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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의 면류관” 디모데후서 4:1-8 (09/17/2023)

“의의 면류관”

디모데후서 4:1-8

강아지 성도와 고양이 신자’라는 책을 지은 저자 밥 쇼그린 목사님은 재스민이라는 강아지와 심바라는 고양이를 키웁니다. 그런데 재스민과 심바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겁니다. 주인이 집에 돌아오면 강아지 재스민은 달려 나와서 열심히 꼬리를 흔들면서 반갑다고 짖어댑니다. 그런데 고양이 심바는 주인이 방안에 들어서도 손가락 하나 까딱이지 않습니다. 주인이 다가와서 바라보아야 겨우 아는 체 하는 정도입니다. 주인의 마음이 상할 정도로 말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고양이는 이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당신이 나를 귀여워 해주고, 먹여주고, 보살펴주고, 사랑해 주는 것을 보니 내가 당신의 주인이군요.” 반대로 강아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나를 귀여워해주고, 먹여주고, 보살펴주고, 사랑해 주는 것을 보니 당신은 나의 주인임이 분명하군요.”

곧 겉만 보면 이 둘은 아주 비슷합니다. 먹고 자고 눕는 등 거의 모든 부분에서 똑같이 출발합니다. 그러나 마지막이 다릅니다. 강아지는 “당신은 주인입니다” 로 끝이 납니다만, 고양이는 “내가 주인입니다” 로 끝을 맺습니다.

여러분은 강아지 성도이십니까, 고양이 신자이십니까? 요즘 디모데후서를 강해설교 중인데 디모데는 강아지 성도였을까요, 고양이 신자였을까요? 1 말씀을 보면 알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엄히 명령하고 있습니다. 고양이에게 명령하지 않죠? 저도 어릴 때는 집에서 강아지를 많이 키워 봤고 미국에서는 고양이도 오래 키워 봤습니다. 고양이에게는 명령하지 않습니다. 강아지에게만 합니다. 고양이에게 명령하지 않는 것은 하나마나이기 때문이죠. 체면만 상합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를 잘 아니 명령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은 무엇을 명령하고 있나요? 2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한 두번 말씀드렸습니다. 사도바울의 사역을 크게 둘로 나눌수 있다고…. 하나는 전도입니다. 또 하나는 양육입니다. 사도바울은 이 한 문장으로 순종의 제자 디모데에게 하고픈 명령을 한꺼번에 하고 있습니다. 첫째로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말씀 전파에 힘쓰라고 명령합니다. 두번째로는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양육하라고 명령합니다. 곧 사도바울은 편지 말미에 가서 두 가지를 모두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도와 양육, 왜냐하면 이는 동전의 양면이기 때문일줄 압니다.

최근 한국교회 현황에 대한 자료를 목회데이터연구소가 발표를 하였습니다. 물론 미주 한인들의 자료는 아닙니다만 그래도 많이 참고가 될줄 압니다. 한 마디로 교인 수가 10년 후 전체 인구의 10%로 추락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이는 한국사회의 탈종교화에 따른 것이라고 합니다.

개신교인의 비율은 2012년도(22.5%)를 정점으로 해서 2022년 15.0%까지 하락하고 있습니다.

한편 개신교인이라고 인식하는 교인들 중에서도 32%가 종교다원주의를 신봉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종교다원주의란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동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종말론’에 대한 동의율이 50~60% 대의 비교적 낮은 비율을 나타났습니다. 요한계시록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이 생긴 이유가 무엇일까요? 전도가 부족해서 양육이 부족해서…? 결론은 둘 다 부족해서 입니다. 전도만 잘 되었어도 이처럼 급락하지 않습니다. 양육이 잘 되었어도 최소한 유지는 됩니다. 둘 다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근본적인 원인은 한 마디로 고양이 신자가 많고 강아지 성도가 적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와 같은 현상이 올 것을 사도바울은 벌써 알고 있었습니다. 3, 4절,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한 마디로 고양이 신자가 많이 나타날 것을 사도바울은 예언하고 있습니다. 고양이 신자의 특징은 자기가 원하는 것만 취사선택해서 듣는 자들을 말합니다.

