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도 미국 역사에 큰 획을 긋는 일이 있었습니다. 오바마라는 젊은 흑인 정치인이 세계 최강국인 미국의 대통령으로 당선이 되었습니다. 물론 여러 여건이 맞아 떨어져서 대통령이 되었겠지만 그로 하여금 대통령이 되는 길을 열었던 계기가 있습니다.
오바마의 어린 시절은 그다지 행복하지 못한 편이었습니다. 아프리카계 흑인 아버지를 둔 탓에 다문화적 가족력을 소유한데다가 이른 나이에 결혼한 부모는 그가 어렸을 때 이혼을 했습니다. 그의 혼란과 고민은 예민한 사춘기 소년이 감당하기에 벅찼다고 합니다.
결국 오바마는 술과 담배 마리화나 급기야 코카인에도 손을 댑니다. 그러던 중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아버지에 대한 혼란스러운 마음을 정리하고 싶은 마음으로 케냐로 떠납니다. 방황하는 오바마에게 가장 결정적으로 희망을 준 것은 케냐에 있는 가족을 방문했을 때 보았던 편지 묶음이었습니다. 다음의 글은 아버지가 미국의 각 대학에 보낸 추천서에 쓰여 있던 글입니다.
“오바마는 조국의 발전에 헌신하겠다는 열망을 품고 있습니다. 그런 그에게 최소한 1년이라도 기회를 주어야 마땅합니다.”
오바마는 이것이 아버지가 자신에게 남긴 유산이라고 생각을 했고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솟구쳐 올라와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순간 아버지에 대한 원망도 사라졌다고 합니다.
비록 아버지가 아버지의 역할은 그동안 하지 못했지만 편지 한 통으로 아버지의 역할을 하고도 남게 됩니다. 문제 많은 아버지이었지만 아버지는 아들에게 한 가지 귀한 선물을 남겨 준 것입니다. 아들을 향한 열망이었습니다.
사순절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열망을 새롭게 발견하는 절기입니다. 오바마의 아버지의 열망이 오바마를 변화시켰는데 하물며 우리 주님의 열망은 놀라운 축복의 길로 우리를 몰아 세우지 않을까요? 오늘 사순절 둘째 주일을 맞이하여 네번째 팔복의 말씀을 통하여 주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함께 누리고자 합니다.
팔복 씨리즈 첫 설교에서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첫 강의를 하시기 위해서 산 위에 오르셨습니다. 그리고 첫 강의를 시작하십니다. 첫 단어는, makarioi였습니다. 헬라어로 ‘복되도다’입니다.
“복되도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여….”
“복되도다. 애통하는 자들이여….”
“복되도다. 온유한 자들이여….”
오늘 네번째 팔복의 말씀은,
“복되도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여,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이 처럼 주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산에 오르셔서 ‘복되도다’ 선포하시며 듣는 제자들을 축복하셨습니다. 아마 제자들은 모두 한 마디 한 마디에 ‘아멘’ ‘아멘’을 쏟아냈을 것입니다.
특히 제자들 중에 율법에 대해서 잘 아는 자들은 더 크게 ‘아멘’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명기 27장에 보면 이스라엘 민족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 가면 두 그룹으로 나뉘어서 두 산에 서게 하십니다. 한 그룹은 그리심산에 한 그룹은 에발산에…. 그리심산에 선 사람들은 축복을 선포하게 하시고, 에발산에 선 사람들은 저주를 선포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둘 중 어느 그룹 사람들이 먼저 선포를 할까요?
축복? 저주? 신명기 27: 14, 15절,
“레위 사람은 큰 소리로 이스라엘 모든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장색의 손으로 조각하였거나 부어 만든 우상은 여호와께 가증하니 그것을 만들어 은밀히 세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응답하여 말하되 아멘 할지니라.” 그리고는 16-26절까지 저주의 말씀을 선포하게 하십니다.
당연히 율법을 잘 아는 제자들은 마음의 각오를 했을 것입니다. 저주의 말씀을 먼저 선포하실 것을…. 에벨산에서 처럼…. 그런데 놀라운 선포를 하시고 계십니다. 한 번도 아니고 여덟번….
“복되도다…!”
구약의 말씀을 아는 제자들은 놀라지 않았을까요?
오바마가 오바마 대통령이 된 이유는 아버지의 편지 때문이었습니다. 편지 안에 적혀 있는 아들을 향한 열망이 오바마를 깊은 잠에서 깨운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팔복은 온 인류를 향한 주님의 열망이 담겨진 고백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들이 이 여덟 가지 복을 누리게 하시려고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산에 올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복되도다.”
오늘 두번째 사순절 주일 예배를 맞이하여 주님은 네번째 축복의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조금 의역을 하면…,
“복되도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여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그러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어떤 자들일까요? 그리고 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배불림을 받게 될까요? 먼저 ‘의’가 무엇인지를 살펴 봐야 할줄 압니다. 사실 ‘의’는 원어로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뜻합니다. 곧 오늘 본문 말씀을 직역하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는 것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배부를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도 좀 애매하죠?
