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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오기 전에” 디모데후서 4:19-22 (10/22/2023)

조선이 낳은 천재 정약용에 대해서 많은 분들이 잘 아실 줄 압니다. 천주교인이었는데 한 때 박해가 심해서 잠시 배도한 적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만 아실 줄 압니다. 수많은 책을 펴 냈는데 특히 오랜 유배시절에 많은 책을 썼다고 합니다.

이제 건강이 쇠해서 오래 살 지 못할 것을 알고 자기를 찾아 온 제자 황상에게 아래와 같은 편지를 써서 보냈다고 합니다.

 

“준엽이(제자 손병조)는 이미 고인이 됐고 안석이(제자 황경)는 여태 서객(書客)으로 있으니, 하나는 슬프고 하나는 불쌍하다. 내가 아침저녁으로 아프다. (내) 부고를 듣는 날 군(황상)이 마땅히 연암(제자 황지초)과 함께 산중에서 한 차례 울고 지난 일을 얘기하며 함께 그치도록 해라….”

 

이 편지의 골자는 제자들이 힘들 것을 염려해, 부고를 들어도 오지 말고, 산중에서 친구들과 한 차례 곡하는 것으로 문상을 대신하라는 것입니다. 한 스승의 애절한 심정이 드러나는 편지입니다.

위대한 삶을 산 정약용의 마지막 편지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오늘 디모데후서 곧 사도 바울의 마지막 편지 그중 제일 마지막 부분을 나눕니다. 사도 바울은 어떻게 당신의 마지막 편지를 마무리 짓는지 살펴 보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9절,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및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하라.”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마지막 부탁을 하는데 대신 문안을 부탁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와 그리고는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해 달라고 합니다.

 

오늘 설교 준비를 하면서 오래 전 설교했던 제목이 기억이 났습니다.

‘문안하라.’

 

 

 

그 때는 본문 말씀은 로마서 16장 말씀이었습니다. 다행히 제 설교집에 수록이 되어 있어서 찾아 읽어 보았습니다. 다음의 글이 눈에 띄었습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바울 신학’이라는 과목을 들었습니다. 마지막 시간이 끝나면서 학생들이 박수를 보냈습니다. 멋진 강의였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사도 바울은 그 교수님에게 박수를 보내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가장 중요한 것을 빠뜨렸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어떻게 끝내길 원했겠습니까?

“사도 바울 신학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문안입니다. 함께 문안합시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복음을 소유한 자들의 삶에 꼭 필요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문안하라.””

 

사실 몇 차례 이미 말씀드린 줄 아는데 저는 문안의 신학을 흉내내기 위해서 설교 전에는 항상 문안 편지를 누구엔가는 보냅니다. 물론 여러 사정상 잘 다니고 계신 저희 교우님들께는 보내지 않습니다. 교회 밖 지인들에게 주로 보냅니다.

 

그러면 왜 사도 바울은 문안을 소중히 여겼을까요? 오늘의 본문 말씀 디모데후서의 문안의 글은 로마서 16장처럼 길지는 않지만 아주 짜임새 있는 문안을 하고 있다고 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우선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 그리고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을 부탁하고 있는데 이 두 가정과의 관계 특히 오네시보로의 가정과의 관계를 보면 왜 사도 바울은 문안을 소중히 여기는지 더욱 확실해 집니다. 1:16-18절 말씀을 보면,

“원하건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그가 나를 자주 격려해 주고 내가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와 만났음이라 원하건대 주께서 그로 하여금 그 날에 주의 긍휼을 입게 하여 주옵소서 또 그가 에베소에서 많이 봉사한 것을 네가 잘 아느니라.”

한 마디로 바울은 오네시보로에게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오네시보로의 위로는 사막의 오아시스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감옥 안에서 문안의 파워를 맛 보았던 것입니다. 오네시보로로 인해서 감옥의 어두운 상황 속에서 도리어 매일 밝은 빛을 보는듯 밝고 기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오네시보로와의 관계는 곧 위로와 문안의 관계임을 알수 있습니다. 하물며 더 먼저 언급하는 브리스가와 아굴라 가정과는 두 말할 나위가 없을 줄 압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와는 정말로 오랜 시간 같이 사역을 하였습니다. 바울은 그 부부가 당한 고난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함께 고난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감옥이 이들과 떨어뜨려 놓았지만 사도 바울은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자신은 감옥이라는 고난의 길을 가고 있지만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도 바울 자신이 알지 못하는 고난 가운데 있음을…. 왜냐하면 주님을 위한 사역에는 늘 동반자가 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감옥 밖에 있는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주님의 일을 하는 자들에게는 위로와 문안의 편지가 필요함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두 가정에게 문안을 부탁한 후 이번에는 가정이 아니라 두 사람이 생각이 난 것 같습니다. 20절,

“에라스도는 고린도에 머물러 있고 드로비모는 병들어서 밀레도에 두었노니.”

