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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은 아들, 잃은 아들?”: 누가복음 15:11-32 (2023. 2. 19)

“찾은 아들, 잃은 아들?”

(누가복음 15:11-32)

정채봉 시인의 ‘만남’이라는 시를 먼저 나눕니다.

가장 잘못된 만남은 생선과 같은 만남이다.

만날수록 비린내가 묻어 오니까.

 

가장 조심해야 할 만남은 꽃송이 같은 만남이다.

피어 있을 때는 환호하다가 시들면 버리니까.

 

가장 비천한 만남은 건전지와 같은 만남이다.

힘이 있을 때는 간수하고 힘이 다 닿았을 때는 던져 버리니까.

 

가장 시간이 아까운 만남은 지우개 같은 만남이다.

금방의 만남이 순식간에 지워져 버리니까.

 

가장 아름다운 만남은 손수건과 같은 만남이다.

힘이 들 때는 땀을 닦아 주고 슬플 때는 눈물을 닦아 주니까.

교우 여러분은 어떤 만남의 삶을 사시고 계십니까? 금주 수요일부터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이번 사순절 기간 특별히 손수건과 같은 만남의 주인공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축복을 누리시게 되길 바랍니다. 특별히 오늘의 말씀인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손수건과 같은 만남의 삶은 어떤 삶인지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너무도 잘 알려진 이야기인데 그럴수록 처음 접하는 이야기인냥 대할 때 새로운 은혜가 임하게 될줄 압니다.

비유를 해석할 때 꼭 염두에 두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이 비유를 말씀하실 때 누구에게 하신 말씀인가를 우선 생각해야 합니다. 곧 주님은 누구가 들으라고 말씀하시고 계신가를 주위 깊게 살펴야 합니다.

오늘의 비유의 청중은 지난번 잃은 양 한 마리의 비유를 말씀하셨을 때의 청중과 동일합니다. 15: 2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물론 제자들과 죄인과 세리도 함께 들었지만 가장 중요한 청중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이를 염두에 두시고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12절,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둘째 아들은 언젠가 자기가 받을 유산을 먼저 달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이 때 이를 듣는 모든 사람은 주먹을 불끈 쥐었을 것입니다. 바리새인이나 제자나 죄인들까지….

유산을 먼저 달라는 것은 한 마디로 아버지를 죽이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멍청한 아버지는 그 아들의 소원을 들어줍니다. 둘째 아들뿐 아니라 첫째 아들에게도 나눠 줍니다. 아버지는 스스로 아버지 됨을 포기하시는 것입니다. 포기라는 말이 부담스럽다면 양보하시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가슴에는 큰 못이 박힙니다.

그런데 얼마나 방탕하게 살았는지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게 생활을 해서 재산을 낭비합니다.

이에 청중은 생각합니다. “그러면 그렇지 그 아버지의 그 아들…. 어떻게 아들에게 유산을 내어 줘 당연히 낭비하지…. 아버지가 멍청해서 그래….”

업친데 덥친 격으로 그 먼 나라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겨우 찾은 일자리가 돼지를 치는 것입니다. 돼지 쥐엄 열매 조차 구하기 어려우니 결단을 내립니다. 마음을 돌이켜서 아버지에게 돌아 가기로 합니다. 이미 아버지의 유산을 받았으니 곧 아버지를 죽였으니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 될수 없음을 알고는 일꾼으로 써 달라고 요청하기로 합니다. 아버지 집으로 향합니다. 20절,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아들을 보고 달려옵니다.

사실 중동문화에서는 아버지의 위치는 대단한 것입니다. 요즘도 중동지방에서는 남자의 위치는 대단합니다. 그렇다면 이 당시는 어떻겠습니까? 더군다나 아버지의 위치는…. 아버지는 어떤 일이 있어도 뛰어서는 안 됩니다. 이는 남자의 위신을 손상하는 짓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달려 나오고 있습니다. 이를 들으면서 또 청중은 반응합니다.

“역시 멍청한 아버지이네 아들에게 유산을 내어 준 것도 부족해서 자기를 죽인 아들을 보고 뛰어나가…?”

