기도드렸기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그러니 항상 기도드리십시다. 하나님의 이름과 나라와 뜻을 구한 후에도 이웃을 섬긴 후에도…. 아전인수의 죄성이 늘 우리를 넘어지게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이 때 우리는 베드로의 반열에 속한 자가 됩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일본에 유명한 신앙인 우찌무라 간조가 있습니다. 알고 보니 Amherst 대학교 신학부를 다녔고 하트포드 신학교에서도 공부를 했던 분입니다. 그런데 그 전에 일본에서 삿뽀로농업대학에 다니고 있었는데,. 당시 삿뽀로농업대학은 미국 메사추세츠주립 농과대학의 학장인 클라크 박사에 의해 기독교 복음을 가르치던 학교였습니다.

이 학교에서 우찌무라 간조도 처음에는 반항했지만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는 미국으로 와서 새로운 교육을 받은 것입니다.

다시 일본으로 귀국해서 선생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불경사건’이라고, 곧 천황에게 절하라는 명령을 거역해서 학교에서 쫓겨납니다. 그리고 일본에서 반전 운동을 합니다. 이 당시는 동남아시아를 일본이 승승장구하던 때였습니다. 모든 사람은 승전 분위기에 가득차 있었지만 간조는 이에 반기를 들었던 것입니다. 힘들게 살아가면서 후세 교육에 매진하게 됩니다.

성서연구반을 만들었는데 이 연구반 출신 중에 동경대학 총장 4명과 교육부 장관 4명이 배출이 됩니다. 그는 ‘일본을 성서 위에 세우자’운동을 시작합니다. 이에 영향을 받은 김교신 함석헌 등은 ‘조선을 성서 위해 세우자’운동을 시작합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고백기도문을 남깁니다.

 

“제가 지금까지 살면서 입은 하나님의 은혜는 셀수 없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그중 가장 기쁘고 감사한 것이 있다면 바로 저의 기도를 전부 들어주지 않으신 것입니다. 제가 한 기도 그대로를 하나님이 들어주셨다면 저는 제멋대로에다 교만하기 짝이 없고 건방지기까지 한 인간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저의 영혼을 파괴하고 죄짓게 하는 기도는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오 주님! 이것으로 인해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당신은 저의 온전한 기도만 들어 주심으로 저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우찌무라 간조는 주기도문을 제대로 드린 분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온전한 기도만 들어 주셨습니다. 베드로의 반열에 속한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주기도문을 정성껏 기도드려야 합니다. 그 때 우리는 욕심에 의한 기도를 드리지 않게 됩니다. 설상 그런 기도를 드렸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그런 기도는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니 베드로의 반열에 속한 자가 되도록 기도드리십시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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