이 두 사람의 특징은 다른 성경에서 인용이 되었습니다. 에라스도는 조금전 말씀드린 로마서 16장에 언급이 됩니다. 사도행전 29장에도 언급되는데 동명이인일지도 모릅니다. 드로비모는 사도행전에 여러 차례 언급되는데 사도 바울과 동행했던 평신도인 것 같습니다. 불행히도 병이 들어서 밀레도에 머물게 되었다고 디모데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 모두 사도 바울과 디모데에게는 소중한 사역자였음에는 틀림 없습니다. 디모데에게 이들의 이름을 언급함을 통해서 은연 중 두 사람에게도 문안하고 있는 것입니다. 후에 자기들의 이름이 이 편지에 언급되었음을 들었으면 얼마나 큰 힘을 받았을까요….

 

그 다음으로는 누구의 문안을 부탁할까요? 21절 상반절,

“너는 겨울 전에 어서 오라.”

그런데 갑자기 톤이 바뀝니다. 지난주 말씀이 기억나실 줄 압니다. 9절,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13절,

“네가 올 때에 내게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

지난주에는 책을 가져 오라는 것을 강조하며 말씀드렸지만 실은 책말고 또 하나가 있습니다. 책보다 먼저 원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겨울 전에 오서 오라고 조르다시피 말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겨울을 견딜 겉옷을 가져다 달라고 합니다. 이것이 우선이고 두번째가 책입니다. 책에 대해서는 지난주 나눴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육신적 연약함을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도 계속 문안이 필요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기에게 필요한 것은 말의 문안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육신을 따뜻하게 해주는 것도 큰 문안이라는 것입니다. 이 편지를 받고 디모데는 서둘러 바울에게로 향하지 않았을까요? 겨울 겉옷을 가지고….

 

사도 바울은 자신의 약함에 대해서는 이처럼 짧게 마치고는 계속 이어갑니다. 21 후반절,

“으불로와 부데와 리노와 글라우디아와 모든 형제가 다 네게 문안하느니라.”

이제 비로서 문안의 글은 이 편지의 주인공인 디모데에게 향합니다. 네 사람을 비롯 모든 형제가 디모데에게 문안하고 있음을 알려 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짧지만 세 가지 내용으로 나눌수 있습니다. 첫번째는 자신의 문안을 전해 달라고 합니다. 두번째는 자기를 위한 문안을 부탁합니다. 세번째는 네 사람을 비롯 형제들의 문안을 디모데에게 대신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 있는 점이 눈에 띄입니다. 네 사람은 여기에만 나오는 이름입니다. 반면 19, 20절에 언급된 브리스가와 아굴라, 오네시보로, 에라스도, 드로비모는 다른 책에도 언급됩니다. 어떻게 보면 사소한 것 같지만 저는 저나름대로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먼저 디모데를 통해서 잘 알려진 네 사람들에게 자신의 문안을 부탁하고 있습니다. 한편 마지막으로는 알려지지 않은 네 사람과 형제들의 문안을 디모데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디모데에게는 각별한 관계의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은 자들입니다. 이런 표현해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미생들….

사실 어떤 목회자는 로마서 16장에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나오는데 대개가 한국식으로 하면 ‘개똥이, 말순이,….’ 등과 같이 이름도 없고 빛도 없이 숨어서 주님을 섬긴 자들이라고 말씀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아마 이 네 분도 비슷한 사람들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들의 이름이 디모데에게는 큰 위로가 될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친히 이들의 이름을 서신 마지막에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감옥에 갇힌 사도 바울 주변에는 유명한 사람들이 있을리 없습니다. 소위 미생들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문안을 부탁하니 사도 바울은 거절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는 미생들이니 너희의 문안이 무슨 소용이 있겠니” 하면서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잘 아시는대로 디모데는 아버지는 헬라인 어머니는 유대인입니다. 물론 사도 바울의 총애를 받은 제자이지만 자기도 모르는 많은 상처가 있었을 것입니다.

디모데는 이중의 상처를 감당했어야 했던 것입니다. 하나는 헬라인도 아니고 유대인도 아닌 그래서 헬라인에게도 따돌림을 당하고 유대인들에게도 따돌림을 당했을 것입니다. 요즘도 흔히 있는 일입니다.

게다가 말씀드린대로 주님의 복음 사역은 거져 되는 것이 없습니다. 언제나 상처가 뒤따라 옵니다. 디모데도 상처뿐인 영광의 주인공이었을지 모릅니다. 이 디모데에게 큰 위로자들은 바로 자기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아니었을까요?

 

12년전 가수 인순이가 ‘피부색’ 탓에 힘들었던 어린 시절 자신에게 도움을 준 미군 병사와 약 40년 만에 극적으로 미국 델라웨어에서 만나 눈물을 흘렸습니다.

