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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히 쓰는 그릇” 디모데후서 2:14-22 (09/03/2023)

저희 교회는 삼세대 교회인데 오늘 첫 이야기는 상록기도회 어르신들에게 익숙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1928년 일제 강점기가 한창 무르익을 때 서울에 있는 단성사 극장에서 쇼가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잠시 쉬는 시간에 이애리수라는 18세의 어린 가수가 황성옛터라는 노래를 부릅니다. 이 노래는 나라를 잃은 아픔을 노래한 가요입니다. 이 노래가 음반으로 취입되면서 인기 가도를 달립니다.
그런데 잠시 후 이 가수는 연예계에서 사라집니다. 아무도 그 내막을 알지 못한채 세월은 흘렀습니다. 80년만에 어느 신문기자를 통해서 그 사연이 밝혀 집니다.
그녀가 갑자기 연예계에서 사라진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막 절정을 향해 갈 때 연세대학생을 만나서 사랑에 빠집니다. 그러나 큰 벽에 부딪치는데 시아버지는 결코 가수와 결혼할수 없다고 반대합니다. 두 남녀는 함께 동반자살도 시도하지만 실패합니다. 동반자살도 시아버님의 뜻을 굽히게 하지 못한 것입니다. 끝내 이애리수는 약속을 합니다. 가수를 내려 놓겠다고….
한편 결혼후 2년만에 시아버지가 세상을 떠납니다. 그후 어떻게 되었을까요? 남편은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가수 생활을 다시 시작해도 되지 않겠느냐고 설득합니다. 이애리수 가수는 말합니다.
“비록 시아버님이 돌아가셨으나 약속은 약속입니다.”
평범한 주부로 그후 거의 80년을 살다가 98세에 이 이야기가 알려지고 99세에 세상을 떠납니다. 자녀들도 어머니가 가수였음을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애리수 가수가 크리스챤이었는지는 제가 알수는 없었습니다. 만일 크리스챤이었다면 1등 크리스챤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조심스럽게 해 봅니다.

얼마전 어느 기독교 신문 컬럼니스트가 쓴 글에서 접한 내용입니다. 그 컬럼니스트가 이런 이야기를 기독교 신문에 게제한 배경이 있습니다. 그 분이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OECD 회원국이 38개국인데 대개 선진국들이 회원국으로 있습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조사를 하였는데 타인을 믿지 못하는 통계를 발표하였습니다. 한국은 38개국가 중 단연 하위권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애리수 가수의 삶이 너무나 돗보이기에 신문기자는 98세가 된 이 가수를 방문하였고, 또 이 이야기를 어느 컬럼니스트가 기독신문에 게제한 것입니다. 곧 요즘 기독교는 약속을 지키는 곧 타인을 믿는 자들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이 글을 실은 것입니다. 약속과 믿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디모데가 목회하였던 에베소도 크게 차이가 나진 않았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한국 사회보다 더 이웃을 믿지 못했던 도시가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오늘도 계속해서 디모데후서 강해설교를 이어갑니다. 첫 몇절 말씀을 보면 이 당시 에베소 교회의 모습을 잘 알수 있습니다. 14절,

“너는 그들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라.”

에베소 교회는 한마디로 말다툼이 심했던 것 같습니다. 왜 말다툼이 생겼을까요? 당연히 타인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믿는다면 말다툼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말다툼의 위험성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말다툼은 유익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믿지 않고 말다툼만을 하니 유익이 있을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거기까지도 좋습니다.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두 사람이 말다툼을 할 때 제 삼자가 되어서 판단해 주고 중재해 주고픈 생각이 드실줄 압니다. 그런데 그것도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중재의 뜻을 가지고 들을지라도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듣는 이들을 망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듣는 이들을 망하게 한다면 말다툼을 하는 사람들은 어떨까요? 이를 사도바울은 너무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계속 말씀합니다. 16, 17절,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그들은 경건하지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그들의 말은 악성 종양이 퍼져나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저와 가깝게 교제하는 목사님이 계십니다. 오래전부터 당뇨가 있으셨던 분이십니다. 친구로서 교제한지 약 10년이 지난 후 어느 날 정기진료를 했는데 저에게도 당뇨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후로 저는 목회자들을 만나면 이런 농담을 합니다.
“친구를 잘 사귀어야 합니다. 당뇨도 전염됩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의사도 아닌데 놀라운 표현을 합니다. 악성종양이라는 표현을 합니다. 나쁜 말을 퍼트리는 사람은 이미 암에 걸린 사람이고 이를 듣는 사람들은 암을 전해 받는다는 것입니다. 곧 말의 암은 전염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의 기가막힌 지혜가 또 하나 있습니다. 제가 의과대학 다닐 때 교수님 강의 중에 한번 듣고 잊지 않은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진짜 무서운 병은 아프지 않다.”
아픈 것은 대개 무서운 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암도 말기에는 아파지지만 암이 무서운 이유는 초기에는 안 아프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의 지혜가 여기에 있습니다. 나쁜 말은 아프지 않습니다. 아니 도리어 달콤합니다. 그런데 암세포가 설탕을 좋아하지 않습니까? 달콤한 것을 좋아 합니다.
여기서 이런 결론을 내려 봅니다. 육신의 암은 전염은 되지 않습니다. 당뇨도 전염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의 암은 전염됩니다. 자기도 모르게 아프지 않게 아니 달콤하게….

