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교수님이 안식년차 캘리포니아에 와서 지내셨는데 어느 주일에는 친한 목사님이 한 흑인교회에 안내해 주셨다고 합니다.
이 날은 1년에 한 번씩 ‘영혼의 음식’을 먹는 의식이 펼쳐지는 주일이었다고 합니다. 외형적으로는 성찬식과 유사하지만 빵과 잔 대신에 조상들이 노예 시절에 먹던 음식을 만들어 먹는 예식이었다고 합니다. 옛날 노예생활을 하던 조상들은 백인들이 잡아먹고 버린 돼지의 내장을 흐르는 개울물에 씻은 후 먹곤 한 것 같습니다. 예식을 위해서는 역겨운 냄새가 덜 나도록 특정한 풀을 함께 넣고 끓여서 그 국물을 먹는다고 합니다.
이 ‘영혼의 음식’이란 짐승들이 먹는 ‘꿀꿀이죽’과 같은 것인데 그 음식 속에 자기네 조상들의 영혼이 살아 숨쉬고 있으며 노예 신분으로 짐승 이하의 취급을 받던 선조들의 얼과 정기가 면면히 흐르고 있는 그런 음식이기에 그들은 감사와 감격 속에 영혼의 음식을 먹는 예배의식을 진행한다는 것입니다.
교수님은 실수를 할까 봐 예식에는 참여하지 않았는데 자기를 안내하신 목사님은 참여하셨고 후에 목사님의 말씀은, 음식의 냄새가 하도 역하고 비위가 상해서 목 너머로 삼키기가 어려웠다고 말씀하였다고 합니다.
저는 이 흑인들의 예식에 관한 글을 읽고, 이런 예식을 계속 행한다면 흑인 교회는 정말로 어두워져만 가는 이 세대에 큰 빛을 발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물론 성만찬도 함께 행해질 때 말입니다.그러면 한인 교회는 어떨까요? 흑인 교회는 이런 예식이 있는데….
오늘 본문 말씀을 상고하며 한인교회에게 주어진 축복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지켜가야 할 것이 무엇인지 상고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부터 디도서 말씀을 나눕니다. 그동안 디모데후서를 나눴고 지난주에는 디모데전서 말씀을 한번 나눴는데,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를 묶어서 목회서신이라고 부릅니다.
우선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를 구별하는 큰 특징 두 가지를 말씀드립니다. 수신인이 다릅니다. 디모데와 디도…. 너무 당연한 말씀이죠. 두번째 특징이 중요합니다. 디모데는 이미 정착된 교회를 목회하는 목회자입니다. 디도는 새롭게 세워지는 교회의 목회자입니다.
저와 가깝게 지내는 목사님이 계신데 나이도 같습니다. 저는 1995년도 42살에 이미 정착된 보스톤한인교회 목회자로 부임해 왔습니다. 디모데처럼…. 반면 제 친구 목사님은 1995년에 개척하셨습니다. 지금까지 목회해오고 있습니다. 그 분은 디도와 같습니다. 그래서 더 가깝게 지내는지 모르겠습니다. 디모데와 디도.
물론 저희 교회는 올해 70주년을 맞이하였는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디모데전서지 왜 디도서를 강해하나 생각이 들수도 있습니다.
칼 바르트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We must begin all over again with a new inner orientation.”
“우리는 다시 시작하여야 합니다. 새로운 내적 오리엔테이션으로….”
곧 디도서 없는 디모데전·후서는 없습니다. 70년의 전통을 가진 교회일수록 개척교회의 정신을 매년 새롭게 되새겨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70주년이 저무는 이 즈음에 디도서 말씀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특별한 메시지를 저희 교회에게 주실줄 믿습니다.
그러면 개척교회를 목회하는 디도에게 사도 바울은 어떤 말씀으로 시작할까요? 1절 상반절,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나 바울이 사도 된 것은….”
먼저 첫 귀절이 눈에 띄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소개합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이 13개라고 생각되는데 사도바울이 먼저 ‘하나님의 종’이라고 소개하면서 시작하는 서신이 몇 개나 되겠습니까? 13 서신 중에….
디도서뿐입니다. 가장 흔한 표현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입니다. 물론 ‘종’이라고 언급한 곳이 두 곳이 더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표현되지 ‘하나님의 종’으로 표현되지는 않습니다. 두 군데는 로마서와 빌립보서입니다.
반면 ‘하나님의 종’ 하면 이 당시 누구가 연상이 되었겠습니까? 모세입니다.
지난주 청지기 헌신주일 설교 시 예수전도단의 창설자 로렌 커닝햄 목사님의 책 ‘네 신을 벗으라’에 나오는 말씀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목사님이 책 제목을 ‘네 신을 벗으라’로 정한 이유가 있습니다.
떨기나무 앞에 서 있는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신을 벗으라.”
