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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왕 (요한복음 5:1-8) 10/02/2016

 

영국에서 유학을 했던 한 한국 학생이 있었습니다. 하숙집에 머물고 있었는데 그 하숙집을 자주 드나들던 한 할아버지로부터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곤 하였답니다. 그 할아버지는 자주 “내가 세계 역사의 흐름을 바꿔놓은 사람이야” 말씀을 하시곤 하였답니다. 어느 날 학생이 할아버지에게 여쭈었습니다. 어떻게 세상 역사를 바꾸어 놓았냐고…. 그러자 할아버지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무용담을 풀어놓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할아버지는 독일군 장교 하나를 잡았는데, 할아버지의 임무는 또 다른 군인과 함께 그 포로를 후방으로 이송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이송 도중 한 오두막에 들어가서 밤을 보내게 되어, 포로는 묶어 놓고 할아버지와 또 다른 군인이 교대로 보초를 서게 되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보초를 서다 잠깐 졸았는데 졸다 눈을 떠 보니 독일군 장교가 줄을 풀고 둑을 넘어 도망가는 것이 어스름한 달빛 아래로 보였습니다.

할아버지는 바로 총을 들고 조준했습니다. 충분히 총을 쏠 수 있는 거리였습니다. 그러다 ‘에이. 우리끼리 모른 척하면 되는 건데…. 그냥 살려주자’ 하는 생각이 들어 총을 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고나서 나중에 ‘내가 한 사람 인생 살렸다’하고 생각하며 이 사람에 관련된 서류를 확인했습니다. 그 서류에 기록된 이름은 아돌프 히틀러였다고 합니다.

동명이인이었는지 아니면 정말로 세계를 뒤집어 놓은 히틀러였는지는 확인할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히틀러라고 가정한다면, 이 할아버지가 정말로 역사를 바꿔놓은 사람이 된 것은 틀림 없습니다.

사실 동명이인이 아니었다면 이 할아버지가 역사를 바꿔 놓은 분임을 우리는 모두 동감할줄 압니다. 특히 바로 지난 주는 이를 더욱 실감나게 하는 주간이었습니다.

 

지난주 목요일자 USA TODAY에는 Babi Yar라는 곳을 소개하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Ukraine의 수도 Kieve옆에 위치한 곳인데, 이곳에서 75년전에 독일 나치 일당들이 유대인 33,000명 이상을 살해합니다.

9월29일이 학살을 시행한 날인데 3일전 도시 곳곳에 다음과 같은 포스터가 붙여졌습니다.

“모든 유대인들은 9월 29일 월요일 오전 8시 까지 비스코브 공동 묘지 앞 거리에 집합하라. 모든 서류와 돈과 값진 물건과 그리고 옷들을 가지고 오라. 이 명령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발견되는 곳에서 사살 될 것이다. 아울러 유대인들이 살던 집에 들어가거나 그들의 물건을 탈취하는 사람도 사살될 것이다.”

사실 나치들은 약 5,000-6,000명의 유대인들만 나올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3만3천명 이상이 집합했습니다. 이유는 학살을 당할 것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단지 멀리 이주시킬줄 알았다고 합니다.

나치들은 순식간에 3만명을 학살합니다. 그러니 정말로 이 할아버지는 역사를 바꿔 놓은 분임에는 틀림이 없는것 같습니다.

 

