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시편 1:1-6
어느 음악 선생님이 종종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셨다고 합니다.
“너희는 이 세상을 떠날 때 어떤 음악을 들으면서 운명하고 싶은지 네 개의 곡명을 말해 보아라.”
이 음악 선생님의 친구는 이 이야기를 듣고 생각해 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네 개의 곡명을 당신의 책에서 소개합니다. 물론 모두 클래식이었습니다.
한번쯤 생각해 볼만 합니다. 이 세상을 떠날 때 듣고 싶은 음악…. 저도 이 이야기를 읽고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는 어떤 음악을 원할까?”
다음에 기회가 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든 생각이 있습니다. 제가 듣고 싶은 음악이 있건 없건 제가 세상을 떠날 때 어떤 소리가 아니 노래가 들려지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질문을 바꿔보고 싶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 우리의 살았던 삶을 표현하는 음악이 들려진다고 가정한다면 어떤 음악이 펼쳐지기를 원하십니까?’
제가 아무리 어떤 음악을 듣기를 원해도 정녕 들려지는 음악은 저의 삶이 한 곡조가 되어서 만들어진 음악이 아닐까요? 그 때 최고의 음악을 듣는 사람들이 제일 행복한 사람들이 아닐까요? 그러면 인생의 최고의 음악은 어떻게 만들어질까요?
오늘 본문 말씀인 시편1편을 보면 인생의 최고의 음악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보이기 시작합니다.
시편을 해석하는데 중요한 단계가 있습니다. 요즘 소그룹 성경공부 교재가 시편인줄 압니다. 첫번째로는 이미지를 찾는 것입니다. 대개 특정한 이미지가 보입니다. 시편뿐 아니라 시는 항상 이미지가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두번째로는 인간의 죄 내지 죄인의 고백과 연관이 있습니다. 세번째로는 그리스도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찾아 봐야 합니다.
제일 먼저는 이미지를 찾는 것입니다. 그러면 시편1편의 이미지가 무엇이겠습니까? 3, 4 절을 봉독해 드립니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두 가지 이미지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또 하나는 바람에 나는 겨.
저의 집 근처에 제가 산책하는 길이 있습니다. 작은 시내가 흐르는데 아주 초라한 시내입니다. 조금 가물면 금방 물이 마릅니다. 저는 물 소리를 좋아해서 비가 많이 온 후면 꼭 산책을 나갑니다. 그런데 물소리도 물소리지만 그 주위에 높이 솟은 나무들을 보게 됩니다. 저 보다 수 십배가 큰 나무입니다. 그냥 지나칠수도 있지만 요즘은 저도 나이가 들고 나이가 든만큼 키가 줄어서 그런지 그 큰 나무들을 보면서 절로 감탄사가 나옵니다.
그렇다고 저희 집 주변에 캘리포니아에 있는 수천년이 된 Sequoia 나무가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매사추세츠주에서 흔히 볼수 있는 나무들입니다. 잠시 산책을 멈추고 서서 나무를 보면 감탄사가 안 나올수 없습니다. 말 없이 한 군데서 굿굿이 커 가고 있는 모습 정말로 경외감마저 듭니다. 매사추세츠에 사는 나무들을 보면서 경외감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가 하나 있다면 그것은 그 앞에 잠시 서 보신지 오래기 때문일줄 압니다. 잠시 서 보시면 곧 느끼게 될 줄 압니다.
한편 시인은 분명히 경외감을 가지고 시를 쓰고 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시인은 지금 나무와 무엇과 비교하고 있습니까? 바람에 나는 겨.
그냥 나무 앞에 서도 경외감이 올라오는데 바람의 나는 겨를 보다가 나무를 보면 상상을 초월한 경외감을 느끼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시인은 두 가지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 그리고 바람에 나는 겨.
