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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는 나의 목자” 시편 23: 1-7 (01/22/2023)

요즘 많은 분들에게 사랑을 받고 계신 나태주 시인의 대표시 ‘풀꽃’입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봐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이 시로 유명해진 후 공주시에서는 이 시의 이름을 따서 ‘공주 풀꽃 문학관’을 개설했습니다. 나 시인은 평생을 초등학교 교사로 봉직하셨습니다. 물론 교장까지 지내셨습니다. 이처럼 귀한 시를 쓰게 된 가장 큰 이유를 어린이들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나 시인은 기독교인인데 그래서 기독교 방송에 출연하여 당신의 이야기를 나누셨습니다. ‘풀꽃’시를 소개한 후 이 시를 쓰게 된 경위를 나눕니다.

처음에는 어린이들이 말을 안 들어서 많이 힘드셨다고 하십니다. 좋은 면 보다는 나쁜 면이 훨씬 많이 눈에 들어 온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이처럼 한심한가’ 생각이 많이 들으셨을줄 압니다. 그러던 중 깨닮음이 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를 지으셨다고 합니다.

역설적입니다. 어린이들이 말을 잘 들었더라면 이렇게 모든 사람의 가슴을 울리는 시는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시편 강해 마지막으로 시편 23편을 나눕니다. 지난주에 어느 교우님이 오늘 23편을 나눌 것을 주보에서 보신 후 저에게 “23편을 어떤 insight를 가지고 말씀하실지 기대가 됩니다”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을 듣고나니 부담이 크게 다가왔습니다. 잠시 후회도 되었지만 ‘그래도 시편 강해 중 23편은 빼어 놓을수는 없지’ 생각하며 마음을 추수렸습니다.

 

제가 나태주 시인의 ‘풀꽃’을 먼저 소개해 드린 이유가 있습니다. ‘풀꽃’시는 도리어 말 안 듣는 짓꿎은 어린이들을 교육시키다가 나온 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미운 어린이들을 통해 도리어 모든 어린이들 안에 있는 예쁜 것을 보게 되신 것입니다.

다윗도 23편 이 위대한 시를 짓게 된 계기는 나태주 시인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상상하며 이 시를 저는 오늘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다윗의 이 위대한 시는 왕궁에 살면서 쓰지 않았으리라 봅니다. 자주 말씀드리지만 다윗은 10년간 사울왕에게 쫓겨서 광야에서 도망자로 살아갑니다. 그러니 모든 것이 부족했을 것입니다. 없는 것 천지입니다. 모든 것이 그토록 갖고 싶습니다. 먹을 것, 입을 것, 친구, 무엇 보다도 집…. 이 부족함을 이길수 있었던 유일한 길은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이런 관점에서 나머지 시를 읽으면 금방 머리에 떠오릅니다. 다윗의 삶 속에서 만난 하나님은 목자와는 거리가 먼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곧 다윗은 허구한 날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를 그리워합니다. 자기가 있는 곳은 험한 곳이니…. 그뿐 아닙니다. 영혼의 피폐함도 종종 느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자주 거쳐야 했습니다. 수많은 원수들을 만나곤 했습니다.

이처럼 도저히 여호와께서 목자라면 겪지 않을 경험을 하고 또 하고 또 하곤 했던 것입니다. 자기의 삶은 부족으로 없는 것으로 가득 넘쳤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목자라고 부를수 없는 현장에서 그는 놀라운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어느덧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2절,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다윗은 부족함 가운데서 여호와를 목자라고 고백하는 순간 하나님과 놀라운 관계로 발전하게 됩니다. 여호와가 목자면 자기는 무엇이 되죠? 목자의 양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종종 부부관계 세미나 하시는 분들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남편을 왕으로 생각하라고 그러면 아내는 왕후가 된다고…. 물론 거꾸러도 가능하겠죠. 다윗은 놀라운 지혜를 발휘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다윗은 원래 목동이었습니다. 곧 어린 목자였습니다. 누구 보다도 목자와 양의 관계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목자인 자신이 양들에게 어떤 마음을 갖고 있고 어떻게 해 왔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바로 목자인 자신과 양들의 관계가 여호와와 자신의 관계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목자는 늘 양들을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합니다.

 

한편 다윗은 양의 많은 특징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양의 특징을 생각하면서 이 시를 지은 것입니다.

