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라는 시를 소개해 드렸습니다. 오늘은 ‘풀꽃2’를 소개해 드립니다.
이름을 알고 나면
이웃이 되고
색깔을 알고 나면
친구가 되고
모양까지 알게 되면
연인이 된다.
아, 이것은 비밀
이웃이 되고 친구가 되고 연인이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시의 최고의 매력은 제일 마지막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 이것은 비밀.’
지난주까지 시편 강해를 마치고 오늘 부터는 주님의 비유를 차례로 나누고자 합니다. 비유에 대한 강해를 어떻게 시작할까 고심하다가 문득 또 다시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 생각이 났습니다. 아니 ‘풀꽃2’가 생각이 났습니다. 특히 마지막 귀절,
‘아, 이것은 비밀.’
비유 첫 강해 설교를 하면서 이 시를 소개해 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8장에 보면 제자들이 비유에 대해서 궁금해 하니 이렇게 답변하십니다. 누가복음 8:10절,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물론 얼뜻 들으면 ‘속시원하게 말씀하셔서 많은 사람들이 듣고 깨닫고 믿게 하셔야 하지 않으시나…’ 생각이 드실줄 압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비유 하나 하나씩 살펴 가 보시면 점차 주님께서 왜 이렇게 표현하셨는지 이해가 되실줄 압니다. 그런데 하나 확실한 것이 있습니다.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곧 비유가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알리는데 가장 적합한 방법 내지 쟝르라는 것입니다.
이로서 알수 있는 것은 비유를 접할 때마다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어떤 모습을 말씀하시는 것인가 궁금증을 안고 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의 비유를 만나 볼까요? 1, 2절,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세리와 죄인들의 모습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모습이 완연히 차이가 납니다. 세리와 죄인들은 순수히 말씀을 들으러 주님께 나왔습니다. 뭔가 영적으로 심히 목말랐음에는 틀림없습니다. 한편 2절에 보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립니다.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바리새인들의 말을 통해 추측할수 있습니다. 주님은 순수히 말씀을 듣기 위해 찾아 온 세리와 죄인들을 위해 말씀을 들려 주시기 전에 먼저 식탁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그리고 같이 앉으셨습니다.
많은 경우 말씀 후 친교를 나누는데 이는 믿는 자들에게는 통합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반대가 되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주님은 말씀이 그리워 찾아 온 세리와 죄인들에게 먼저 식사 자리를 마련하신 것입니다.
반면 바리새인들에게는 함께 앉자고 하시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물론 앉자고 해도 않 앉을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죄인들과 같이 앉을수 없는 그야말로 구별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의 뜻이 ‘구별된 사람’입니다.
이제 주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들으라고 죄인들과 식사하시다가 말씀하십니다. 4절,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너희 중에’로 시작하는 것을 봐서는 당연히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곧 갑자기 식사 중에 주위에 서 있는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목자의 이야기를 꺼내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재미 있게 표현하십니다. ‘목자’라는 말은 쓰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로 시작합니다.
물론 한글 번역은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로 번역되어 있지만, 원어로 보면 ‘어떤 사람이 너희 중에’로 되어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는 이유는 시의 한 단어 한 구절이 시의 내용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비유도 그에 못지 않습니다. 모든 비유에도 시 못지 않게 대수롭지 않게 보이는 단어나 귀절이 그 비유가 나타내고자 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큰 역할을 하곤 합니다. 어떻게 보면 주님이니 만들어 내실수 있는 문학적 기교라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다시 이 장면으로 들어가 볼까요? 식사 중에 주님은 바리새인들을 보면서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너희 중 어떤 사람이…” 그러면 바리새인들은 귀가 솔깃합니다. “우리들 중에 한 사람을 지칭하려는가 보다….”아마 주님은 잠시 pause하셨을지 모릅니다. 그리고는 계속 말씀하십니다.
“양 백 마리가 있는데….”
이처럼 주님은 비유 마지막까지 ‘목자’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사실 이렇게도 말씀하실수 있으셨습니다.
“양 백 마리가 있는 한 목자가 있는데….”
그렇다면 바리새인들은 처음부터 귀를 닫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느 주석가는 말합니다. 바리새인들은 목자들을 멸시했다고…. 그래서 주님은 목자라는 말을 빼고 그들이 멸시하는 목자의 이야기를 들려 주고 있는 것입니다.