그런데 이런 현상들이 요즘 과학이 발전되면서 과학적으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BC 코뮤니케이션 학과 부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장승모 교수님이 얼마전 포룸에서 발표한 자료를 접해 보았습니다. 첫 문장이 다음과 같이 시작됩니다.
“가짜 뉴스가 많아 문제가 되는 요즘, 최근에 나온 여러 연구에 의하면 한번 가짜 뉴스에 노출되면 아무리 그 뉴스가 잘못됐다고 검증이 된 후에도 잘못된 믿음을 고치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한 마디로 가짜뉴스는 암인데 한번 이 암에 걸리면 고쳐지기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쉬운 예를 들자면 어느 사람이 사기꾼으로 오명이 씌워졌다고 가정해 봅니다. 후에 사기꾼이 아니라고 판명이 났어도 무의식 중에 사람들은 그를 계속 사기꾼처럼 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런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말의 암에 걸린 자들을 위한 치료법이 있을까요? 한편18절을 보면 사도바울은 말의 암에 걸린 자들을 위한 치료법은 알고 있었습니다.

“진리에 관하여는 그들이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함으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에베소 교인들의 모습을 이렇게 추정할수 있습니다. 입으로는 부활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삶으로는 부활은 이미 지나갔습니다. 나의 삶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물론 언젠가 죽은 후 부활할 것이라는 희미한 믿음은 있습니다. 그러나 매일 매일 삶에서는 부활을 부정합니다.
사도바울은 암환자의 원인을 잘 밝히고 있습니다. 바른 진리에 서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른 진리에 서 있지 않은 자들의 특징은 부활은 이미 지나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도바울은 은연 중 말씀하고 있습니다. 진리의 회복이 곧 치료제라고….

제가 설교 서두에서 이애리수 가수를 소개해 드렸습니다. 가수를 포기하라고 해서 포기하고 결혼을 했습니다. 2년후 시아버님이 돌아가셨습니다. 만일 시아버님이 돌아 가신 후 가수생활을 하였다면 그 약속은 시아버님의 돌아가심과 함께 지나가버린 약속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약속을 80평생 지켜 왔습니다.
제가 그 분이 크리스챤이었다면 정말로 신앙생활 잘 했을 거라고 말씀드린 이유가 있습니다. 그 분은 부활의 주님을 만났다면 남은 평생 부활의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매일 매일…. 그는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Triduum이라는 라틴어에서 나온 단어가 있는데 3일이라는 뜻입니다. 기독교적 단어인데 성금요일 성토요일 부활주일 곧 삼일을 일컷는 말입니다.
저는 부활을 믿는 자들은 매일 Triduum을 산다고 생각합니다. 하루 중에 성금요일의 사건 곧 우리가 받는 고난의 분량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제 받은 고난이 땅속에서 무르익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제 받은 고난이 부활의 꽃을 핍니다. 곧 우리는 하루에 세 가지를 모두 체험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는 Triduum이 맞습니다.
하루가 시작될 때 우리는 실제로는 3일의 삶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그제 뿌린 고난의 씨앗이 부활하는 놀라운 축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런 기대 가운데 하루를 시작합니다. 어제 뿌린 고난의 씨앗이 무르익기를 기다리는 기다림의 시간을 누립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받을 고난이 있습니다. 곧 부활과 기다림과 고난이 우리가 누리는 하루의 축복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부활을 매일 사는 삶입니다.

그런데 조금 넓게 생각하면 우리는 실제로는 5일을 삽니다. 이틀전에 심은 고난의 씨앗이 오늘 싻이 납니다. 아울러 오늘 심는 고난의 씨앗은 이틀후 곧 모레 싻이 납니다.
곧 우리는 하루에 3일을 삽니다만 실제로 앞 뒤 5일을 느끼며 삽니다. . 그런데 앞뒤로 3일씩을 사니 결국 5일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영어로는 yesterday today tomorrow밖에 없습니다. 그 앞 뒤는 the day before yesterday, 혹은 the day after tomorrow로 표기됩니다. 그래서 5일이 됩니다.
그러나 한국어는 어떻습니까? 어제, 그제, 심지어 그그제…. 내일 모레 이것도 모자라서 우리는 글피 그글피…. 그그제와 그글피를 뺄지라도 한국인들은 최소한 6일을 카버하는 말을 갖고 있습니다.
그제, 어제, 오늘, 내일, 모레, 글피.
‘글피’는 아마도 영원을 상징하는 말이 아닐까 저는 그렇게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우리 한국말이 훨씬 기독교적입니다. 우리는 앞뒤로 5일간 씩 아니 6일간을 생각하며 매일을 Triduum의 삶을 사는 민족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나요?

