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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디모데후서 1장 9-18절 (08/06/2023)

많은 분들이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읽어 보셨을줄 압니다. 저도 중학교 때 읽었습니다. 물론 이유는 깊은 사색을 위한 것이 아니고 나도 읽었다는 자부심을 갖기 위해서 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즘 여기 저기서 다시 노인과 바다의 이야기를 접하게 됩니다. 저의 친구가 어느 신문에 노인과 바다에 대한 글을 쓴 것도 읽어 보게 되었습니다. 다시 책을 읽을 시간은 없었고 친구의 글을 읽으면서 많은 감명을 받았고 바로 사도바울의 모습이 떠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잠시후 말씀드리고…. 소설 내용을 아주 간단히 요약해 드리면….

한때 잘나가던 노인 어부이야기입니다. 노인을 따라 조수로 한 소년이 함께 고기 잡이를 나갔는데 40일이 지나도 고기를 잡지 못합니다. 이에 소년의 아버지는 소년을 데리고 다른 어부에게로 갑니다. 이제는 혼자 매일 나가기 시작합니다. 소년이 떠난후 44일이 더 지나도록 곧 84일간 하나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85일째 되는 날 큰 고기가 낚시줄에 걸렸습니다. 너무 커서 금방 배로 끌어 올릴수가 없었습니다. 약 삼일간을 배 안에서 물고기와 사투를 벌입니다. 셋째날 아침이 되자 물고기는 자신의 배를 빙빙 돌기 시작하고 노인은 낚싯줄을 당겨 작살로 숨통을 끊어버립니다. 그런데 피냄새를 맡고 상어가 모이기 시작합니다. 노인은 물고기를 지키기 위해 도구를 사용해 사투를 벌이지만 그때마다 물고기의 살한덩이씩 떨어져 나갑니다. 결국 날이 저물어 부두에 도착하였는데 상어 떼의 공격을 받아 물고기의 뼈대만 싣고 항구에 도착합니다

지친 노인은 자기 집에 기절하다시피 잠들고 다음날 아침 마을 사람들은 노인의 배에 매달린 거대한 물고기의 뼈를 보고 놀랍니다. 깨어난 노인에게 떠나갔던 소년은 다시 찾아 와 푹 쉬고 얼른 회복한 후 자신에게 낚시에 대해 더욱 자세히 알려달라고 합니다. 그렇게 끝이 납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 사자가 여러번 등장하는데 노인은 사자 꿈을 세번 꾸게 됩니다. 첫 번째 꿈은 허탕친 84일이 지나고 85일째 새벽에 꾸게 됩니다. 곧 물고기를 잡는 날 새벽에 꾼 꿈입니다. 두 번째는 물고기와 3일간 배 안에서 겨루었는데 쉬면서 잠시 낮잠을 자면서 꾸게 됩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소설의 마지막 문장에서 곧 상어에게 물고기의 살을 다 빼았기고 집에 와서 깊은 잠을 잘 때 꾸게 됩니다.

곧 첫번째 꿈을 꾼 후 드디어 85일만에 고기를 낚습니다. 두번째 사자 꿈을 꾼 후 고기를 작살로 잡습니다. 세 번째 꿈은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꿉니다.

세번째 꿈에 대해서는 독자들에게 상상을 맡긴 것이지만 많은 분들은 바로 노인은 다시 바다로 나갔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기에 디모데후서 강해 두번째 설교를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디모데후서는 사도바울이 감옥에서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쓰는 편지입니다. 이 편지를 통해서 감옥에서 사자의 꿈을 꾸고 있는 바울의 모습을 우리는 느낄수 있습니다.

지난번 강해 설교 제목이 담긴 귀절을 보면 쉽게 알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1:7)

사실 디모데후서 전체 어디를 봐도 사도바울은 어서 속히 감옥에서 나가게 해 달라는 소원의 기도나 부탁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유는 그는 감옥에서 사자의 꿈을 늘 꾸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사자의 꿈을 꾸고 있기에 지난번 설교 말씀 마지막 귀절에서 다음과 같이 디모데에게 명령합니다. 8절,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사자의 꿈을 꾸는 사도바울은 같은 믿음의 사자가 된 디모데에게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곧 디모데후서는 사자인 사도바울이 어린 사자인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쓰는 편지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편지를 읽는 모든 사람들에게 함께 믿음의 사자가 될 것을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믿음의 사자가 될수 있을까요?

