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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민족의 근원: 시온 성” 시편 87: 1-7 (08/14/2022)

오래된 현악기들이 더 소리가 좋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으셨을줄 압니다. 옛사람들은 ‘노래하는 나무’를 찾는 특별한 방법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산속 계곡에서 나무들을 뗏목으로 날랐습니다. 그러다 물살 센 곳에 이르면 나무 둥치들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고 합니다. 뗏목 위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던 나무 중 몇몇은 청명한 소리로 울렸고 그 소리를 듣고 좋은 바이올린이 될 만한 나무들을 가려냈습니다. 노래하는 나무가 될 만한 재목은 1만 그루 중 한 그루가 될까 말까 한다고 합니다.

 

오늘 8/15 광복절 기념 예배를 드리는데 설교 서두에 ‘노래하는 나무’ 이야기를 소개해 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저희 한민족의 이야기가 ‘노래하는 나무’의 이야기와 유사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벌써 거의 20년이 되어 오네요. 정확히 19년전에 저희 교회가 첫 희년을 축하하며 일년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보냈었습니다. 믿겨지지 않네요. 벌써 20년이 지난 것이…. 그 때 어느 교우님이 배너를 만드셨는데 요즘도 아주 아름답게 본당을 꾸미고 있습니다.

행사 중에 한국 문화 축제가 있었습니다. 본당에서는 ‘아리랑’이라는 제목으로 한국 문화를 춤과 음악 등 여러가지 연기로 소개하였습니다.

 

제일 앞 자리에서 이 공연을 관람하고 있었는데 어느덧 아리랑 고개를 넘어 넘짓이 보이는 갈보리의 십자가를 느낄수 있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그 다음해에는 제2의 희년을 향한 비전선언을 채택했는데 세번째 비전 선언을 ‘한 민족의 문화를 이어가는 교회’로 짓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신학적인 근거 없이 이러한 비전선언을 만들게 된 것은 아닙니다. 선교신학에서 중요한 개념 중 하나가 모든 문화에는 십자가의 그림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훌륭한 선교사들의 특징 중 하나는 그 문화 안에 있는 십자가의 그림자를 찾는 것입니다. 그것을 중심으로 선교 전략을 펼쳐나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뉴기니아 어느 민족은 부족간의 불화가 생겼을 때 해결하는 방법 중 하나가 아이를 교환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화해의 아이’라고 불렀습니다. 돈리챠드슨 선교사는 바로 주님께서 ‘화해의 아이’로 오셨다고 증거함으로 그 부족을 전도할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모든 문화에는 그리스도를 만날수 있는 그 무엇이 숨겨져 있다고 선교학자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한민족의 문화만 ‘노래하는 나무’가 아닐줄 압니다. 모든 세상 민족의 문화는 ‘노래하는 문화’라고 생각할수 있습니다. 그 안에 주님을 향한 놀라운 노래가 담져겨 있으니 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이를 더 확인시켜 주고 있다고 봅니다. 거의 모든 시편에는 표제어가 있습니다. 오늘 87편의 표제어는 ‘고라 자손의 시 곧 노래’입니다. 물론 가장 많은 것은 ‘다윗의 시’등 다윗의 이름이 들어가 있습니다. 고라의 자손이 이 시를 지었고 또 이 시를 불렀습니다.

 

그러면 ‘고라’가 누구인지를 살펴 봐야 할줄 압니다. 고라와 모세는 사촌지간입니다. 그런데 같은 레위 지파로서 모세가 지도자로 행세하는 것이 꼴불견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반란을 일으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노하셔서 고라와 그 한 패들을 땅을 갈라지게 해서 멸합니다. 그런데 그 반란에 동참하지 않은 자녀들은 살려 두십니다. 그리고 이들을 도리어 성전 문지기와 성가대로 세웁니다.

아버님을 생각하면 자기들도 죽어 마땅한데 그 자녀들에게 이런 특권을 주셨으니 그들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아주 성실히 주어진 일을 감당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노래는 이처럼 성전을 높이는 시가 대부분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시편84: 10절,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이를 염두에 두고 오늘의 시편을 읽으면 많은 도움이 됩니다. 1, 2절,

“그의 터전이 성산에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보다 시온의 문들을 사랑하시는도다.”

금방 느낄수가 있습니다. 시인은 야곱의 모든 거처 곧 이스라엘의 모든 곳보다 하나님께서는 시온의 문 곧 예루살렘을 사랑하신다고 노래합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계속 노래합니다. 3절,

“하나님의 성이여 너를 가리켜 영광스럽다 말하는도다.”

고라 자손은 자기들이 받은 은혜를 성전을 잘 섬김으로 하나님께 보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예루살렘을 위한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온 성을 높이는 더 깊은 뜻이 있습니다. 4절,

“나는 라합과 바벨론이 나를 아는 자 중에 있다 말하리라 보라 블레셋과 두로와 구스여 이것들도 거기서 났다 하리로다.”

