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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대강절II: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창세기 15:1-7) 12/6/2015

 

 

어느 목사님 가정에서 자라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늘 밖에 나가서 노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나무에 올라가고 그네를 타고 강아지와 함께 딩굴고…. 어느 날도 여느 때처럼 놀고 있는데 엄마가 저녁을 먹으라고 불렀습니다. 온 가족이 이미 저녁 테이블에 둘러 앉아 있었습니다. 엄마가 아이를 보더니 말합니다.

“어디 손을 좀 볼까.” 엄마가 또 말합니다.

“얼마나 자주 말을 해야 알아 듣겠니? 손이 더러우면 병균이 득실득실하지…. 함께 기도를 드린 후 손을 씻고 와.”

아버지 목사님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드렸습니다. 아이는 일어나더니 부억을 나섭니다. 잠시 서서 뒤를 돌아보면서 엄마에게 말합니다.

“Jesus and germs. Jesus and germs! 우리 집에서는 항상 예수와 병균 이야기를 하는데 내 눈엔 하나도 보이지 않아요.”

 

재미있기도 하지만 아주 깊은 멧세지라 담긴 말인 것 같습니다. 이 아이의 말은 바로 요즘 세상 사람들의 말이 아닐까요?

사실 지난주에도 어느 도시 공립학교에서 예수님 탄생 이야기로 뮤지칼을 하려고 했는데 무신론자 단체에서 고소를 하였고 판사가 손을 들어 줘서 결국 공립학교에서 예수 탄생 뮤지칼을 할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절기가 아니라 그냥 노는 절기가 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이유는 그들의 눈에 예수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래서 그들도 “Jesus and germs, 내 눈엔 하나도 안 보여요.”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세상 사람들 눈에는 예수가 안 보이니 이젠 더 이상 크리스마스를 지키지 않고 그냥 Holiday Season으로 지키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우리가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요? 사실 이 아이가 예수를 보지 못한 이유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목사 가정이지만 가정 안에서 예수를 맛보지 못한 것일줄 압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서 예수를 보게 할수 있을까요? 우리가 아브라함 처럼 되면 되지 않을까요?

어떤 분들은 처음부터 고개를 설레 설레 흔드실지 모르겠습니다. 아브라함처럼 된다…? 정말 제가 너무 엄청난 것을 말씀드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다음 이야기가 조금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어느 수도사에게 한 수련생이 찾아 왔습니다. 그런데 수도사의 길을 가려면 많은 노력을 해야 하고 또 많은 것을 버려야 할 것이라는 생각에 수도사의 길을 가는 것을 주저 주저 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수도사가 수련생에게 말합니다.

“그 토록 많은 노력과 희생을 감수해야만 볼수 있다고 생각하니…?” 좀더 쉽게 표현한다면,

“눈을 떠서 본다는게 그렇게 어렵니…?”

수도의 시작은 보는 것에 있고 보기만 하면 뒤는 그저 따라 온다는 의미인줄 압니다.

 

사실 아브라함이 아브라함이 되는데 첫번째 한 일은 눈을 뜨고 보는 것이었습니다. 지난주에도 봉독해 드렸습니다. 12:1, 2절 말씀입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이 말씀을 듣고 아브라함이 제일 먼저 한 일은 보는 것이었습니다. 상상의 눈을 떠서 앞으로 펼쳐질 놀라운 자기의 민족을 보았습니다. 이것을 보았기에 그는 무작정 떠납니다. 보지 않았으면 떠났을리가 없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이 아브라함이 되는 첫번째 길은 보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상상 속에서 큰 민족을 보았습니다.

