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5:10-15
“나의 친구라.”
지난번 재의 수요일 예배시 얼마전 소천하신 Samuel Hugh Moffett박사님에 대해서 잠시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그 날 말씀드린대로 마펫 박사님의 아버지는 26세에 한국 땅을 밟으시고 46년간 한국을 위해서 섬기신 선교사님이십니다. 저희 한국 기독교 특히 장로교인들에게는 신앙의 아버지와 같은 가족이십니다.
그 분의 소천 소식을 듣고 마펫 박사님을 내 삶에서 어떻게 감사를 표할수 있을까 생각을 해 보다가 그 분이 지은 저서를 구입하는 것이 한 방법이겠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펫 박사님의 유명한 저서가 있습니다. 1, 2권으로 된 방대한 책인데 ‘아시아 기독교 역사’라는 책입니다.
요즘 대개 인터넷으로 주문을 하니 저도 두 권을 인터넷으로 주문을 했습니다. 다행히 금주 설교 준비를 하기 전에 도착했습니다. 방대한 책이니 다는 읽을수 없었고 서문과 마치는 글을 우선 읽어 보았습니다. 서문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눈에 띄었습니다. 예일 신과 대학에 회자하는 이야기였다고 합니다.
한 설교학 교수가 친구인 교회사 교수가 예배당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교회사 교수에게 다가가서 물었다고 합니다.
“Roley, 당신은 교회 역사에 대해서 그렇게 많이 알면서 어떻게 아직도 기독교인으로 남아 있을수 있지…?”
초신자들은 이해하기가 어려운 말일지 모르겠습니다. 교회 역사에 대해서 많이 알수록 더 신실한 크리스챤이 되어야 하는데 도리어 반대가 될수밖에 없다는 가슴 아픈 뜻이 담긴 질문입니다. 그만큼 기독교 역사에는 밝은 면도 있지만 어떻게 보면 어두운 그림자가 더 크다는 뜻입니다.
마펫 박사는 교회사 교수가 어떻게 대답했는지는 모른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지난 4백년간의 아시아 선교 역사는 무기와 욕심 그리고 놀라운 은혜의 복합물이었습니다.”
참 아이러니칼한 표현이죠? 무기와 욕심 그리고 놀라운 은혜가 어떻게 함께 공존할수 있을까요?
한편 마지막 에필로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마펫 박사는 마무리를 합니다. 식민주의자와 함께 선교사들이 4백년간 큰 바다 물결이 되어 아시아를 세 차례 덮친 것으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세 차례 크게 쓰나미가 온 것입니다. 마펫 박사는 제국주의를 앞세운 식민주의자들을 바다의 물로 비유하고 있고 선교사들을 바닷물의 소금으로 비유하고 있었습니다.
바닷물이 쓰나미로 덮치면 많은 파괴가 일어나듯이 아시아에 많은 파괴가 생겼음을 인정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바닷물은 소금을 남겨 놓게 됩니다.
마펫 박사는 이 당시 선교사들의 소금은 두 가지 역할을 다 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소금은 맛을 내게 합니다. 좋은 것입니다. 반면 소금은 많은 좋은 식물들을 죽이기도 합니다.
여기까지 읽으면 정말로 설교학 교수가 교회사 교수에게 그러한 이해하기 어려운 질문을 하게 된 이유를 크게 공감하게 됩니다.
선교사가 가는 곳에는 식민지 지배자들이 함께 갔고 아울러 선교사는 소금의 맛을 내기도 했지만 그곳에 좋은 것을 해하는 나쁜 역할도 많이 했다는 것입니다. 교회사를 공부하다 보면 이 모든 것을 잘 알게 되는데 어떻게 계속 크리스챤으로 남아 있을수 있느냐는 질문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마펫 박사는 이 모든 질문을 일축시키는 한 가지 표현을 합니다.
“식민지 제국들은 사라졌지만 교회는 남아 있습니다.”
많은 부조리와 모순을 안고 세계 선교는 진행이 되었는데 아이러니칼하게도 선교사들을 앞장 세웠던 제국들은 사라졌지만, 선교사들의 잘 잘못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들이 뿌린 씨앗은 싹이 나서 교회는 계속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설교학 교수는 교회사를 잘 모르기에 그런 질문을 한 것 같습니다. 교회사를 제대로 알면 많은 모순 가운데서도 신비스럽게 역사하시는 주님의 위대한 자취를 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욱 주님 앞에 겸손해지지 않을까요?