이렇게 생각하면 제일 좋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습니다. 곧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으니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의’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팔복에는 이 ‘의’가 얼마나 중요한지 두번 말씀하십니다. 여덟번째 복에도 ‘의’를 또다시 언급하십니다. 5:10절 말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오늘 본문 말씀에서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고 하시는 반면 8번째 복으로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헬라어로는 둘 다 모두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 말씀인 네번째 복과 여덟번째 복을 비교하면 전자는 의로 인해서 내면적 고통을 느끼는 것이고 후자는 외부적인 고통을 느끼는 것으로 판단할수 있습니다.
곧 오늘 본문 말씀은 이웃이 하나님의 형상을 입기까지 애타는 마음으로 수고하는 모습이 담겨져 있다고 볼수 있습니다.
지난번 BNI에서는 인종과 환경에 대한 강의 시간을 가졌었습니다. 특히 저에게 깊게 남아 있는 것 하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흑인들이 저축도 안 하고 매주 탄 봉급을 하루만에 쓰곤 한다는 말을 자주 듣고 계실줄 압니다. 그래서 흑인들을 더욱 차별하고 있습니다. 하루 번 것을 그 날로 쓰는 흑인들을 우리 모두 한심하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된 이유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링컨의 결단으로 흑인들이 해방이 되었지만 해방된 순간 손에는 아무 것도 없는 무일푼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어쩔수 없이 전에 일했던 주인 밑에 들어가 봉급을 받으면서 일을 하며 하루 하루 살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최소한의 봉급으로…. 그런데 그 봉급도 돈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전표로 받았습니다. 그 전표로 생필품들을 사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를 들어 겨울이 오면 추워지는데 난로를 구입하기 위해서 전표를 모았습니다. 그리고는 얼마큼 모아서 가게에 가서 전표를 주면서 난로를 구입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하는 말,
“이 전표는 색깔이 다르잖아.”
시간이 지나면 색깔을 바꿔서 전에 발급된 다른 색깔의 전표는 사용할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이런 일이 계속되다 보니 흑인들은 받은 전표는 즉시 사용하는 습관이 생겼고, 저축의 개념은 남의 나라 일이 된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총체적으로 systemic racism(구조적 인종차별)이라고 부릅니다.
저희 교단에서 Matthew 25라고 해서 정의로운 세계를 이루는 것을 교단의 주 사역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 중 주요 사역 중 하나가 systemic racism을 타파하는 사역입니다. 아울러 깊게 연관은 되어 있지만 다른 사역은 가난 퇴치입니다. 물론 어떻게 보면 너무 거대한 사역입니다. 거대한 사역이지만 확실한 것은 꼭 해야할 사역입니다. 그리고 이 사역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팔복에서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Matthew 25사역의 시작은 바로 네번째 팔복의 말씀을 듣는데서 시작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유야 어떻든 가난한 자들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는 것이 의에 주린 삶입니다. 아울러 systemic racism에 희생된 자들의 모습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는 것이 의에 목마른 삶입니다. 이들에게는 놀라운 축복이 임합니다. 배부름의 축복이 임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이 거대한 사역을 우리들에게 맡겨만 놓으셨을까요? 이 말씀을 지금 어디서 하시고 계시죠? 산에서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산상수훈이라고 하는 것 아닙니까? 주님은 지금 산에서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의 복으로 배부른 삶을 살게 될 것을 열망하며 이 말씀을 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어디로 가시죠? 산상수훈을 마치시고는 산 아래로 내려 가십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기 위하여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모든 사람을 만나기 위하여….
산에서 내려 오셔서 제일 처음 만난 사람이 누구입니까? 산상수훈이 5장에서 7장까지인데 8장 처음 기사를 보면…, 8:2절,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이에 주님은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셨습니다. 터치하셨습니다. 이 당시 문둥병자들은 죄인들이었습니다. 가까이 오면 돌을 던지곤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손을 문둥병자에게 대셨습니다. 문둥병자가 소유한 하나님의 형상을 보셨던 것입니다. 그 아름다움에 취해서 손이 저절로 나간 것입니다. 주님의 손이 닿자 문둥병이 나았습니다. 문둥병이 낫던 안 낫던 주님은 문둥병자 안에 있는 세상의 피조물 중에 가장 아름다움 피조물 곧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아름다운 모습을 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되는 말씀을 보면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시고 여러 병든 자들을 고치십니다. 중풍병자도…. 주님께서 많은 사람들을 고치신 이유는 그들 안에 멋진 하나님의 형상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의에 주리고 목마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내려 오신 곳에는 환자들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곳곳에서 많은 위험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Systemic racism과 사회적 불공평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편 주님은 소외된 자들이 사회에서 당하고 있는 처참한 모습을 보며 더욱 그들을 향한 간절함이 강렬해졌을 것입니다. 이 때 주님은 고난의 종의 노래가 기록된 이사야 53:10절 말씀을 통해 힘을 받지 않으셨을까요?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누군가가 이들을 위해 대신 상함을 받아야 함을 말씀을 통하여 재확인하셨을 것입니다. 이제 이 말씀에 힘입어 산 아래서 모든 소외된 자들을 만지시고 껴안으신 후 이것만으로는 해결이 안 되는 것을 아시고 이사야의 말씀을 완성하시기 위하여 다시 산에 오르십니다. 요한복음 19: 28,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이스라엘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에벨산에서 저주의 말씀을 들었지만 주님은 놀랍게도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산상수훈을 통해서 축복의 말씀을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으로 다시 산에 오르셨습니다. 이번에는 십자가를 지시고 갈보리 산에 오르셔야 했습니다. 끝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우리 모두를 의로 배부르게 하시려고…. 이 모든 것의 시작은 주님의 우리를 향한 열망입니다. 그의 열망은 하나의 고백으로 완성되었습니다.