한편 오늘 말씀 첫 두절을 통해 디모데후서를 읽는 모든 사람은 함께 사자가 될수 밖에 없음을 밝힙니다. 9, 10절,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간단히 요점만 말씀드리면 사도바울과 디모데는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은 공동체임을 우선 강조합니다. 그래서 ‘우리’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이 소명은 은혜라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훌륭해서 받은 것이 아니라 거저 주신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은혜는 언제부터 계획된 것이냐 하면 영원전부터 계획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영원전부터 계획된 은혜를 믿을 때 믿음의 사자는 우리 안에 탄생하는 것입니다.

한편 이를 확증하는 증거를 밝힙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입니다. 영원 전부터 계신 그리스도가 이 땅에 나타나셨다는 것이 우리가 받은 모든 은혜는 영원전부터 계획되었던 것임을 확증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믿는 모든 자들의 가슴에는 사자의 포효가 메아리치기 시작합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팀 켈러 목사님은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사자가 되어 세상을 홀로 대항했다고 비유하면서 그의 글을 소개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생동적인 그리고 담대한 신뢰입니다. 너무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확신이 크기에 수천번 죽는 것도 감수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확신은 우리를 행복하게 기쁘게 만들고 그리고 하나님과 모든 피조물과 멋진 관계를 맺게 합니다.”

사도바울도 당연히 이러한 확신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11, 12절,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사자의 포효가 가슴 속에 메아리치는 사도바울은 복음 전파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복음을 전파함으로 가슴 속에서 울리는 사자의 포효를 세상 사람들에게 알렸던 것입니다.

한편 자신은 어떤 고난 가운데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자신은 하나님을 잘 안다는 것이고 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소원 곧 자신이 의탁한 것을 지킬 것임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J. I. Packer라는 신학자가 ‘Knowing God’이라는 책을 써서 복음주의 신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는데 ‘Knowing God’이라고 제목을 붙인 이유가 있습니다. 신앙은 ‘knowing about God’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의 지식에 불과한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신앙은 총체적 삶으로 만나는 것이기에 ‘Knowing God’이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이처럼 사도바울은 하나님을 아는 자로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하나님을 아는 자는 이 세상 삶을 살 때 하나님께 의탁하는 삶을 삽니다. 비록 감옥에 있을지라도…. 그럴수밖에 하나님은 과거 현재 미래 아니 영원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니….

그러면 여기서 궁금한 생각이 듭니다. 사도바울은 무엇을 의탁했을까요? 제가 이번 설교 준비를 하면서 최소한 다섯명 이상의 주석가들의 견해를 살펴 볼수 있었습니다. 결론적으로는 확실한 것은 아무도 알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학자들이 공통적인 해답을 주지 못한다는 것은 바로 우리들에게 상상의 날개를 펼수 있는 특권을 주고 있다고 봅니다.

저도 한번 상상의 날개를 펴 보았습니다. 저는 우선 좀 더 본문에 충실하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도바울은 이미 스스로 복음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identify를 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서 사도바울은 자신이 복음 사역을 위하여 애썼던 사역과 연관된 기도 제목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래 전 저희 교회를 잠시 다니신 교우님이 계십니다. 4년쯤 다니시다가 다시 한국으로 귀국하셨는데, 저희 교회에서 서리집사로 임직을 받으셨습니다. 자신을 소개하시는데 아주 인상 깊게 소개하셨습니다. 자신의 기도 제목을 언급하셨는데,

“제가 아는 모든 사람들을 꼭 천국에서 다시 뵙는 것입니다.”

종종 그 분을 생각하면서 제가 아는 사람들의 모습을 떠 올리기도 합니다. 물론 그분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아는 사람들 중에 좋은 관계였던 사람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겠죠. 그런데 이에 상관없이 조금이라도 아는 모든 사람들을 천국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마 사도바울도 힘든 사역 가운데 만났던 모든 사람의 이름을 하나님께 올리고 하나님께 맡긴 것이 아닐까요….? 사도바울은 이처럼 열심히 복음 전파자가 되었고 또한 삶 가운데 만난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께 의탁하면서 어떤 환경에도 굴하지 않는 사자가 되어 간 것입니다.