그러면 정말 이 할아버지가 역사를 바꿔 놓았을까요? 만일 이 할아버지가 힛틀러를 사살했다면 또 다른 힛틀러가 나오지 않았을까요? 참 역사를 바꿔 놓는 삶은 총에 있지 않고 다른 무엇에 있지 않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상고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절 말씀입니다.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제가 벌써 몇 차례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새로 오신 교우님들도 계시니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유대인의 명절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일년에 세번 장정들 특히 남자들은 예루살렘에 올라 와서 예배를 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곧 1년에 세차례 예루살렘으로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요즘처럼 자동차를 타고 오겠습니까? 거의 모든 사람들이 나귀를 타던가 걸어 갔습니다. 이처럼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걸어서 가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곤 하였습니다. 예수님도 장정의 한 사람이기에 명절을 맞이해서 예루살렘에 오신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가는 곳은 당연히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웬일인지 먼저 다른 곳으로 향하신 것 같습니다. 어디로 향하셨을까요? 2절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주님은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베데스다라는 못으로 향하셨습니다. 왜…? 먼 길을 오셨으니 그 못에서 손을 씻으시려고…? 아니면 좀 쉬려고…? 3절 말씀입니다.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알고 보니 쉼이 그리워서 베데스다 못을 찾으신 것은 아닌 것임을 알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걷지 못하는 병자들로 가득차 있는 곳입니다. 병자들 틈에서 쉼의 시간을 누릴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이곳을 찾으신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유대의 명절은 한 마디로 걷는 자들의 명절입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방방곡곡에서 걸어서 예루살렘으로 찾아 옵니다. 걷지 못하는 자들은 아예 처음부터 명절은 더욱 괴로움이 더하는 절기입니다. 어쩌면 걷는 자들의 축제라고 말해도 좋은 정도입니다.

그러니 주님은 이 축제의 절기에 더 괴로워 하고 있는 자들을 찾아 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으로 향하는데 주님의 마음은 성전보다 베데스다 못으로 끌린 것입니다. 그러면 왜 걷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필 이 베데스다 못에 모여 있었을까요? 4절 말씀입니다.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주님은 못에 가까이 오시자마자 크게 실망하셨을 것입니다. 모두가 눈을 부릅뜨고 언제 물이 움직이나 물을 뚫어지게 쳐다봅니다. 걷지 못하는 자들을 위로하러 찾아 오셨는데 모두가 정신이 없습니다. 걷지 못하는 사람들끼리 피나게 경쟁하는 곳이었습니다. 걷는 사람들보다 더 피나게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누가 베데스다를 찾아 오는데는 관심이 없습니다. 아니 한 사람이라도 더 오면 경쟁의 대상이 되니 좋을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아무도 주님을 알아 볼수가 없었습니다. 평화의 주님을….

그런데 한 사람이 눈에 들어 옵니다. 이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좀 다른 분위기였습니다. 더 이상 눈을 부릅뜨고 물을 노려 보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포기한 분위기가 가득합니다. 5절 말씀입니다.

“거기 서른 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아니나 다를까 38년간 병에 걸려서 걷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더 이상 이웃과 경쟁할 의욕조차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찾아 가십니다. 주님은 물으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에 병자가 어떻게 대답하나요? “예, 낫기를 원하나이다…?” 7절 말씀입니다.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동문서답을 합니다. 주님은 낫기를 원하냐고 물으셨는데 그의 답변은 낫기를 원한다는 답변 대신에 자신의 속 마음을 내 놓습니다. 누군가가 자기를 다른 병자들보다 먼저 넣어 줄 사람을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는 다른 사람들과 다를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기를 못에 던져 줄 한 사람을…. 그런데 예수라는 사람이 자기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이에 주님이 어떻게 반응하시나요? 8, 9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그는 그토록 걷고 싶었는데 38년만에 걷게 됩니다. 그 동안 가보고 싶은 수 많은 곳을 찾아가기 시작합니다. 물론 제일 먼저는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 가 보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는 그 이후로는 명절 때면 순례자가 되어서 예루살렘을 매해 세번 찾아 왔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병자가 걷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번째로는 그는 주님을 보았습니다. 다른 병자들은 자기 힘으로 못에 뛰어 들 생각에 주님을 보지 못하였지만 그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기에 주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자기 앞에 선 주님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질문에 답변하였습니다. 물론 그 답변은 동문서답이었습니다. 주님은 “네가 낫고자 하느냐?” 질문하셨는데 그는 엉뚱한 답변을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주님은 그 답변의 내용은 전혀 개의치 않으십니다. 주님의 관심은 당신의 질문에 답변했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하신 것 같습니다.