고개를 설레 설레 흔들면서 이야기를 듣습니다. 다음에는 어떤 멍청한 짓을 하려나 슬며시 기대하면서….

멍청한 아버지는 아들을 껴안습니다. 모든 것을 용서하고 새롭게 같이 살아보자고 결단함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뿐 아닙니다. 돌아온 아들을 위해 최고의 잔치를 베풉니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깁니다.

주석가들은 옷을 입힌 것은 다시 아들의 옷을 입혔다고 보고 있습니다. 아들됨의 회복입니다. 가락지는 왕권을 회복한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전에 갖지 않았던 왕권까지…. 신을 신긴 것은 더이상 노예가 아니고 자유인이 된 것을 상징한다고 해석합니다.

청중은 도저히 아버지의 행동을 이해 못 하겠다는 듯이 비유를 베풀고 있는 주님을 노려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자녀들을 이렇게 대우하게 되면 자녀들은 계속 버릇이 나뻐질테고 끝 없이 문제가 생길 것을 예상하면서 큰 우려를 나타내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웃의 자녀들까지 영향을 미칠 것은 기정 사실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청중들의 관심을 사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25, 26절,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마지막 희망은 맏아들입니다. 맏아들에게 기대해 봅니다. 기대했던대로 맏아들은 종의 이야기를 듣고 집에 들어가기를 거절합니다. 당연히 청중들은 신났을 것입니다. 당연히 이 돌아온 탕자는 혼 내 줘야 합니다. 이것은 이 집의 문제가 아니라 온 이웃의 아들들의 문제로 번질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맏아들은 현명합니다.

한편 맏아들은 아버지에게 동생을 받을 수 없는 이유를 일목 요연하게 설명합니다. 청중은 동감합니다. 그러나 맏아들의 논리에 아버지는 까딱 안 합니다. 도리어 아버지는 말합니다. 32절,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아버지는 자신의 멍청함을 고집합니다. 그래도 청중은 끝까지 기대합니다. 맏아들에게…. 아버지에게 한바탕 해대기를…. 정 안되면 집을 떠나기를….

그런데 비유는 여기서 멈춥니다. 나머지는 청중의 상상에 맡기는 것입니다. 이에 청중은 둘로 나뉘어집니다.

한 그룹은 바리새인들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맏아들은 동생이 했던 것처럼 집을 떠납니다. 맏아들도 아버지를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그룹은 반대로 상상합니다. 맏아들은 아버지의 관대함에 감동하며 자신의 모습이 잘 못 되었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잔치 자리에 참여합니다.

교우 여러분은 어느 그룹에 속하십니까?

한편 이로서 알수 있는 것은 이 비유의 주인공은 둘째 아들이 아닙니다. 그는 돌아온 탕자가 되어서 이미 모든 것을 회복하였습니다. 이 비유의 주인공은 엑스트라처럼 마지막에 등장하는 맏아들입니다.

주님은 바리새인들을 염두에 두고 이 비유를 베푸신 것입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님도 이 비유에 대해서 글을 쓰셨는데 다음과 같은 자신의 이야기를 먼저 소개합니다. 25살 대학원생일 때 무릎 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술 후 한 달 후에는 걸을수 있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희망에 차 있었습니다. 그동안 늘 불편하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병원에 있을 때 staphylococcus 균에 감염이 되었습니다. 거의 죽을뻔 하였고 한 달이 아니라 18개월간 걸을 수 없었습니다.

이 때 처음으로 의학용어 하나를 배우게 되었다고 합니다.

‘iatrogenic.’

이는 의사를 비롯 병원에서 걸린 병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Iatros’는 의사라는 뜻입니다.

병 치료를 위해 병원에 입원을 하였는데 원래 병 보다도 더 중한 병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대개 병원에서 옮긴 병은 원래 병보다 더 치료가 어렵습니다.

목회자가 된 후 피터슨 목사님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결론을 내립니다. 물론 교회가 병을 치료합니다. 그러나 치료하는 교회가 더 큰 병을 줄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를 주님은 너무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이 당시 유대교의 iatrogenic의 역할자라는 것입니다. 곧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맏아들과 같다는 것입니다.