그 후, 지난 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막 가나안 땅에 도착한 아브라함에게 두번째로는 땅의 티끌을 보게 하십니다. 땅의 티끌처럼 자손이 번성하게 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그 후 아브라함은 자주 자주 땅을 보면서 특히 땅의 티끌을 보면서 자기의 후손을 꿈꾸면서 살았을 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대낮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대낮은 아브라함의 세상이 되었습니다. 땅의 티끌이 낮에만 보이니 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세번째 보라는 이야기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낮의 사람 아브라함은 아직 자녀는 없지만 점점 강성해 집니다. 그러나 그는 낮에만 생생하고 밤이 되면 우울해지곤 한 것 같습니다. 자녀는 없지만 낮에는 흙을 보면서 늘 위로를 받곤 하는데 밤에는 흙이 보이지 않으니 밤마다 불안감이 슬며시 아브라함을 괴롭히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15:1절 말씀입니다.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 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아브라함은 지금 두려워하고 있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었겠습니까? 롯이 떠났기에 혼자 큰 가족을 이끌고 사는게 두려웠을까요? 사실 바로 전 귀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소돔에서 살다가 포로가 된 롯을 구하는 이야기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소돔왕도 구할 정도로 강한 군대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의 두려움은 그러한 두려움이 아니었습니다. 그 다음 절을 보면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지를 알수 있습니다. 2절 말씀입니다.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라함의 두려움은 자식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낮에는 땅의 티끌을 보면서 위로를 받곤 했는데 밤에는 효력이 많이 떨어진 것 같습니다. 이 날은 두려움 가운데 밤에 기도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에 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두려움 가운데 있는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계속해서 5절 말씀입니다.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이에 아브라함이 밖에 나가 보았겠습니까? 안 보았겠습니까? 당연히 나가 보았겠죠. 아브라함은 밤 하늘을 밝히는 수많은 별을 봅니다. 별을 보고 나니 다시 믿음이 생겼습니다. 보았기 때문에…. 이처럼 본 다음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습니다. 6절 말씀입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신학적인 긴 설명을 하신적이 없습니다. 세 번 ‘보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보라고 하실 때마다 보았습니다. 보니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되어 간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대강절은 보는 절기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보십니까? 여러분들에게 보이기 위하여 대강절에는 대강절 촛불을 킵니다. 지난주에는 하나가 켜져 있는 것을 보셨을줄 압니다. 오늘은 두 개의 촛불이 켜졌습니다. 다음 주일은 분홍색 촛불이 켜집니다. 분홍색은 세례요한을 상징하는 촛불입니다. 그래서 세번째 주일은 선교적인 주제를 가지고 예배를 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네번째 주일에 촛불이 다 켜지면 아기 예수가 오심을 축하드리면서 성탄주일 예배를 드립니다.

매 주일 유심히 촛불이 하나씩 더해지면서 켜 지는 것을 보시기 바랍니다. 보시면 믿음이 생깁니다. 믿음이 안 생기는 것은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촛불이 하나씩 켜지는 것을 보십시다. 삶이 달라질 것입니다.

 

물론 촛불만으로는 한계를 느낄수도 있습니다. 일주일에 한번 와서 보는 촛불을 뇌리에 강하게 넣으려고 해도 하루 정도는 가는데 사회 생활하면 곧 무너질수도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그랬습니다.

낮에 땅의 티끌을 바라 보면서 큰 민족을 이루는 꿈을 키워 왔던 그였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니 특히 어두운 밤이 되면 은근한 불안이 스며들곤 하였습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는 하나님께서는 밤하늘의 별들로 그의 꿈을 키워가신 것입니다. 곧 땅의 티끌만 가지고는 부족했던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는 두 말할 나위 없을줄 압니다.

 

사실 저에게도 촛불만으로는 부족함을 잘 아셨는지 저에게 올해 대강절을 맞이 하여 새로운 축복을 주셨습니다. 저에게 어느 나무를 보게 하셨습니다. 이 나무가 저에게 대강절의 축복을 새롭게 해 주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쏠제니친의 ‘느릅나무 둥치’라는 수필을 소개해 주었는데 느릅나무도 좋긴 하지만 사실 저는 느릅나무는 잘 모릅니다. 단지 쏠제니친의 수필을 통해 감동을 받은 것뿐입니다. 저에게 아니 우리 교인들에게도 무척 가까이 있는 나무가 있습니다.

 

‘나무 의사’로 불리워지고 있는 우종영씨가 있습니다. 이 분은 나무를 치료하는 것을 삶의 소명으로 삼고 있는 분입니다. 이 분이 나무의사가 된 동기가 있습니다. 솔제니친이 느릅나무를 통해 영적 도전을 받았는데 이 분도 실의에 빠져 있을 때 옆에 서 있는 나무로 인해서 큰 힘을 얻습니다. 자살 직전에 옆에 있는 나무로 인해서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심합니다. 결국 그는 나무를 사랑하게 되고, 나무의사이자 나무 학교 선생님이 되었습니다.

그는 ‘나무처럼 살고 싶다’라는 책에서 모든 종류의 나무들을 소개하고 각 종류의 나무가 주는 교훈을 소개합니다.