라합은 애굽을 뜻합니다.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강대국이 있는데 바로 애굽과 바벨론입니다. 이 두 나라가 하나님을 아는 나라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안다’는 것은 깊은 만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도 하나님의 민족 내지 나라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애굽과 바벨론 두 나라와 시온 성은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표현은 그 다음입니다.

“보라 블레셋과 두로와 구스여 이것들도 거기서 났다 하리로다.”

블레셋과 두로 구스, 구스는 에티오피아인데, 이 세 이방나라 내지 민족은 아예 시온산에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도 놀라운 고백입니다. 애굽과 바벨론은 후에 하나님과 아는바가 되었는데, 이 세 민족은 처음부터 자녀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5절,

“시온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 저 사람이 거기서 났다고 말하리니 지존자가 친히 시온을 세우리라 하는도다.”

시온 성은 이스라엘인들의 성일뿐 아니라 이 사람 저 사람 곧 이방인들도 거기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지존자가 친히 시온을 세우리라.”

이 사람 저 사람 곧 이스라엘인뿐 아니라 이방인들로 인해 시온이 세워질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를 지존자이신 하나님께서 이루십니다.

 

그러면 고라 자손들을 하나님께서 세우신 이유가 짐작이 됩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고라 자손의 조상은 흉칙한 죄를 범한 자들입니다. 자기들은 감히 예루살렘 성전의 문지기를 할 자격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니 성전의 문지기는 커녕 시온 성에 가까이 올수도 없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훨씬 잘 이해합니다. 이방인들도 감히 시온 성에 가까이 올수 없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처럼…. 하나님은 이들을 통해서 도리어 놀라운 멧세지를 선포케 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시온 성은 시온 성과 거리가 멀고도 먼 이 사람 저 사람들 곧 이방인의 고향인 것을….’ 시인은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6절,

“여호와께서 민족들을 등록하실 때에는 그 수를 세시며 이 사람이 거기서 났다 하시리로다.”

 

하나님은 모든 민족들은 결국 시온 성에서 났다고 선포하신다는 것입니다. 모든 민족의 시작은 이스라엘의 시작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처음에 말씀드린대로 모든 민족의 문화는 공통점을 가질수 밖에 없습니다. 시작이 같기 때문입니다. 시온 성입니다. 곧 모든 문화에는 시온 성으로 향하는 빛이 스며 있습니다. 선교사들은 바로 시온산으로 향하는 빛을 찾는 것입니다. 그 마지막은 그리스도임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처럼 자기들의 고향이 시온산임을 깨달은 자들은 어떤 삶을 살까요? 7절,

“노래하는 자와 뛰어 노는 자들이 말하기를 나의 모든 근원이 네게 있다 하리로다.”

자기들의 고향이 시온 성임을 아는 자들은 당연히 기뻐 뛰놉니다. 그런데 모든 민족이 같은 동작으로 같은 노래로 뛰고 노래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모두 다른 노래와 춤으로…. 각자의 문화에 따라서….

아마 시인은 이런 상상을 하면서 이 시를 지었을지 모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문화에 따라 특유한 춤과 노래를 부르면서 시온 성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제가 오늘 광복절 기념 주일을 맞이해서 이 말씀으로 설교 본문을 삼은 이유가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는 바로 힘센 국가가 이웃의 고귀한 문화를 짓밟은 사건입니다. 불행히도 36년간 진행되었습니다.

이제 광복 77주년을 맞는 오늘 계속해서 지난 날의 상처만을 되씹을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도리어 일제 강점기에 우리들의 믿음의 선조들은 어떻게 어떤 춤과 노래를 계속 불렀는지를 살펴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아울러 이제는, 지난 4월 IMF통계에 의하면, 세계 경제 12 강대국이 되었는데, 강대국으로서 다른 민족의 문화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도 살펴 봐야 할줄 압니다.

 

먼저 거꾸러 다른 민족의 문화를 어떻게 대하여야 하는지를 말씀드리고 일제 강점기 시절 저희 믿음의 선조들의 모습을 나누겠습니다.

 

요즘 한국에도 이주민들이 많이 와서 살고 있습니다. 결혼이주자로 3년째 생활하고 있는 중국인 장쭈이 씨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그는 한국인이 중국 사람과 결혼을 했으면 아무리 한국에 살아도 중국 문화에 대해 많이 배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자기 남편은 중국어를 배우려고 하지 않아 3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니하오’ 한 마디밖에 할 줄 모른다고 안타까워 합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두 문화가 하나 되어서 시온산으로 향하는 여정을 계속한다면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만일 한국에 산다는 이유로 중국인과 결혼을 하고도 배우자의 문화인 중국 문화를 무시한다면 일제 강점기에 우리가 일본인들에게 당한 것을 고대로 반복하는 것이 아닐까요?

 

한편 우리 선조들의 옛 모습을 살펴 볼까요? 한 마디로 일제 침략이 시작될 무렵 가장 앞장 서서 저항한 그룹이 바로 기독교인들입니다. 그 중에서도 청년들이었습니다.

