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유명한 피아니스트 러셀 셔먼 선생님이 소천받으셨습니다. 저희 교회에 오랫동안 지휘하셨던 변화경 장로님의 부군 되십니다. 많은 친지들과 제자들이 모여 마지막 시간을 장지에서 함께 가졌습니다. 어느 제자분이 선생님에 대한 조사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제 뇌리에 지금까지 남아 있는데 몇 가지만 소개해 드립니다. 조금 각색이 되었어도 양해 바랍니다.
유럽에선가 어느 캠프에 다녀 온 후 선생님께 사사를 받는데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이 온갖 기술로 음악이 꽉 차 있다고 나무래셨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음악을 통해서 자신의 연약함을 과감히 노출시켜야 한다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기술로 자신의 연약함을 가려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들렸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한 분은 조사 중에서 셔만 선생님은 연주를 통해서 듣는 사람의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이 두 가지 가르침은 지금까지 종종 제 뇌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저를 많이 돌아 보게 합니다.
당연히 목회자 설교자의 사명은 교인들 특히 설교를 듣는 자들의 삶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 종종 생각하게 됩니다.
저 나름대로 이렇게 정리해 보았습니다. 저도 몇 차례 셔만 선생님의 연주회에 참석했었습니다. 그 때마다 저의 삶이 어딘가는 변화를 받았으리라 봅니다. 한편 저의 기억에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은 주옥같이 흐르는 선율에 넋을 잃었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제 기억에 이렇게 생생하게 남아 있는 이유는 단지 그 분의 연약함 뿐은 아닐줄 압니다. 그 분의 강함과 연약함이 조화를 이루어서 그런 음악을 만들어 가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자신의 약함을 숨기고 강함만 나타내려 했을 때는 하나의 기술적 음악으로 전락되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저는 음악과는 거리가 먼 길을 걸어 왔지만 목회도 설교도 하나의 예술이라고 간주한다면 스스로 이런 생각을 해 보게 되었습니다. 강함은 계속 계발하고 한편 약함을 자랑할 때 온전한 목회, 능력 있는 설교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제 생각이 아니라 오래 전 사도 바울이 이렇게 피력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11: 30,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오늘도 디도서 강해를 이어갑니다. 궁금한 점은 디도가 바로 이 사도 바울의 고백을 잘 알고 있었을까요? 당연히 잘 알고 있었으리라 봅니다. 요즘 고린도후서를 소그룹공부 시간에 나누고 있으니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실줄 압니다. 고린도후서에는 디도가 여러 차례 언급 됩니다. 바로 이 고린도후서에서 사도 바울이 고백한 것입니다.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디도가 고린도후서를 또 전달했는지는 알수는 없지만 분명 이 내용은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디도에게 비친 사도 바울의 모습은 바로 자신의 약한 것을 자랑하는 분인 것입니다.
자신의 약한 것을 자랑하는 스승 사도 바울에게 편지를 받았는데 이것이 바로 디도서인 것입니다.
지난 주에는 서론을 통해서 전도의 중요성을 은근히 강조하는 사도 바울의 의도를 살펴 보았습니다. 다시 한번 3절만 봉독합니다.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
전도를 강조한 사도 바울은 인사를 마친 후 계속 써내려 갑니다. 5절,
“내가 너를 그레데에 남겨 둔 이유는 남은 일을 정리하고 내가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참고로 여기서 장로는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장로와 전적으로 같지는 않습니다. 교회 지도자로 생각하면 좋습니다. 목사와 장로를 모두 포함한다고 생각하면 제일 좋을 것 같습니다.
지난주 총회 뉴스레터에 어떤 기사가 눈에 띄였습니다. 골자는 요즘 젊은 세대는 조직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팬데믹 동안 더 심해졌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신적 존재를 부인하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곧 베이비부머와 그 전 시대는 조직을 통해서 하나님을 쉽게 만났습니다. 그러나 젊은 세대에게는 방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때 교회 지도자들의 많은 지혜가 필요함을 강조하는 기사였습니다.
그러니 젊은 세대들에게는 디도서가 도리어 생뚱맞을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디도에게 지도자를 세워 조직을 단단하게 하라 말씀하시는 것 같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젊은 교우분들, 마음의 문을 닫지 마시고 조금 더 귀 기울여주시기 바랍니다.
이 편지를 읽으면서 디도에게 든 생각은 쉽게 추측할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자신의 약함을 자랑할줄 아는 교회 지도자’를 세우라는 말씀으로 들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디도는 사도 바울이 어떤 지도자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염두에 두고 디도는 편지를 읽어 내려 갑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그레데 섬에 있는 교회들을 이끄는 지도자들에게 꼭 필요한 요소들을 나열합니다. 6절,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는 비난을 받거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지라.”
그레데 섬은 가정 문제가 심각했던 것 같습니다. 가정문제가 실은 모든 사회 문제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가정을 잘 보살피는 자가 지도자가 되어야 함을 먼저 강조합니다. 그리고는 7, 8절,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들을 탐하지 아니하며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행을 좋아하며 신중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두번째로는 가정을 넘어서 사회생활에 모범을 보이는 자들이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마지막으로 9절,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슬러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
말씀을 잘 알고 그에 따라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사실 그래야 말씀을 거스르는 자들을 책망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디도가 알고 있었던 분명한 점이 있습니다. 아무리 가정을 잘 다스리고 사회에서 흠이 없고 말씀을 잘 알고 따라 행할지라도 이 모든 것이 강점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랑거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를 자랑하는 자들이 지도자가 되었을 때 젊은이들은 교회라는 조직에서 뒤돌아서는 것입니다. 이는 기본 조건입니다. 곧 이 기본 조건들이 자신의 약점을 커버하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어느덧 자신의 강점이 되어서 자신의 약함을 덮는 도구가 되었을 때 더 이상 참된 지도자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변하게 하지 못하는 초라한 지도자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반대로 이 기본 조건이 채워지지 않은 자신을 보고 안타까워하는 분들을 지도자로 세울지도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디도는 이 모든 것을 잘 이해하고 지도자를 세워 갔을 것입니다. 이러한 지도자들로 교회라는 조직이 세워진다면 젊은이들도 다시 교회에 문을 두드리게 되지 않을까요?