곧 주님께서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라고 했으니 바리새인들은 자기들 이야기인 줄 알고 귀가 솔깃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이어가십니다.
“양 백 마리가 있는데”
바리새인들은 일단 귀가 솔깃했으니 어쩔수 없이 끝까지 듣게 됩니다. “속았구나” 하면서…. 주님은 모른척 하시며 계속하십니다.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이 당시 목자들은 하루 종일 양을 치다가 저녁이 되어서 양들을 센다고 합니다. 곧 하나가 없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해가 거의 지고 있는 어둠이 깃들기 시작한 저녁 시간인 것입니다.
주님은 다시 pause를 취합니다. 바리새인들 머리에는 수많은 생각이 오고 갑니다. 순간 머리에는 계산기가 쭈르륵 돌아 갑니다. “이미 저녁이 되었는데 어떻게 찾을수 있을까? 만일 그 한 마리를 찾으러 나선다면 양 99마리는 어떻게 되나? 한편 밤이 닥아오는데 짐승을 만나면 양은 물론이고 우리 중 어떤 사람이 먼저 짐승의 밥이 될지도 모르는데….”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이에 청중은 두 그룹으로 갈라집니다. 한 그룹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양 99마리가 더 중요하지…. 양 한 마리를 구하려다가 자신의 목숨도 잃고 그러면 99마리도 결국은 다 잃게 되는데….’
청중은 어리석은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곧 어리석은 목자의 이야기를 예수라는 청년이 하고 있으니 이 예수도 어리석은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청중은 더욱 귀를 기울입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야기입니다. 도리어 이 어리석은 사람과 같은 사람이 필요한 세상이 아닌가 라는 생각까지 들었을지 모릅니다. 그동안 너무 숫자와 계산에 매여서 살다가 늘 지쳐 있었던 삶을 시원하게 뚫어주는 느낌을 받습니다.
실은 바리새인들은 종교적 곧 율법적인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모든 사람을 율법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평가합니다. 율법을 모르고 율법대로 따라 행하지 않는 사람들은 버림받아 마땅한 자들입니다.
그들의 목적은 율법을 잘 가르쳐서 율법을 따르는 숫자를 많게 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가르쳐도 쫓아 오지 못하는 자들은 버림받아 마땅한 자들입니다. 100명을 가르치고 99명만 따라 온다면 대 성공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라는 청년이 말하는 ‘어떤 사람’은 정말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지난주 잠시 언급해 드렸는데 양의 여러 특성 중 하나가 청력이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청력은 좋은데 만일 가시에 찔리면 청력이 상실된다고 합니다. 우리 사람들이 죄를 지으면 영적 청력이 상실되는 것과 아주 흡사합니다.
자, 밤에 양은 시력이 나쁘니 분명 가시덤불에 찔려 있을 것입니다. 가시에 찔렸기에 청력도 상실합니다. 목자의 목소리도 듣지를 못합니다. 결국 홀로 울다가 지쳐서 가시덤불에 쳐박혀 있기 십상입니다. 그러니 그 밤중에 잃은 양을 찾아 나선다는 것은 어리석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어겨서 가시에 찔려 있는 양들은 구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직 가시에 찔리지 않은 99마리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더 이상 이 비유를 듣고 싶지도 않습니다. 주님은 이 때다 계속 말씀하십니다. 5절,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아직 말씀드리지 않은 양의 특징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양은 지극히 소극적이고 게으른 짐승이어서 항상 더러운 자신의 몸을 청결케 할 의지도 능력도 없기에 목자가 목욕시켜 주지 않는 한 몸에 덮인 오물로 인하여 악취 덩어리가 될 수 밖에 없다고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아연실색을 하게 됩니다. “더러운 양을 어깨에 메고 즐겁게 돌아 오다니….” 이런 말을 하는 예수라는 청년도 목자와 똑 같이 어리석고 무지한 더러운 인간으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깨끗한 것을 좋아합니다. 이 바리새인 때문에 이 당시 정결 예식이 극에 달했었습니다. 누구나 외출했다가 집에 오면 최소한 손을 씻어야 했고 부자들은 목욕을 하곤 했습니다. 더러운 것을 씻어 내려고….
하지만 이제는 호기심이 생겼을지 모릅니다. “갈 데까지 갔는데 이젠 그들의 어리석음이 어디까지 가나 보자….”계속 귀를 기울입니다. 6절,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정말 기가 막힙니다. 양 한 마리를 잃은 사람도 그렇고 이렇게 말하는 예수라는 청년도 그렇고…. 생각해 보십시다. 저녁에 양 한 마리가 없어진줄 알았고 양을 찾기 위해 찾고 또 찾았으면 한 밤중에야 집에 돌아 왔을 것입니다.