사실  동생이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왔습니다. 그것까지 좋은데 모든 특권을 회복시키십니다. 맏아들은 분노합니다. 물론 맏아들의 분노는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맏아들의 분노는 하나님의 나라에 방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iatrogenic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것이 실은 iatrogenic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유대교는 물론 오늘날 교회에도 다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맏아들이 iatrogenic이 되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크게 기여할수 있을까요? 이에 대한 정답은 오늘 비유 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둘째 아들의 고백에 놀라운 치료약이 담겨져 있습니다. 17절,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스스로 돌이켜’는 곧 회개를 뜻합니다.

둘째 아들은 먼저 회개한 것입니다. 이제 아버지는 맏아들의 회개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을 때 그는 iatrogenic의 주범이 되는 것입니다.

한편 회개하는 바리새인들을 통해서 얼마나 놀라운 역사가 펼쳐질까요? 대표적인 사람이 예수님을 밤중에 찾아온 니고데모라고 생각됩니다. 니고데모는 주님이 죽으신 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가져 와서 주님의 장례를 치루기도 했습니다. 니고데모는 자신의 손수건에 몰약과 침향을 발라 주님의 몸을 닦았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마지막 시간에 함께 한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다시 정채봉 시인의 시 중 마지막 연을 나눕니다.

가장 아름다운 만남은 손수건과 같은 만남이다.

힘이 들 때는 땀을 닦아 주고 슬플 때는 눈물을 닦아 주니까.

얼마전에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세미나가 열렸는데 저는 교단 소식지를 통해서 접해 보게 되었습니다. LA에 2세 교회로 잘 성장하는 젊은 목회자가 자신의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발표하였습니다.

처음에 목회를 하다가 힘들어 잠시 쉬고 성경공부 그룹만 인도하다가 몇 년 쉬고 다시 목회를 시작하고 현재 8년째 접어 들고 있습니다.

교회는 주변 사람들과 소통해야 함을 느끼면서 여러가지 사역을 잘 펼친 결과 많은 열매를 맺고 있음을 볼수 있었습니다. 한편 1세 어른들의 목회도 존중하고 있었습니다. 1세 교회의 영성에서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목회관을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만일 복음주의적 목회를 하려고 한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회개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보지 못하고 마음 속에 스쳐가는 것들을 느끼지 못한다면 복음을 제대로 증거할수 없습니다.

저는 젊은 2세 목회자의 이 고백에서 깜짝 놀랐습니다. 이 교회가 잘 되고 있는 것의 가장 중심에 있는 것은 바로 ‘회개’였습니다.

회개의 눈물이 있는 교회는 치유하는 교회인 것입니다. 결코 병 주고 약 주는 교회가 아닙니다. 모두가 새로와지고 건강해지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올해 70주년을 축하하면서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자칫 하다가는 이 모든 것이 iatrogenic이 될수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하는 마음으로 섬기며 하나님께 감사드릴 때 놀라운 하나님의 나라가 펼쳐질 것입니다. 하늘의 잔치를 올해 우리는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손수건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김겸섭 목사님의 책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보았습니다.

 참 눈물,

그것은 ‘자기 성찰의 흔적’이다.

자기 약함과 악함을 함께 볼 수 있는자,

그들만이 흘릴 수 있는 고유한 특권이다.

 

참 눈물,

그것은 ‘감사를 이해한 자의 흔적’이다.

누군가의 희생, 배려를 통해

지금 나의 행복이 있음을 아는자,

그들만 할 수 있는 ‘내면의 노래’이다.

 

참 눈물,

그것은 타인을 위로 못한 ‘아쉬움의 흔적’이다.

그들에게 받은 사랑을 기쁘게 돌려 주고 싶은데,

자신의 분주함과 소심함에 그 기회를 놓쳐,

단 한 번도 진정으로 격려 못한 미안한 마음,

이 때문에 흘리는 참회이다.

 

올해 참 눈물의 축제에 동참하십시다. 눈물의 축제는 손수건의 축제입니다. 회개 없이는 참 감사가 없습니다.

니고데모의 축제가 시작되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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