커닝햄 목사님은 모세가 살던 이집트에서는 종들은 신발을 신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네 신을 벗으라” 말씀을 하시는 것은 모세에게 ‘너는 나의 종이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제 개척교회를 목회하는 디도에게 사도 바울은 자신도 하나님의 종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바로 모세의 모습이었음을 은연중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자주 언급하겠지만 디도가 목회하는 곳은 그레데라는 섬입니다. 섬은 여름 휴양지로는 좋아 보여도 살기에는 많은 문제가 있는 곳인 줄 압니다. 디도가 목회하는 곳도 매한가지였습니다. 이를 12절 말씀이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레데인 중의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라’ 하니.”
이런 험한 곳에서 목회하는 디도에게 사도 바울은 스스로 그리스도의 사도이기 전에 모세 처럼 신발을 벗은 하나님의 종임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디도에게도 함께 하나님 앞에서 신발을 벗자고 은연중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세에게 주어진 사역은 애굽 종살이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키는 것이었는데 사도 바울에게는 아니 디도에게는 어떤 사역이 주어졌나요? 1절 하반절, 2절,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그레데 섬 안에 하나님께서 택하신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의 믿음과 삶과 궁극적으로는 그들의 영생을 위해 종이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곧 그레데 섬이 무척 험한 곳인데 이 곳에 교회를 세워서 많은 사람들의 구원의 방주가 되게 해야 함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구원의 방주가 든든히 서려면 모세와 같은 하나님의 종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구체적인 방법을 알려줍니다. 3절,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
한글 성경으로는 ‘전도’라는 단어가 두 번 나옵니다. 물론 헬라어 성경으로는 한 번만 나오지만 번역 과정에서 두 번이 되었습니다. 한 번이건 두 번이건 상관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종에게 주어진 사명을 ‘전도’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표현이 아주 눈길을 끕니다.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자기 때’는 곧 하나님의 정하신 때를 뜻하죠. 헬라어로는 카이로스. 하나님의 때가 되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께서는 ‘전도’라는 위대한 사역을 예비해 두셨다는 것입니다. 이를 하나님의 종들을 통해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당신의 종으로 세우시고 출애굽의 역사를 펼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이 때에는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과 같은 하나님의 종들을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이 종들에게 맡기신 것은 ‘전도’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에는 전도라는 것은 없었습니다. 단지 유대교를 믿는 자들의 삶을 보고 유대교에 제 발로 들어오면 이들을 택한 민족으로 받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절대로 나가서 유대교를 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어서 예수님께서 오셨고 십자가에 달리셨고 부활·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오순절 성령강림 역사가 펼쳐짐으로 그야말로 그 때가 완성된 것입니다. 이렇게 이 때가 완성됨을 증명하는 것이 바로 성령강림과 함께 시작된 전도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
제가 본 교회를 섬긴지 거의 30년이 되어 오는데 처음 왔을 때 한달에 하루 월요일 저녁은 보스턴 노회가 열렸습니다. 한 달이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지 노회가 툭하면 열리는 느낌이었습니다.
곧 1년에 12번 모였는데 교회가 돌아가면서 호스트를 했습니다. 저희 교회는 2, 3년에 한번 쯤 하면 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12 번이 너무 자주 오니 두 달에 한번씩 하기로 했습니다. 1년에 6번 모이게 되었습니다. 저희 교회는 그래도 2, 3년에 한번씩 호스트를 했습니다. 얼마 지나서 교회 수가 자꾸 줄어드니 저희 교회는 매 해 한번씩 하게 되었습니다. 1년에 6번 하는 것도 버겨워지기 시작했던지 4회로 줄였습니다. 이제는 3회로 줄였습니다. 그나마 호스트하는 교회가 없어서 요즘 그냥 줌으로만 대신하고 있습니다. 어느덧 보스턴도 그레데 섬이 되어 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여기저기 들려 오는 소식은, 판데믹을 거치면서 뉴잉글랜드에50-70개 교회가 문을 닫았다고 합니다. 어느덧 그레데 섬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레데 섬에도 소망이 있습니다. 지금은 바로 그 때 곧 하나님의 때이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때의 주인공이 누구라고요?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
전도하는 자들이 주인공들입니다. 그런데 이 전도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종이 되었을 때 가능합니다.
사도 바울은 전도하는 자들의 특징을 고린도전서 1:21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전도는 미련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미련한 종이 되기 전에는 불가능합니다. 전도를 잘 하시는 분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미련해지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미련해지는 것이 어렵지만 실은 미련해지는 자들이 이 세대의 지도자가 되지 않을까요?