여기까지 정리하면, 사도바울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선포하고는 그 은혜 가운데 말씀 전파자가 되어 당신의 사역중에 만난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께 의탁한 본인의 모습 그래서 어떤 고난에도 부끄러워 하지 않는 사자의 모습을 소개합니다. 그리고는 이제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도 사자의 삶을 살도록 친히 권면합니다. 13, 14절,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이 말씀을 보면 정말로 디모데와 사도바울은 아주 긴밀한 교제를 나눈 것을 알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따로 불러서 ‘바른 말’을 들려 주곤하였습니다. 또한 디모데에게 ‘아름다운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물론 여기서도 ‘바른 말’이 무엇이었는지, ‘아름다운 것’이 무엇이었는지 알수는 없습니다. 도리어 우리들의 상황에 맞게 신앙적으로 해석할수 있는 자유를 주었다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대충 어떤 것일지 느낌은 오실줄 압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눈을 끄는 표현이 있습니다. 둘 다 ‘지키다’라는 단어가 뒤따라 옵니다. ‘바른 말을 지키고’,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물론 원어로 보면 두 다른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단어는 다르지만 의미는 이웃 사촌입니다. 한글번역으로 모두 ‘지키라’는 단어로 번역해도 전혀 무리가 없습니다. 그 이상은 신학자들의 영역이고….

그러면 왜 사도바울은 ‘지키다’라는 말을 강조했을까요? 여기서 다시 ‘노인과 바다’ 주인공의 이야기로 돌아 갑니다. 노인은 세번 사자의 꿈을 꿉니다. 그 중 세번째는 앙상한 뼈만 갖고 돌아와서 피곤에 지쳐 잠이 들었을 때….

사실 노인은 사자의 꿈을 꾼 후 또 다시 바다로 나가지 않았을까요? 사자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사자는 말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사냥한 것을 하이에나에게 다 빼았겨도 상관 없습니다. 다시 사냥을 나갑니다. 그냥 사자됨을 지킵니다.

제가 벌써 29년째 본 교회를 목회하고 있습니다. 28년간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신앙적 사자들은 말하지 않습니다. 그냥 지킵니다.

이제는 타지역으로 가셨으니 말씀을 드려도 된다고 봅니다. 잘 아시다시피 저희 교회가 건축을 여러가지 어려움 가운데 잘 마쳤습니다. 벌써 13년이 지났네요.

어느 가정이 건축헌금을 작정한 후 힘이 닿는대로 내셨던 것 같습니다. 건축이 다 끝나지 않았는데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후에 알게 된 사실은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셨지만 끝까지 작정헌금을 마치셨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사자들은 말하지 않습니다. 지킵니다.

끝으로 사도바울은 지키지 않아서 당신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두 사람을 언급합니다. 15절,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는 부겔로와 허모게네도 있느니라.” 한편 지키는 사람도 소개합니다. 16-18절,

“원하건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그가 나를 자주 격려해 주고 내가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와 만났음이라. 원하건대 주께서 그로 하여금 그 날에 주의 긍휼을 입게 하여 주옵소서 또 그가 에베소에서 많이 봉사한 것을 네가 잘 아느니라.”

그러나 저는 확신합니다. 지키지 않은 부겔로와 허모게네도 사도바울은 하나님께 의탁했을 것입니다. 물론 오네시보로는 두 말할 나위 없구요. 사도바울은 하나님을 아는 사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아는 모든 자들을 하나님께 의탁합니다. 아울러 아름다운 것을 지키는 삶을 산 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어떤 환경에도 흔들리지 않고 아름다운 것을 지켰던 대표적인 분이 손양원 목사님이십니다. 수많은 나병 환자를 돌보셨고, 6.25전쟁시 피난을 가지 않아서 북한 군에게 붙잡혀 순교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전에 여수 순천 반란 사건 때 두 아들을 잃게 됩니다. 당신 아들을 죽인 원수를 용서하십니다. 용서를 넘어 양아들로 삼습니다. 이 양아들도 목사가 되지만 양아들의 아들도 후에 목사가 됩니다. 이제는 양할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나병 환자들을 돌보는 목사가 됩니다.

안경선 목사는 현재 전 세계 한센인을 돕는 사단법인 손사랑브릿지 대표로 있으며 아프리카 부룬디에서 나병환자를 돌보고 계십니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사자 손양원 목사님의 지킴의 삶이었습니다. 우선 손 목사님은 하나님께서 당신이 의탁하신 것을 지키실 것을 확신하셨을줄 압니다. 그리고는 손 목사님은 당신의 아들을 죽인 원수를 하나님께 의탁하신 것입니다. 그 결과 원수의 아들이 이제는 당신의 꿈을 가지고 온 세계를 섬기게 된 것입니다. 손 목사님으로 인해 양손자도 아름다운 것을 지키는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의탁한 것을 지키십니다. 우리도 우리에게 주신 바른 말과 아름다운 것을 지키십시다. 신앙의 사자가 되십시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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