한 밤 중에 벗과 이웃을 부른다…? 아니면 밤 새껏 찾다가 새벽이 되어 집에 돌아 왔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아침 일찍 부터 이웃을 부른다…? 제 정신이 아닙니다.
그런데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것은 벗과 이웃을 불러서 즐긴다면 맨입으로 즐긴다는 말일까요? 양 한 마리 보다 더 훨씬 더 돈이 들어 갔을 것입니다. 돼지나 소를 잡았을 것입니다.
사실 이 비유는 양 잃은 목자로 시작했다가 양으로 마칩니다. 아니 잃은 양이 주인공이 됩니다. 잃은 양 한 마리로 인해서 엄청난 돈을 목자는 쓰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주인공이 양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는 쓰레기 보다 못한 양인데….
아니 두 주인공이 나온다고 봐야 합니다. 첫 주인공은 바리새인들이 멸시하는 목자, 두번째 주인공은 구렁텅이에 빠진 잃은 양. 둘다 바리새인들이 멸시합니다. 그런데 항상 마지막 주인공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닙니까?
바로 잃은 양이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말 잘 들은 99마리가 아니고…. 이것이 비밀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 이 놀라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어리석은 목자를 통해서 밝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한국에서 대학생 시절 영락교회 대학생회를 다니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수원 딸기 밭에 전혀 알지 못하시는 분이 대학생회 임원들을 초대해 주셨습니다. 물론 저는 모르는 분이지만 저희 대학생회를 잘 아는 분이셨던 것 같습니다.
8명쯤이 시외버스를 타고…, 물론 요즘 같으면 수원까지 시외버스를 탈리는 없겠죠, 1970년대 이야기입니다. 시외버스에서 내려서 택시를 타고 딸기밭에 갔습니다. 친히 택시비도 내어 주시고 딸기도 실컷 먹게 해 주셨습니다.
70년대 그 때만해도 북한이 더 잘 살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 분도 그렇게 부자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전혀 알지 못하는 대학생들을 초대해서 택시비까지 대어 주셨는데 종종 그 분의 생각이 떠 오릅니다. 왜 그러셨을까?
이번 주 설교 준비를 하면서 그 분의 모습이 자주 떠 올랐습니다. 사실 그 후 한번도 만난적도 없습니다. 이름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냥 아름다운 추억만을 저희들 대학생들 뇌리에 남겨 놓으셨습니다.
어리석은 목자가 아니었을까요? 전혀 계산하지 못 하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이 분 보다 더 어리석은 분은 당연히 주님이십니다. 주님도 어리석은 목자가 되셔서 밤 중에 험한 골짜기를 헤메셨습니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멀리 가실수록 99마리 양떼와는 더 멀어지십니다. 아니 그뿐 아니라 돌아올수 있는 확률이 점점 더 내려 갑니다. 물론 주님은 선한 목자가 되셔서 잃은 양을 끝까지 찾으셨습니다. 죽음을 통해서 찾으셨습니다. 아니 주님은 당신의 죽음을 통해서 잃은 양들을 찾으실 것을 이 짧은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이 비유의 결론을 내리십니다. 7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잃은 영혼 한 영혼이 한 영혼이 구원받을 때마다 하늘에서는 계산이 불가능한 잔치가 벌어짐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도 비밀입니다. 그런데 이 비밀은 십자가의 비밀을 믿는 자들에게는 열려 있는 비밀입니다.
비유에 대해서 결론적으로 한 가지 말씀드립니다. 비유는 청중을 둘로 나눕니다. 들으면서 분노하는 사람, 들으면서 통쾌하게 웃는 사람…. 비유 안에 있는 비밀을 깨달은 자들은 통쾌하게 웃습니다.
그러나 분노하는 자들도 십자가 앞에 나올 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듣게 됩니다. 그들도 잃은 양이기 때문입니다.
올해 이 비밀의 주인공들이 되십시다. 잃은 양을 찾아 가십시다. 어리석은 잔치를 베푸십시다. 하나님 나라를 만끽하십시다. 통쾌하게 웃읍시다. 어리석은 어떤 사람이 되십시다.
선한 목자이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