오늘은 강단 위에 성찬대와 더불어 세례반 (baptismal font)도 함께 올려 놓았습니다. 이유는 요즘 예배학에서는 말씀을 선포하는 강댓상과 성찬대 그리고 세례반이 모두 같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해서 같은 레벨에 놓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종교개혁 후에 천주교에서 빠져 나오면서 말씀을 가장 중요시 여겼었지만 이제 다시 제 자리로 돌아 가야 함을 예배학자들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저희 교회 오래된 사진을 보면 강대상이 가운데 높이 세워져 있었던 적이 있음을 봅니다. 얼마후 미국 교회에서 이 위치로 옮긴 것 같습니다.
1978년도 홍근수 목사님 취임예배 사진을 보면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리고 1993년도 사진을 보니 지금 위치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후 얼마전까지는 꽃 장식을 성찬대 위에 놓았는데 이는 예배학적으로는 좀 맞지 않아서 이제는 따로 장식을 하고 있습니다. 곧 성찬대와 세례반이 그동안 아래 놓여 있었는데 오늘만 세례반이 강댓상에 올려왔습니다. 오늘 창립 70주년을 맞이하여 아주 특별한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세례반의 역할을 모두 잘 아실줄 압니다. 세례식을 거행하기 전에 장로님이 세례수를 세례반에 붓고는 목회자가 축복 기도를 하고는 세례식을 베풉니다. 그런데 세례식 말고 세례수를 따른채 예배를 드리는 적이 일년에 두 번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눈치를 채지 못하셨을줄 압니다. 제직임직식과 안수식입니다.
안수식에 세례반을 열어 놓고 안수를 거행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물론 세례의 첫 감격을 기억하기 위함도 있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세례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능동적으로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피동적으로 받는 것입니다. 피동적으로 받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피동적으로 받는다는 것은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안수도 매한가지입니다. 피동적으로 받는 것입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자들이 역설적으로 교회에서는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강한 사람을 지도자로 세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교회에서는 약함을 자랑하는 자들을 지도자로 세웁니다.
사실 예수님이 약하셔서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성찬대가 이를 상징합니다. 우리도 모두 약해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반이 이를 상징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약해지셨음을 믿으며 약한 우리들을 세례로 구원하심을 믿는 자들을 통해 오늘도 주님의 말씀은 선포되는 것입니다. 강대상은 약함을 자랑함을 통해 주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곳입니다.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과연 지난 30년 동안 강댓상에서 나의 약함을 숨기면서 말씀을 전하려 하지 않았나 반성하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언젠가 이에 대해서도 나누게 될줄 압니다.
오늘 추수감사주일이자 창립70주년기념예배로 드립니다. 저희는 올해 70주년을 맞아 표어를 시편 136편 26절,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로 정하고 1년을 감사하는 한해로 지켜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세 가지 면으로 구체적으로 나눠서 감사하기로 하였었습니다. 저희 한국 땅에 복음을 전해 준 선교사님들과 그들을 파송하신 분들께 감사를 드리기로 하였고 이를 위해서 심포지움과 사진전을 열었습니다. 한편 저희 교회가 이곳에 보금자리를 차리게 되었고 70년 중 56년을 브루클라인에서 이어오고 있는데, 타운 주민들과 관계자들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서 한국문화축제를 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70년간 저희 교회를 섬겨온 많은 평신도 지도자들께 감사를 표하기로 하였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미 하늘나라로 가셨지만 지금도 계속 저희와 함께 신앙생활하시는, 은퇴하시고 기도로 또한 보이지 않는 곳에서 교회를 섬기시는 분들께 감사하는 순서를 갖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러나 교회 어르신들께서는 보이지 않게 뒤에서 섬기시는 것으로 족하다고 하셔서, 특별한 순서 없이 오늘 이 시간에 대신 감사의 표현을 말씀으로만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이 선배 평신도 지도자들의 세례의 신비를 몸에 안고 섬기신 그 아름다운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후배 지도자들이 감사한 마음으로 뒤를 이를 것이고, 또 그 분들의 후배들도 그분들의 뒷모습을 바라 보면서 묵묵히 세례를 받는 자의 겸손한 자세로 본 교회 목회를 이어가시리라 믿습니다.
이 보물과 같은 믿음의 선배님들을 70년간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어느 목사님이 “넘어지는 쪽으로 핸들을 돌려라!” 라는 엣세이를 쓰셨습니다. 어릴 때 자전거 타기를 배웠는데 처음에는 넘어지는 쪽 반대로 핸들을 돌렸더니 늘 넘어지더라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분의 충고가 이해는 안 되었지만 용기를 내어 넘어지는 쪽으로 핸들을 돌렸더니 넘어지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약한 쪽으로 핸들을 돌릴 때 넘어지지 않습니다. 지난 70년간 약함을 자랑하였고 또 자랑하는 분들로 인해서 오늘 저희는 70주년 감사 예배를 드립니다.
계속해서 약함을 자랑하며 보스톤 곧 우리들의 그레데 섬에서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십시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내가 너를 그레데에 남겨 둔 이유는 남은 일을 정리하고 내가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