오래전 한국의 어느 대학교 종교학과 원로 교수님과 그의 제자인 현재 가르치는 교수님의 대화를 들은적이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두 분 모두 어릴 때 교회를 다녔습니다. 현재는 다니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제 삼의 신앙 공동체를 이야기 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기독교가 아닌 신앙공동체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제 3의 신앙 공동체는 그럴듯 하게 들리는데, 알고 보니 좋게 말해서 개인 묵상, 실은 요가 모임 정도였습니다. 이들은 종교란 이름으로 무종교의 공동체를 만들어서 편하게 살자고 제안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고양이 신자들끼리 모여 새로운 신앙 공동체를 만들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내다 보고 있는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어떤 명령을 하죠? 5절,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양육과 함께 전도자의 일까지 잘 감당하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양이 신자들에게 책임을 돌리기 전에 우선 교회가 양육과 전도의 사명을 잘 감당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사명을 잘 감당하는 강아지 성도들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저는 최근 강아지 성도의 모습을 렘브란트의 그림 ‘돌아온 탕자’에 나오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찾아 보았습니다.

렘브란트는 롤로코스터의 생을 삽니다. 젊었을 때는 큰 부를 누리다가 투자를 잘 못해서 모든 것을 잃습니다. 말년에는 그리는 쪽쪽 차압해 갑니다. 바로 돌아온 탕자는 말년에 그린 그림입니다. 자기가 그려도 자기 것이 아닌 그림입니다. 그런데 이럴 때 도리어 최고의 작품이 탄생된 것입니다.

렘브란트가 수많은 자화상을 그렸는데 젊었을 때 곧 큰 부를 누리고 있을 때의 자화상은 술집에서 여인을 안고 있는 모습으로 그렸습니다.

그런데 망하고 난 후에 ‘돌아온 탕자’를 그립니다. 이 그림은 러시아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데 이 그림을 오랜 시간 감상한 후 헨리 나우웬이 책을 펴냈습니다.

헨리 나우웬이 아버지의 모습에서 놀라운 모습을 찾아 냅니다. 아버지의 두 손의 모양이 완전히 다릅니다. 오른손은 여성의 손입니다. 거칠지가 않습니다. 곧 어머니의 손입니다. 어떻게 보면 양육의 손입니다. 왼손은 남성의 손입니다. 거칩니다. 아버지의 손입니다. 어떻게 보면 전도하기 위해 험한 산골을 헤메며 짐승들과 싸웠던 손입니다.

렘브란트는 젊었을 때 방탕하게 살다가 드디어 아버지 품에 안겼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두 손의 주인공이었습니다. 양육의 손 전도의 손….

두 손으로 열심히 수고하셨던 아버지의 모습은 이마에 주름이 보이지 않습니다. 온통 주름이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눈썹은 아예 없어졌네요.

사도바울의 모습도 이 아버지의 모습이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디모데에게도 자기와 같은 양육과 전도의 손의 주인공이 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처럼 되라는 이유가 있습니다. 6-8절,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사도바울은 양육과 전도의 삶에 온 생애를 바친후 이제는 의의 면류관을 확신하며 그 날을 기다리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디모데에게 자기처럼 의의 면류관의 주인공이 되자고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확실히 종말을 믿고 있습니다. 그냥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의의 면류관을 받을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종말에 대한 확신은 빌립보서 4: 1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사도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향하여 자기의 면류관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럴수 밖에, 사도바울은 빌립보에서 루디아를 만나 전도했습니다. 그 결과 빌립보 교회가 세워집니다. 그리고 빌립보 교회를 양육했습니다. 전도와 양육을 한 빌립보 교회는 어느덧 사도바울의 면류관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하늘 나라에서 받은 면류관의 모습을 우리는 알수 없습니다. 상상할 뿐입니다. 그러나 그가 면류관을 받을수 밖에 없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훤히 빛나는 그의 이마와 다 바랜 눈썹이 이 땅 위에서의 그의 의의 면류관이었습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사냥개들이 주인과 함께 사냥은 나갔습니다. 그 중 유독 가장 용감한 사냥개가 있었습니다. 가만 보니 다른 사냥개와는 달리 잡종 곧 똥개였습니다.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이 똥개가 제일 용감하냐고…? 주인 왈,

어디서 얻은 이 개를 사냥개와 같이 키웠더니 자기도 사냥개인줄 알고 사냥을 하는데 어느덧 가장 용감한 사냥개가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은 똥개였습니다. 똥개를 12 사도 사이에 넣었더니 최고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디모데는 아버지가 헬라인 곧 그도 똥개였습니다. 그런데 디모데도 최고의 사냥개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최고의 사냥개가 될 차례입니다.

오늘 임직 받으시는 제직분들을 비롯해서 모든 성도님들, 강아지 성도 강아지 제직이 되십시다. 의의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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