그러면 누가 시냇가에 심은 나무이고 누가 바람에 나는 겨일까요? 1, 2절 말씀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복있는 사람은 바로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입니다. 이들은 어느새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됩니다. 그처럼 위풍 당당한 존재가 됩니다. 반면 율법을 즐거워하지 않는 사람들은 위풍 당당은 커녕 바람에 나는 겨가 됩니다.
이처럼 시인은 인간의 삶을 두 가지 그림으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 아니면 바람에 나는 겨.
종종 솔직한 교우님들이 자녀들의 이야기를 전해 주곤 합니다. 한 교우님은 자녀가 학교에서 숙제가 있었는데 부모님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라는 숙제였다고 합니다.
그 자녀가 부모님의 모습을 어떻게 그렸는지 제가 말씀드릴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저에게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을 보면 상상이 되지 않습니까? 부모님이 많은 도전이 되었다고 합니다. 자녀들이 갖고 있는 부모에 대한 이미지가 무엇인지 생각해 볼만 합니다. 그런데 그 보다 더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이미지입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 아니면 바람에 나는 겨. 여러분은 어떤 이미지를 갖고 계십니다.
그런데 시편의 이미지는 단지 보이는 이미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들리는 이미지도 있습니다.
물론 이미지 하면 보이는 것이 먼저인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들음이 없이는 보이는 이미지가 완성이 될수 없습니다.
저의 젊었을 때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해 드릴까요? 제가 의과대학 3학년 때입니다. 병원에서 임상실습을 할 때인데 마침 피검사등 여러 가지 검사를 하는 임상병리교실을 순회할 때였습니다. 저처럼 학생들도 있지만 직장인들 특히 많은 technician함께 일을 했습니다.
그 중 예쁜 아가씨가 있었습니다. 제 착각인지 몰라도 저에게 아주 잘 대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좀 더 나이가 든 아가씨가 있었는데 그 아가씨는 독실한 크리스챤이었습니다. 쉽게 알수 있었는데 실험대 위에 성경귀절을 써 놓고 매일 외우면서 일을 하였습니다. 한 아가씨는 예뻤고 한 아가씨는 신앙이 좋아 보였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어린 아가씨가 나이 많은 아가씨에게 대들더라고요. 그 후 예쁜 아가씨가 더 이상 눈에 안 들어 왔습니다. 이 당시 저도 아주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보는 것만으로 이미지가 완성이 되지 못한다는 교훈을 저는 아주 일찍 깨우쳤습니다.
사실 보는 것만으로 이미지가 완성되지 못한다는 교훈을 시편이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있는 증표가 있습니다.
시편을 읽다 보면 종종 이상한 단어가 나옵니다. 제일 많이 나오는 단어가 ‘셀라’입니다. 그리고 종종 ‘힉가욘’이 등장을 합니다. 물론 1, 2편에는 안 나옵니다만 3편에는 세 차례나 나옵니다.
인체에서 맹장이 필요가 없어서 다른 이유로 개복수술을 하면 겸해서 맹장을 떼어 내곤하는데 어떻게 보면 셀라나 힉가욘도 맹장처럼 필요가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두 표기는 시편은 노래가사임을 알려주는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구약학자들의 가장 큰 관심사 중에 하나는 시편 150편 모두의 곡조를 찾아내는데 있습니다. 제 보기에는 아마 주님 오실 때까지 못 찾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곡조를 못 찾아도 상관 없습니다. 못 찾는게 더 좋은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시편은 노래라는 것을 이 두 표기가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은 희로애락이 담겨져 있는 노래라는 것입니다. 이는 곧 인생은 음악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두 표기는 우리에게 시편을 읽을 때 보이는 이미지만 생각하지 말고 들리는 이미지도 생각해 보라고 강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는 시편1편도 보이는 이미지뿐 아니라 들리는 이미지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한 사람이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음악인이십니까?”
“네.”
“무슨 악기를 연주하시나요?”