그러면 Triduum을 사는 부활의 삶은 구체적으로 어떤 삶일까요? 19절,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

아무리 세상이, 심지어 교회가 거짓 뉴우스로 넘칠지라도 부활의 터는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편 눈에 띄는 표현이 있습니다. ‘인침이 있다.’ 인침 곧 seal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도장에 찍혀 있다는 것입니다. 그 도장에는 두 가지가 기록되어 있는데 하나는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그리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루에 3일을 사는 부활의 주님을 믿는 자들은 아침마다 외치는 것입니다.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이 두 가지 seal(도장)은 솔로몬 성전의 두 기둥이 생각나게 합니다. 솔로몬 성전의 전면 좌우편에는 두 기둥이 우뚝 서 있었습니다.
(스크린)
오른편에 있는 기둥은 ‘야긴’이라 불렀고, 왼편에 있는 기둥은 ‘보아스’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야긴은 ‘그가 세운다’는 뜻이고 보아스는 ‘그에게 능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성전은 하나님이 세운다는 뜻이고 모든 능력은 하나님께 있다는 의미입니다.

곧 솔로몬 성전에 들어 오는 자들은 두 기둥을 보면서 외치지 않았을까요?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그가 세우신다.”
“그에게 능력이 있다.”

한편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우리 모두가 성전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부활의 진리를 믿는 자들에게는 야긴과 보아스가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향한 고백이지만 한편으로는 부활의 증인이 된 모든 믿는 자들을 향한 고백이 된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향한 고백도 된 것입니다.
이를 지혜롭게 사도바울은 구약의 말씀을 인용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부활의 주인공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증인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또한 서로를 향하여 이렇게 외치게 된 것입니다.

“그가 세우신다.”
“그에게 능력이 있다.”

주님의 부활 전에는 이 고백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고백이었습니다. 주님의 부활후 우리 모두가 성전이 되었으니 이 고백은 믿는 사람들의 서로를 향한 고백도 되었습니다.

이 두 고백을 하지 않는다면 이미 부활은 지나갔다고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반면 부활을 믿는 자들은 이 두 고백을 외치면서 하루를 시작합니다. 교회를 섬깁니다. 이 두 고백은 암을 물리칩니다. 암세포가 이 고백을 이길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고백을 하는 자를 사도바울은 귀히쓰는 그릇이라고 말합니다. 21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세상에 그리고 교회에 아무리 무서운 암세포들이 득실거려도 상관 없습니다. 이 고백을 하는 자들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선한 일을 시작하십니다. 어느새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선한 일에 사용되고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 수많은 암세포가 드글거릴지라도….

정승모 교수님이 발표한 자료 하나를 소개해 드립니다. 우리 두뇌는 생각보다 매우 단순해서 대충 편하게 무의식적으로 생각해서 그대로 수용한다고 합니다. 한 가지 예를 드는데, 대인관계에서 부정적인 단어는 되도록 삼가는 것이 좋다고 말합니다. 아랫사람한테 “언제든지 부담없이 연락해줘요” 라고 좋은 뜻으로 말해도 두뇌는 ‘부담없이’에서 ‘없이’는 잘 기억하지 않고 ‘부담’을 더 기억하게 되고 그래서 그 분의 말의 의미를 ‘부담’으로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편하게 연락해 주세요”가 더 좋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간단한 표현도 삼일후에 좋은 영향을 세상에 미치는데 하물며 부활을 사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고백은 얼마나 놀라운 역사를 세상에 펼치게 될까요?

“그가 세우신다.”
“그에게 능력이 있다.”

사도바울은 후매네오와 빌레도를 향해서도 외치지 않았을까요? 그들을 치료하기 위해서…. 사도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이 고백이 넘치기를 바라며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바울은 말씀합니다. 22절,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말씀을 거둡니다.
김겸섭 목사님의 글입니다.

“대지의 풍요,
그것은
하늘의 비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람의 눈물이 함께 흘러야
비로소 이 대지의 풍요는 허락된다.”

눈물 없이 말의 암을 퍼뜨리는 사람에게 최고의 고백을 할수 있을까요? 그래도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고백합니다.
“그가 세우신다. 그에게 능력이 있다.”

이 고백이 우리 교회 안에도 넘치게 하십시다.

그런데 그제 흘린 눈물의 고백은 오늘 우리의 삶을 풍요케 합니다. 어제 흘린 눈물의 고백은 내일 우리의 삶을 풍요케 합니다. 오늘 흘리는 눈물의 고백은 모레 우리의 삶을 풍요케 합니다. 주님께서 3일만에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믿는 자들은 하루에 삼일을 살아갑니다. 이것이 부활의 삶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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