“내가 목마르다.”
이처럼 산에서 시작하신 주님의 사역은 산에서 마치셨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순절은 우리들을 위한 열망으로 인해 산에서 시작하신 당신의 사역을 산에서 마감하신 곧 갈보리 산 위에서 십자가 형벌을 감당하셨던 주님을 새로이 만나는 절기입니다. “복되도다”에서 “내가 목마르다”로 이어지는 우리를 향한 열망의 소리를 새롭게 듣는 절기입니다.
금주간 산에서 “복되도다”외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다. 아울러 “내가 목마르다” 울부짖으시는 주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십시다. 그리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십시다.
이 주님의 음성을 새롭게 듣기 위해서 우리는 사순절에 구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이웃을 위해 구제의 삶을 사는 것을 볼 때 주님은 당신의 음성을 더 뚜렷이 들려 주시지 않으실까요?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배부름의 축복이 아닐까요?
사실 지금 세계적으로 되어지는 현상을 보면 우리의 구제가 무슨 효과가 있겠나 생각이 들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캘커터의 마더 테레사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는 큰 것들을 할 수 없습니다. 다만 큰 사랑으로 작은 일을 할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하느냐 하는 게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랑으로 그 일을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테레사의 말을 인용해서 쉐인이라는 분이 책을 썼는데 그 분은 자기 집 문에 다음과 같은 팻말을 붙여 놓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큰 사랑으로 작은 일을 합니다. 동의하시지 않으면 문을 열지 마십시오!”
요즘 우크라이나 소식들을 모두 잘 듣고 계실줄 압니다. 탱크 하나가 수백만 달라가 된다고 합니다. 그 수백만 달러의 탱크의 파괴력은 물론이거니와 탱크 하나가 파괴될 때 생기는 손실은 정말로 헤아릴수 없는 액수입니다. 그러나 마더 테레사는 말합니다.
“큰 사랑으로 작은 일을 할 뿐입니다.”
이것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모습이 아닐까요? 배부름의 축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음성을 듣고 배부름의 축복을 받은 분의 이야기를 소개해드립니다.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의 벗으로 살았던 벨기에 태생의 엠마뉘엘 수녀가 어느 날 중증 정신 장애자들을 보호하고 있는 한 병원에 갔습니다. 한 여성의 안내로 병원을 둘러보던 그는 도무지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 얼굴의 한 남자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의 모습은 흉측했고 비뚤어진 입에서는 침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안내자는 두 팔을 덜렁거리고 있는 그 환자의 긴 몸뚱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두 팔로 안아 일으켜 가슴에 꼭 안았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어깨 위에 간신히 걸쳐 있는 그 남자의 얼굴에 자기 얼굴을 바싹 갖다 대고 환한 미소를 보냈습니다.
어느 순간 촛점 없이 두리번거리던 남자의 두 눈동자가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여자에게 시선을 고정시켰습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입에서 새어나왔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뭔가 생명의 섬광 같은 것이 그의 둔한 얼굴선 위를 살짝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그러자 안내자의 얼굴이 환해지더니 기쁨에 찬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어머! 자기가 사랑받고 있다는 걸 지금 느꼈나 봐요!”
그녀는 품에 안은 남자의 몸을 자신의 체온으로 따뜻하게 해주면서 오랫동안 그와 시선을 맞추었습니다. 남자의 표정이 차츰 밝아졌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아주 부드럽게 속삭였습니다. “세상에! 이제 잘생긴 귀공자가 되었네!” 잠시 후 그 안내자는 엠마뉘엘에게 말했습니다. “난 내 생각을 하고 있을 틈이 없어요. 여기 있는 사람들은 한 명 한 명 모두가 내 사랑을 필요로 하고 있거든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에서는 빛이 나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품에 안겨 입을 벌리고 있는 남자는 빛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엠마뉘엘은 그 광경은 세상을 초월한 장면이었다고 말합니다. 그 장면이 오랫동안 엠마뉘엘의 삶을 비추는 빛이 된 것입니다.
안내인은 장애인 남자의 모습 안에서 최고로 아름다운 하나님의 형상을 보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안내인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배부름의 축복을 누린 것입니다.
우리들 모두에게도 배부름의 축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큰 사랑으로 작은 구제를 시작하십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다.
“내가 목마르다.”
십자가에서 온 인류를 향해 “내가 목마르다” 외치신 주님께서 산상수훈을 통해 우리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