자기의 취미는 사진인데, 그래서 모든 나무꽃의 사진이 있다고 하는데 딱 한 나무의 꽃을 찍은 사진이 없다고 합니다. 대나무 꽃입니다.

여러분 대나무 꽃 보신 분들 계십니까?

 이유는, 대나무는 60-120년을 사는데 꽃은 단 한번만 핀다고 합니다. 그러니 꽃 핀 대나무를 본다는 것은 여간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 그 꽃이 언제 필까요? 깨끗하게 한번 피고 삶을 마감한다고 합니다. 곧 60년이면 60년 120년이면 120년을 기다린 후 꽃을 피고는 생을 마감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나무들이 수십번 수 백번 꽃을 피우는데 대나무는 단 한번, 그것도 마지막에….

곧 대나무는 마지막 한 번 꽃을 피우기 위해서 전 생애를 살아 갑니다. 그 때를 기다리면서 살아 가는 것입니다. 수십년 아니 백년 이상을….

 

저는 요즘 대강절을 맞이하여 기도 중에서도 대나무를 많이 생각합니다. 마지막에 화려한 꽃을 피고 생을 마감하는…. 대나무를 묵상하면서 기도하다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대나무를 주신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깨달은 것을 저희 가족 카톡방에 올렸습니다. 저희 가족이 요즘 카톡으로 연락을 주고 받고 하고 있습니다. 12월에 들어 오면서 어느 분이 저에게 12월의 축복 기도를 해 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제일 막내입니다. 그러나 제가 목사인지라 축복 기도를 해 달라고 제일 큰 누님께서 명령하신 것입니다. 제일 큰 누님의 명령이니 막내가 안 들을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저는 12월의 나무는 대나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분들이 포인세치아로 생각하실지 몰라도…. 얼마전 알게 되었는데 대나무 꽃을 보기란 하늘에 별따기라고 합니다. 이유는 60-120년을 사는데 대나무는 그들의 삶 마지막 곧 그들의 12월에 꽃을 피고 명을 다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대나무 꽃을 보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 60-120년을 마지막 순간을 향하여 달려 오고 마지막을 꽃으로 장식하다니 정말로 멋진 피조물입니다.

요즘은 대강절,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하나님의 우주적 역사의 마지막 꽃이 피게 될줄 믿고 큰 기대를 가지고 오늘도 살아갑니다.”

저는 대나무를 묵상하다가 바로 대나무가 인류 역사를 대변해 주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인류 역사의 마지막은 화려하게 장식될 것을 보여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화려하게 장식이 안 될래야 안 될수 없습니다. 인류 역사의 마지막에 영광의 주님께서 다시 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역사는 마지막 최고의 순간을 향하여 달려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순간에 영광의 주님께서 세상으로 오십니다.

 

사실 저희 집에 대나무 화분이 있습니다. 물론 아직 꽃이 안 피었으니 함께 살고 있습니다. 제 사무실에도 대나무 화분이 두 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전에 대강절의 선물로 주신 것 같습니다.

이 대나무는 항상 싱싱한 느낌을 줍니다. 싱싱한 희망을 준다고 할까요? 이유를 이번에 알게 된 것입니다. 마지막 화려한 꽃을 필 것을 생각하며 희망에 가득찬 모습을 안고 자라는 것이 바로 대나무의 모습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대나무와 함께 참 대강절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새 대나무처럼 희망의 광채 아니 예수님의 광채가 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주변 사람들이 더 이상 “Jesus and germs, 내 눈에는 안 보이네”라는 말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지 않을까요?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번 대강절 기간 한 주 한 주 켜지는 촛불을 보면서 인류 역사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하실 그리스도의 오심을 함께 보십시다. 삶의 놀라운 변화를 체험하실 것입니다. 아울러 우리로 인하여 아기 예수를 경배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룰 것입니다. 우리들을 통해 아기 예수의 광채가 발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윌리암 쉐익스피어가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진실된 희망은 빠르고, 제비 날개를 타고 날아간다오. 희망은 왕을 신으로, 왕보다 못한 피조물들은 왕으로 만든다오.”

희망 가운데 있는 왕들에게서는 신의 광채가 나고 희망 가운데 있는 일반인들에게서는 왕의 광채가 난다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희망 가운데서 사는 우리를 통해 왕의 광채가 발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 예수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수 있나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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