을사보호조약이 1905년 11월에 체결되는데 약 4개월전 서울 연동장로교회 청년회를 주축으로 조직한 국민 교육회에서 전국적으로 기도 운동이 전개됩니다. ‘위국 기도문’ 1만 장을 인쇄하여 전국에 반포하고 매일 하오 3시부터 4시까지 하나님께 기도하는 구국 기도회 운동을 개시합니다.

이 당시 ‘황성신문’은 위국 기도문을 읽고 다음과 같은 논설을 발표합니다.

“며칠 전에 연동예수교회에서 우리 대한이 하늘의 보호하심을 받아 지구상 독립국이 확실히 됨을 원하여 위국기도문 1만 장을 인쇄하며 전국에 배포하고 매일 하오 3시부터 4시까지 기도한다 함은 본보에 이미 보도하였거니와, 내가 동일한 국민으로 그 위국 기도하는 경건성에 대하여 실로 감탄 찬하할 뿐더러 무릇 세인의 선과를 찬양하여 천하를 권유하는 것은 역시 기자가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

 

이처럼 신문사에서도 이 당시 연동 장로교회에서 시작한 위국 기도회에 찬사를 보내었습니다. 물론 유교 세력이 주도한 <대한매일신보>도 한국의 희망이 기독교에 있음을 천명했습니다. 어떤 분은 다음과 같은 글도 기고했습니다.

“국가를 부하게 하고 민을 강하게 하는 그리스도교를 숭봉할지어다.”

 

물론 독립선언문 서명인 33명 중 16명이 개신교도임을 잘 아실줄 압니다.

 

여기까지 옥성득 교수님의 항일운동에 대한 글을 참고하였는데 그는 그 챕터를 다음과 같이 마칩니다.

“서울의 연동장로교회와 상동감리교회의 개혁파 청년들이 주도한 기도회는 독립 국가 형성이라는 당대의 정치 의제가 예언자적 신앙과 결합되면서 점화된 개신교 항일 민족 운동의 첫 봉화였다. 그 불은 일제시대 40년 해방 이후 60년 동안 꺼지지 않고 타올랐다.”

 

하나님께서도 36년의 일제강점기 시대가 마치고 한민족이 해방된 것을 기뻐하셨을줄 압니다. 특히 그 일에 젊은 기독 청년들이 앞장 선 것을 보시며 만족해 하셨으리라 봅니다. 왜냐하면 한민족의 문화 안에 그리스도를 향한 빛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문화와 같이….

 

이를 확증하는 것이 예루살렘 곧 시온성에서 열렸던 오순절 잔치입니다. 오순절을 맞이하여 온 세상 방방 곡곡에서 자기의 언어와 문화를 갖고 온 것입니다. 함께 성령의 강림을 시온 성에서 체험한 것입니다.

이유는 모든 문화는 시온성으로 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로 향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첫 열매이십니다.

 

그러므로 8/15 77주년을 맞이하여 이런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한국의 기독교는 개인뿐 아니라 민족 공동체의 소중함을 절실히 깨닫고 그의 소명을 다했습니다. 고라의 자손들처럼…. 이제는 우리들에게 이 소명이 주어졌습니다.

아니 우리들에게는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소명을 주셨습니다. 한민족의 문화만 아니라 모든 민족의 문화를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모든 문화는 시온 성에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이웃 문화권 사람들과 손의 손을 잡고 시온 성으로 향하여 행진하십시다.

 

말씀을 거둡니다.

처음에 ‘아리랑’에 대해서 말씀드렸는데, 실은 아리랑의 멜로디가 영어 찬송가 6개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저희 미국 장로교 찬송가에는 346장입니다.

물론 가사는 우리 아리랑 가사는 아니지만 아리랑 멜로디에다가 영어 가사를 붙여서 찬송가가 된 것입니다. 영어 제목은 ‘Christ: You Are the Fullness’.

 

오래전 아일랜드에서 한 영성가가 보스톤 노회를 방문했었는데 그 때 아리랑 멜로디의 찬송을 인도하셨습니다. 그 분이 하시는 말씀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아리랑은 universal melody’라고 말했습니다. 많은 노래들이 잠시 왔다 가지만 아리랑 곡조는 우주적 곡조라는 것입니다.

 

곧 우리는 아리랑 곡조를 따라 시온 성으로 향하는 위대한 민족이 아닐까요? 그리고 우리뿐 아니라 모든 민족에는 이런 곡조가 있지 않을까요?

 

다른 민족들이 아리랑을 찾아 내었다면 우리도 다른 민족 문화 안에서 그리스도의 그림자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왜냐하면 언젠가 모든 민족이 모여 각자의 최고의 노래로 하늘 나라를 우렁차게 가득채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고백합니다.

“노래하는 자와 뛰어 노는 자들이 말하기를 나의 모든 근원이 네게 있다 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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