오늘 사순절 두번째 주일 예배로 드립니다. 올해 사순절 기간 특히 모순적 역사 안에서 신비스럽게 우리를 찾아 오시는 주님을 만나고자 합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바로 모순적 역사 안에서 그리스도를 닮은 자가 되어 가길 바랍니다.
이번 사순절 기간 주님의 몸된 교회를 통해서 행해진 아니 행하여지고 있는 온갖 모순에 관심을 갖기 보다는 그 가운데서도 역사하시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합니다. 이 주님의 음성을 듣는 자들로 인해서 주님의 교회는 계속 이 땅에서 번창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오늘 사순절 두번째 주일을 맞이하여 주님은 혼동 가운데 당황해 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어떤 말씀을 하실까요?14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주님은 저희들의 친구가 되길 원하십니다. 저희들의 친구가 되길 원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생각하니 많은 혼동 가운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슴이 뭉클해 옴을 느낍니다.
오래 전에 어느 교우님이 당신의 웹싸이트를 소개해 주셔서 한 번 들어가 보았습니다. 아직도 기억에 남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목은 ‘친구’였습니다. 그리고 도마뱀 두 마리 사진이 보였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2년전에 집수리를 했는데 다시 벽을 뜯게 되었다고 합니다. 벽을 뜯어 보니 도마뱀 한 마리가 도망가지도 못하고 벽에 박혀 있는 것이었습니다. 2년전에 벽수리를 할 때 못을 박았는데 어쩌다 못에 다리가 박혔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2년이 지나도록 다리가 못에 박힌채로 도마뱀은 살아 있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살았을까요? 친구 도마뱀이 먹이를 하루 세끼 날라다 주어서 살았던 것입니다.
이 도마뱀의 이야기를 접하고 나면 주님께서 우리의 친구가 되신다는 표현이 더 가슴에 와 닿습니다.
친구지간은 만물의 영장인 사람들만의 독점물이 아닌 것 같습니다. 도마뱀을 포함해서 모든 동물들에게도 한없이 소중한 것이 친구인 것 같습니다. 친구는 하나님의 피조물 안에 깊게 스며든 아름다움인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너희는 나의 친구라” 하시는 말씀 안에서 주님은 자연의 한 구성원이 되고파 하시는 마음을 느낍니다. 도마뱀이 친구를 그리워하듯이 당신도 친구를 갖고 싶은 한 작은 피조물과 다름 없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좀 다른 이야기 같지만 오래 전에 제가 한 가요를 설교 시간에 소개해 드린적이 있습니다. 희미하게 남은 기억은 “나는 너를 떠나도 너는 나를 떠나서는 안 돼”라는 이기적인 내용이 담긴 가요를 소개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그 설교를 많은 분들이 좋아하시더라구요. 이유인즉슨 목사님도 당신들이 좋아하는 가요에 관심이 있다는 것에 은혜를 받았던 것 같았습니다.
우리가 도마뱀들의 아름다움에 마음이 녹듯이 주님도 도마뱀의 모습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시고 계실줄 압니다. 그러니 더 주님이 가까워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이 세상 가운데 친구로 오신 더 큰 이유가 있습니다. 첫번째 이유는 말씀드린대로 온 세상이 친구의 아름다움으로 창조되었기에 이 곳을 찾아 오셨습니다. 더 중요한 이유는 두번째입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진짜 이유는 친구 사랑의 아름다움을 완성시키시기 위함이십니다. 바로 13절에서 완성된 친구의 사랑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주님은 바로 이 친구의 사랑을 완성시키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친구 사랑의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는 곳입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그것도 부족하신지 주님은 친구의 아름다움을 완성시키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면 주님은 이것을 누구와 더불어 완성시키시기 원하실까요? 다시 한번 14절 말씀을 봉독해 드립니다.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자가 진정 당신의 친구가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들과 함께 완성시키시길 원하십니다. 너무 멋진 말씀입니다.