첫번째 양의 특징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장신대 구약학 교수이셨던 장영일 교수님의 자료를 많이 사용했습니다. 첫번째 특징은 먹어도 먹어도 배부르지 않습니다. 곧 양들은 항상 배고픈 것입니다. 항상 뭔가 부족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를 목자로 고백하는 순간 배고픔은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목자는 누구보다도 양들의 배고픔을 잘 압니다. 그러기에 자기가 늘 그래왔던 것처럼 여호와는 자기를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실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배고픔 가운데서 고백하곤 했던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는 하나님의 양이 되어 간 것입니다. 결국 그의 삶은 풍족함으로 채워질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양으로서 두번째 축복을 고백합니다. 3절,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양의 특징은 늘 배고픈 것인데 다윗도 자신의 이 모습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배고픔 때문에 종종 생기는 부작용이 있습니다. 요즘 이스라엘에 관광객들이 많아지면서 관광객들이 버린 플라스틱까지 양들이 집어 삼켜서 창자가 찢겨 죽는 사태도 종종 일어난다고 합니다.

 

곧 다윗도 배고픔 때문에 종종 실수도 했을 것입니다. 사실 왕이 된 후 물질의 배고픔이 아닌 다른 배고픔이 다윗을 늘 괴롭혔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밧세바와 간통한 것이고요…. 이 일은 왕이 된 후에 생긴 일이지만 이처럼 다윗도 실수할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 가운데 살았던 사람임은 틀림 없습니다.

 

한편 목자는 양들의 약점들을 너무나 잘 압니다. 그들의 실수를 자주 자주 보아왔습니다. 그래서 당신을 목자로 삼는 양들을 목자는 다시 그 영혼을 소생시키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당신의 양들이 그냥 죽는다면 목자의 이름 곧 여호와의 이름이 크게 손상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목자되신 하나님은 어떻게든 살리십니다.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런데 그 의의 길은 어떤 길일까요? 꽃길일까요? 4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말씀드렸습니다. 양은 식성이 좋다고…. 양들은 보이는 것마다 먹어치웁니다. 그래서 플라스틱까지 먹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양들이 지나가는 곳에는 풀의 씨도 다 마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목자들은 양들을 한 곳에 오래 있게 하지 못합니다. 씨도 없이 다 처리하기 전에 움직여야 합니다.

어쩔수 없이 때로는 음침한 골짜기로 내려 보내십니다. 음침한 골짜기가 의의 길인 것입니다. 다윗은 평생 음침한 골짜기를 여러번 경험해 보았습니다. 한편 골짜기를 지나고 나면 늘 기억나는 것이 있었습니다. 도리어 그 때 주님이 더욱 함께 하셨음을….

 

그런데 이를 어떻게 알았을까요?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지팡이, 막대기 비슷한 것 같은데 실은 번역이 좀 잘 안된 것 같습니다. 앞에 것은 곤봉입니다. 짐승들을 때려 잡는 곤봉…. 뒤에 것은 양이 잘 못 가지 않도록 하는 것인데 끝이 둥글게 된 것은 양의 목을 걸어서 끌어 올리는 것입니다.

 

한편 양은 심한 근시입니다. 한 치 앞도 내다 보지 못합니다. 자기를 잡으려는 짐승을 보지 못합니다. 이 때 목자가 사용하는 것이 곤봉입니다. 한편 앞을 잘 못 보기에 엉뚱한데로 빠지기 싶상입니다. 이 때 목자의 긴 막대기가 필요합니다. 때로는 둥근 끝으로 잘 못 갈 때 목에 걸어 끌어 당깁니다.

 

여기서 양의 특징을 정리해 볼까요? 식성이 좋아서 항상 배고프고 모든 것을 먹습니다. 시력은 심한 근시입니다. 정말로 목자들의 희생적 돌봄이 늘 필요합니다.

 

이처럼 목자되신 하나님은 양들을 끝까지 보살피십니다. 이것만으로도 하나님은 찬양받으시기 합당하십니다. 그러나 다윗은 목자와 양과의 관계로 설명할수 없는 체험도 하였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이 시의 하이라이트일지 모릅니다. 5절,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어떤 주석가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자기를 괴롭히던 원수와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원수를 감옥에 가두어 놓고 잔치를 베푸는 장면으로 설명합니다. 이는 양들이 절대로 경험할수 없는 것입니다. 다윗은 양들이 경험할수 없는 축복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이런 표현을 하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요즘도 근동 지방 광야에 사는 유목민들이 갖고 있는 아름다운 전통이 있다고 합니다.