곧 이것이 하나님의 종인 모세의 모습이었습니다. 애굽 왕궁에서 배웠던 모든 세상에 어울리는 것들은 잃은 채 연약한 모습만을 소유했던 모세입니다. 그리고 이 모습을 뒤 이은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그리고 종의 모습을 요즘도 삶 속에 이어가길 원해서 어느 흑인 교회는 선조들이 먹던 영혼의 음식을 먹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니 이들이 미국 땅에서 사는 한 미국은 희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련한 종의 삶을 이어가고 있는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지난번 한국문화축제를 잘 마쳤습니다. 여러가지 뜻을 가지고 행한 행사였습니다. 일단 아주 세련된 행사였습니다. 많은 오신 분들이 크게 감동을 받았습니다. 특히 타운 대표자도 오셨는데 큰 감명을 받고 돌아 간다고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겉보기에는 세련된 행사였으니 전도와는 무관한 듯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실은 이 모든 일을 준비하는 과정 중에는 정말로 미련하게 보이는 섬김의 손길이 많이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세련되게 보였던 것 같지만 실제로는 교우님들의 미련한 섬김으로 인해서 주님은 역사하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신비스러운 일을 시작하시리라 믿습니다. 복음이 전파될 것입니다.
한편 70주년을 맞이한, 하나님의 종이 되길 원하는 우리들에게 주님은 축복하시리라 믿습니다. 4절,
“같은 믿음을 따라 나의 참 아들 된 디도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말씀을 거둡니다.
20세기 초, 일본에서 갓 안수를 받은 “나가노”라는 젊은 목사가 있었습니다.이 젊은 목사는 단 한 명의 교인도 없는 가나사와라는 그 지역으로 가서, 천막을 치고 개척교회를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아내와 아이 둘을 놓고 창립예배를 드렸습니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났는데 교인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가노 목사는 그 자리를 옮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곳에 보내 주신 줄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 자리를 무려 5년을 지켰습니다.
5년이 지난 어느 수요일 저녁에 천막의 커튼을 젖히고 드디어 첫 번째 교인이 들어왔습니다. 청년이었습니다. 그동안 5년 동안 했던 그 어떤 설교보다도 열정적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가 끝난 뒤에 그 청년을 데리고 식탁에서 저녁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식사 도중에 이 청년이 “욱”하더니 피를 쏟았습니다. 그는 폐병 환자였습니다. 나가노 목사가 순간적으로 속에서 갈등이 일었습니다. ‘이 사람을 지금 당장 쫒아 버려야 하나, 아니면 내가 이 핏덩이를 쓸어내고 계속 함께 밥을 먹어야 하나?’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주님께서 내게 처음 보내주신 사람인데… 나가노 목사는 자기 손으로 핏덩이를 치웠습니다. 그리고 음식을 가져다가 청년과 다시 먹었습니다.
그 청년은 일본의 유명 정치인의 사생아였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출신이 그랬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괴로움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복음을 접하게 되어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신학교를 다니는 도중에 폐병환자가 되었습니다.
학교에서 정학을 당했습니다. 다니던 교회에서 파문을 당했습니다. 이 청년이 생각할 때 ‘성경은 거짓말이구나, 예수도 거짓말이다. 단 한 사람이라도 폐병 환자인 나를 그리스도인으로 대해 주는 그리스도인을 만나고 싶다.’
그러나 없었습니다.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청년은 자살을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자살 전에 우연히 한 사람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북쪽 가나사와 지방에 가면 나가노라는 목사가 있는데, 거기를 한번 찾아가 보라는 것입니다.
이 청년이 나가노 목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날 저녁에 밥을 먹다가 피를 쏟았습니다. 나가노 목사가 피를 닦아 내고 다시 밥을 차려 왔습니다. 그 순간에 이 청년이 다시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은 살아 계셨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청년의 폐병이 나았습니다. 그리고 이 청년이 신학교를 졸업한 뒤에, 그 유명한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가 됩니다.
그리고 고베와 도쿄에서 수없이 많은 빈민을 위해 자신의 생을 섬김과 봉사의 삶으로 내어 놓았습니다. 빈민이 가장 고통스러워 하는 것은 변비라고 합니다. 항문에 변이 차돌같이 굳어 있어서 나오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장갑을 끼고 손으로 후벼 냅니다. 가가와 도요히꼬 목사가 그 빈민들의 항문을 손가락으로 후벼주었지만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거지처럼 더러운 빈민의 항문에 자신의 입을 가져다 대고, 차돌같이 굳어 있는 변을 침으로 녹여서 빨아 냈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일본 기자가 도요히꼬 목사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는가?” 도요히꼬 목사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배운대로 합니다. 제 선생님은 제가 각혈한 핏덩이를 닦아 주셨습니다. 그분이 하신 것에 비하면 이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실 내일 프린스턴 신학교에서는 도요히꼬 목사님에 대한 특별 강좌가 열린다고 합니다. 그는 디도와 같은 하나님의 종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들로 인해서 그레데 섬은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브루클라인은, 보스턴은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 때입니다. 70주년을 맞이한 저희들에게 성경은 말씀합니다.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