인순이는 15세였던 1972년에, 미군 병사로서 동두천 미군 제2보병 사단에서 근무하는 19세의 루이스를 처음 만났습니다.

인순이에 대한 루이스의 첫인상은 “늘 외롭게 혼자서 앉아 있던 아이였고 피부색 때문에 다른 애들에게 따돌림을 받는 아이”였다고 합니다. 루이스는 “그래서 몇몇 동료 군인들과 함께 인순이에게 종종 옷가지를 전해주는 등 할 수 있는 한 도움을 줬다”고 말했습니다. 루이스는 “나 역시 미국에서 자라면서 그런 것[차별]을 겪었는데, 다른 나라에서 똑같은 현상을 보는 것은 정말 마음 아픈 일이었다”고 말합니다.

한국인 어머니와 흑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따돌림을 당하던 인순이에게 루이스는 희망이었습니다. 인순이는 이날 “나는 그의 눈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인순이는 이날 루이스를 만난 뒤 “이건 기적이에요. 내가 한국에 혼자 처박혀 지내리라고 짐작하고 나를 걱정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루이스에게 ‘걱정하지 마세요. 이제 난 성공했어요’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이제 그를 찾았으니, 정말 행복한 날”이라고 현지 TV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고 합니다.

 

사실 인순이는 정말로 다행히 이 세상에서 자기의 은인을 만납니다. 그의 은인은 세상 사람들이 아무도 모르는 루이스였습니다. 죄송합니다. ‘개똥이 말순이’였습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은 스스로 미생으로 여기고 신앙생활하시는 모든 분들을 위함이 아닐까요?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자주 경험했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마다 한편으로는 위로가 필요했음을…. 그런데 그 위로는 사도들로부터 받은 위로가 아니었습니다. 사도들은 어떤 면에서는 자신을 경계했습니다. 도리어 사도 바울도 미생들로부터 위로를 받았습니다. 이 위로가 사도 바울을 사도 바울이 되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디모데가 되게 하기 위하여 큰 사도들의 이름으로 문안하지 않습니다. 미생들의 문안을 전합니다. 미생들의 문안이 훨씬 파워풀하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가 서로 문안을 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지난 주에 이웃과 문안의 인사를 주고받지 않았을지라도 그리고 이번주에도 문안의 인사를 받지 못할지라도 염려하지 마십시다.

실은 이 네 분을 비롯 하늘나라에서 사는 미생들은 늘 우리들에게 문안 인사를 보내주고 있지 않을까요?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디모데후서를 미생들의 문안으로 마친 것이 아닐까요?

문안의 소리를 듣고 싶을 때 하늘을 바라 보십시다. 우리와 비슷한 길을 갔던 미생들의 문안의 소리가 흘러 내리고 있습니다. 미생들의 문안의 글과 함께 사도 바울은 편지를 마칩니다. 22절,

“나는 주께서 네 심령에 함께 계시기를 바라노니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말씀을 거둡니다.

편지를 많이 쓴 사람 중에 유명한 반 고흐가 있습니다. 동생 테오에게만 보낸 편지가 668통이라고 합니다. 어느 출판사에서 책으로 펴 냈습니다. 첫번째 편지와 마지막 편지만 소개해 드립니다.

첫 편지의 제목을 이렇게 잡았습니다.

“많이 감탄해라.”

편지에 이런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될 수 있으면 많이 감탄해라! 많은 사람들이 충분히 감탄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고흐가 위대한 화가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잘 표현되어 있다고 봅니다.

“많이 감탄해라!”

 

마지막 편지는 이렇게 마칩니다.

“네 입장을 정하고 진정으로 사람답게 행동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런데 도대체 넌 뭘 바라는 것이냐?”

 

마지막 편지는 첫번째와는 많이 다릅니다. 그런데 다행인 것은 이 편지는 고흐가 죽었을 때 몸에 지니고 있었습니다. 차마 우울해서 보내지 않은 것입니다.

고흐의 위대함을 엿봅니다. 편지의 마지막은 문안이어야지 우울한 내용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쓰긴 썼어도 보내진 않은 것 같습니다.

 

위대한 신앙인들의 편지나 이메일의 마지막은 결코 우울함을 야기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희망이 담긴 문안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힘쓰다가 지쳐있는 교우 여러분, 함께 문안하십시다. 우리보다 먼저 이 길을 가고 이제는 하늘나라에 계신 선배 미생들도 우리에게 문안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의 글을 빌려 우리를 축복합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그들의 음성을 들으십시다. 그리고 힘을 내서 위로가 필요한 자들을 위한 위로자가 되십시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는 겨울 전에 어서 오라 으불로와 부데와 리노와 글라우디아와 모든 형제가 다 네게 문안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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