“저는 듣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연주를 해야지만 음악인입니까? 더 중요한 것은 들을줄 알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3절을 한번 봉독해 드립니다.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아니 들음의 이미지를 느끼시기 바랍니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자 ‘시냇가에 심은 나무’를 보니 무슨 소리가 들리십니까? 하이덱거는 귀한 통찰력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향에서 인간은 들길 옆에 튼튼하게 자란 떡갈나무처럼 광활한 하늘에 자신을 열고 어두운 대지에 뿌리를 박고 산다.”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사는 자들은 광활한 하늘에 자신을 열고 신명나게 위로 위로 뻗어 올라가고 있습니다. 하늘로 쑥쑥 자라 올라가는 트럼펫과 같은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트럼펫 부는 사람들은 높은 음을 낼 때 하늘로 향해서 불지 않습니까?
그뿐인가요? 그 다음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병약하여 방에 늘 누워 있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침실 창문밖에는 배나무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배나무 가지는 창문을 통해 침실 안으로까지 들어옵니다. 사랑의 손길을 내밉니다. 축복된 열매는 바로 사랑의 노래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사는 자들은 이 세상이 꼭 필요한 선물이 됩니다. 사랑의 노래를 부르는 자들이 됩니다.
그 다음은,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싱싱한 잎사귀를 보면 열심히 일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 않습니까?
https://www.youtube.com/watch?v=CkQQbRqLoCI
끝으로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말씀 가운데 사는 자들은 이처럼 모든 일에 형통함을 체험합니다. 형통함을 체험하는 자들에 입에는 늘 기쁨과 감사의 노래가 담겨져 있지 않을까요?
그러므로 말씀 가운데 사는 자들은 먼저 말씀 앞에서는 듣는 음악인이 됩니다. 아울러 말씀을 따라 살 때는 매일 하늘을 향하여 트럼펫 연주가가 됩니다. 이웃을 향하여 사랑의 노래를 부릅니다. 장단을 맞추며 일을 합니다. 기쁨의 노래를 부르는 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고 따르는 자들은 놀라운 음악인들입니다. 진정한 음악인들입니다. 듣기도 하고 부르기도 하는….
교우 여러분,
이번 여름 기간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십시다. 최고의 음악인이 되십시다.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 우리는 우리가 작곡한 음악을 들으며 하나님께 나아갈 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중세기 유명한 수도사 베네딕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수비아코에 있는 동굴에 숨어 삼 년간 기도와 관상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곳에 성인이 있다는 소식이 들려 오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왔고 자연스럽게 수도 공동체가 형성되었습니다.
한 미친 여자가 있었습니다. 사방을 헤매고 다녔습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산으로 들로 계곡으로 숲으로 쏘다녔습니다. 기력이 다하여 쓰러졌을 때만 쉴 뿐이었습니다. 정처 없이 헤매던 어느 날, 그는 자신도 모르게 베네딕트의 동굴에 들어가 하루를 머물게 되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여인이 그 동굴을 떠나는 순간, 그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싶게 멀쩡해져 있었습니다. 그는 남은 여생을 온전한 정신으로 살았습니다.
아마 이 여인은 베네딧트의 음악으로 인해서 치료를 받게 되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그도 자기의 음악을 창조하는 음악인이 되어 갔을 것입니다. 그도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되어 갔을 것입니다.
한 사람의 음악으로 인해 한 사람이 치료를 받았는데 많은 사람들의 음악으로는 더욱 놀라운 일들이 생겨나지 않을까요?
그러므로 우리는 혼자서 깊게 말씀을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마친다면 우리는 반쪽 음악인이 되는 것입니다. 남들의 음악을 들어야 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말씀을 함께 읽고 나누어야 합니다. 소그룹 성경 공부나 구역 모임, 수요 여성 공부, 청년부등을 통해서…. 우리는 진정한 음악인이 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함께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십시다. 최고의 음악을 만들어 가십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