잘 아시는 울지마 톤즈의 이태석 신부가 생각납니다. 신부요 의사로서 아프리카 수단의 톤즈 주님들을 위해 섬기다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신 분입니다. 정말 이태석 신부는 주님의 친구가 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염려가 생깁니다.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린다는 것 자신이 없습니다. 이태석 신부는 특별한 분입니다.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지 못하면 주님의 친구가 될수도 없습니다. 정말 막막해짐을 느낍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이 사정을 주님께서는 이미 다 아셨는지 우리의 막힌 것을 뻥 뚫리게 하는 말씀을 곧이어 하십니다. 15절 말씀입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말씀의 톤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이미 친구가 된 것을 선언하시고 계십니다.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사실 예수님에게는 친구의 정의가 두 개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또 하나는,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결국 주님은 짧은 몇 말씀을 통해서 멋진 우정에 대해서 논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웃에게 자기의 것을 알려준다면 이미 친구가 된 것입니다. 그 친구가 나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지 않아도 친구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최고의 친구는 목숨까지 버리는 것입니다. 이를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것입니다.
한 사람이 구덩이에 빠져 있었습니다. 구덩이가 너무 깊어서 혼자서 나올수가 없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내려다만 보고는 그냥 지나가곤 합니다.
마침 수도사가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가 정오가 되었습니다. 수도사의 기도시간이었습니다. 잠시 멈추어서 구덩이에 빠진 사람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구덩이에 빠진 사람은 말합니다.
“나를 도와 주시겠습니까?” 기도를 마친 수도사는 대답합니다.
“나는 그만한 힘이 없소이다.” 그리고는 축복해주고는 떠나 갑니다.
다음으로는 의사가 지나가더니 그를 봅니다. 그에게 상처를 어떻게 치료하라고 충고를 해줍니다. 그는 말합니다.
“내가 이 곳에서 나가도록 도와 주시겠습니까?”
“나는 할수 없습니다.” 그도 자기 길을 갑니다.
정치가와 법률가가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둘이는 구덩이에 빠진 사람을 보면서 이 구덩이를 판 사람을 처벌해야 한다고 토론하면서 그 자리를 떠납니다.
마지막으로 친구가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너무 기뻤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친구가 구덩이에 뛰어 내렸습니다. 그 사람은 당황하여 말합니다.
“아니 뛰어 내리면 어떻게 해, 위에서 나를 구해 주어야지. 내가 여기 갇혀 있는게 안 보여.” 친구가 말합니다.
“내가 구덩이를 너의 자리에서 보아야 해. 그래야 함께 나가는 방법을 강구하지.”
교회사에 많은 모순과 어려움이 있었어도 수많은 제국은 사라졌지만 교회는 지금까지 살아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들의 친구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신채로 결코 우리를 구하실수 없음을 잘 아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들의 구덩이에 당신의 몸을 던지셨고 끝내 죄의 구덩이에 있는 우리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들의 영원한 친구가 되신 것입니다.
우리들이 판 우리들의 조의 구덩이에 오셔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의 친구라.”
이 주님의 음성을 듣는 자들은 언젠가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자가 됩니다. 진정한 주님의 친구가 됩니다.
올해도 우리에게 축복의 사순절이 찾아 왔습니다. 사순절을 통해서 우리가 우리의 각자의 구덩이에서 빠져 나올 것을 기도드리실줄 압니다.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의 마지막은 우리의 구덩이에 함께 들어 오셔서 친구가 되신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너희는 나의 친구라.”
말씀을 거둡니다.
어느 성인이 무릎을 꿇고 예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고 합니다.
“예수님, 제 평생 소원은 다시는 당신을 마음 상하게 해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도록 필요한 은총을 주소서.”
이 기도를 들은 예수님이 크게 웃으셨습니다.
“너희는 모두 내게 같은 은총을 구하는구나. 그런데 내가 그러한 은총을 모든 이에게 허락한다면 도대체 나는 누구를 죄에서 구원한단 말이냐? 그것이 바로 내가 세상에 태어나 너희들의 친구가 된 이유인데….”
교우 여러분,
우리들의 구덩이로 점프해 들어 오신 주님을 환영하십시다.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다.
“너희는 나의 친구라.”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