광야에 방황하는 사람은 과거를 묻지 않고 영접한다고 합니다. 실은 요즘도 범죄자들이 도시를 피해 광야로 도망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경찰들 손에 잡히면 어쩔수 없지만 광야에 사는 유목민을 만나면 살수 있다는 것입니다.

유목민들은 이들을 ‘guest of God’(하나님의 손님)이라고 생각하고 영접한다고 합니다. 모든 필요한 것을 채워줍니다. 머리에 기름도 부어주고 잔에 가득 마실 것을 채워 줍니다. 곧 유목민의 텐트는 구원의 텐트가 되는 것입니다. 과거를 묻지 않는 텐트입니다. 이 텐트는 바로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텐트인 것입니다.

곧 이는 동물인 양들이 경험할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양들만 경험할수 있는 주님의 텐트인 것입니다.

한편 주님은 구원의 텐트에 들어 온 양들을 그냥 두시지 않습니다. 텐트에서 먹고 놀게 놓아 두시지 않으십니다. 6절,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선하심과 인자하심’하니 기억나시는 분들도 계실줄 압니다. 신년 주일 설교시 저희 교회 올해 표어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말씀을 드릴 때 본문 말씀에 나오는 후렴이 있습니다. 136:1절,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마지막 절 (136:26),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구원의 텐트에 들어와서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을 주님은 영원한 여호와의 집으로 인도하십니다. 아니 몰아 가십니다. 이를 위해 목자가 되신 것입니다. 영원한 집으로 몰아 가시기 위해서 주님은 두 양치는 개를 선물로 주십니다. 두 개들의 이름은 “선하심”과 “인자하심”.

 

제가 오래 전 뉴질랜드에 회의차 방문했다가 목장이 있는 마을에 가 보았는데 ‘양치는 개’ 동상이 세워진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안내인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이 개가 양들을 지키다가 순교를 당했냐고….

그것이 아니고 양치는 개들이 자기들을 먹여 살렸기 때문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만들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동상 하나를 만들었는데 실은 우리들은 두 동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봅니다. ‘선하심’이라는 개의 동상, ‘인자하심’이라는 개의 동상.

늘 오늘도 이 두 개들이 우리를 귀찮게 굽니다. 왜? 영원한 집으로 우리를 몰아가시기 위하여…. 주님은 못난 우리와 영원히 같이 사시기 원하십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양들보다 못한 자들입니다. 양들이 먹는 풀꽃 보다도 못한 자들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호와를 목자로 고백할 때 놀라운 축복이 임합니다. 주님은 나태주 시인을 통해 우리들에게 고백하시지 않으실까요?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봐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그러기에 주님은 우리와 영원히 함께 사시기 원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보신다면 우리도 서로 이런 고백을 하여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도 영원히 한 공동체가 되어 함께 살텐데 주님과 더불어….

그러니 서로의 안에 있는 멋진 풀꽃의 아름다움을 느끼며 1년 내내 함께 고백하십시다.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말씀을 거둡니다.

시편 강해를 마감하며 칼 바르트의 글을 소개해 드립니다.

“우리는 세상에 어떤 일도 주님의 주권과 관계 없이 생겨날 수 없음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주님은 결코 자리를 비우시지도 않으시고 수동적이거나 무반응이거나 능력이 없지 않으시다. 도리어 언제나 함께 하시고 능동적이시고 책임을 지시고 전능하시다. 그는 결코 죽지 않으시고 언제나 살아 계시고; 주무시지 않으시고 항상 깨어 계시며; 결코 관심 없지 않으시고 언제나 주목하시고; 목적없이 기다리시지 않으시고, 도리어 기다리는듯 하고 양보하는듯 하는 때에도 언제나 주도권을 잃지 않으신다. 이처럼 주님은 피조물과 함께 하신다.”

 

힛틀러의 만행을 목격하면서 그는 도리어 이런 위대한 글을 남긴 것입니다. 아마도 시편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요? 특히 시편 23편.

 

다윗은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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