곧 평화의 왕된 주님은 정답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의 길은 답변의 내용이 아니라 주고받는 대화 자체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일어나 제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많은 병자들은 주님을 보지 않았습니다. 주님도 하나의 경쟁 대상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반면 이 병자는 주님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주님과 대화를 나눴습니다. 걷는 자들의 축제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만일 주님께서 병자의 정답을 듣고 고쳐 주셨더라면 세상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실 많은 병자들이 못에 더 일찍 들어 가려고 경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힘의 경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편 주님께서 정답을 원하셨더라면 지식 내지 지혜의 경쟁 세계를 새롭게 열게 되는 것입니다. 곧 주님은 힘의 경쟁 위에 지식 내지 지혜의 경쟁을 불러 일으키는 장본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힘의 경쟁과 지식의 경쟁을 한 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드셨습니다. 주님은 진실로 평화의 왕으로 오신 것입니다. 주님이 계신 곳에는 힘의 경쟁이 사라집니다. 지식과 지혜의 경쟁도 사라집니다.

 

병자는 자기를 찾아온 예수라는 사람의 힘으로 다른 병자들을 이기고 낫게 되기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평화의 왕으로 오신 주님은 그것은 또 다른 힘의 경쟁을 일으키는 것임을 너무도 잘 아셨습니다. 당신의 질문에 응답한 병자를 평화의 방법으로 고쳐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평화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임하였을 때 나음이 임한 것입니다. 곧이어 걷는 축제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 놀라운 평화의 축제에 누구가 초대받을까요? 평화의 왕으로 오신 주님을 보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질문에 아무 대답이라도 하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이들을 통하여 온 세상에 퍼집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정답을 찾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많은 분들이 잘 아시겠지만 힛틀러가 힛틀러가 되기 시작한 것은 가정에서부터입니다. 길게 설명해 드릴 시간은 없습니다. 아버지는 힛틀러의 이름조차도 부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들의 이름을 부르는 대신에 휘파람을 불었다고 합니다. 힛틀러는 이름이 없이 성장한 병자였던 것입니다.

이 병자 앞에 주님이 서지 않으셨을까요? 당연히 주님은 서 계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힛틀러는 대답을 안 한 것입니다. 힛틀러는 어려서 카톨릭 교회를 다녔고 altar boy도 하였습니다.

Altar boy를 하였지만 그는 altar boy를 하면서 그의 마음에는 더욱 유대인을 향한 증오가 가득찼습니다. 이유는 자기를 괴롭히는 아버지의 아버지 곧 친할아버지가 유대인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증오를 유대인으로 돌린 것입니다.

이처럼 유대인에 대한 증오심을 안고 altar boy를 하는 힛틀러 앞에 서서 주님은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러나 그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주님을 보지 못하고 있던 힛틀러에게 누군가가 가서 주님이 서 계심을 알게 해주었더라면 바로 그 사람이 역사를 바꾼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이제 와서 75년전의 역사를 되돌릴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되돌릴수 있는 역사가 있습니다. 그것은 앞으로의 75년의 역사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과거 75년의 역사를 바로 잡기 위해 불림을 받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앞으로의 75년의 역사를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성만찬을 나눴습니다.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셨습니다. 그러니 우리 안에 우리를 늘 괴롭혔던 힘의 경쟁 지식의 경쟁이 더 이상 우리를 사로잡지 못합니다. 사실 우리도 38년간 힘의 경쟁 지식의 경쟁으로 병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도 걸을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몸이 된 것입니다. 도리어 우리가 가는 곳에는 힘의 경쟁도 지식의 경쟁도 사라집니다. 평화가 임합니다.

교우 여러분,

38년간 힘의 경쟁 지식의 경쟁에 병들어 있는 곳을 찾아 가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몸입니다. 평화의 왕이 함께 하십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지난주 설교 준비를 하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들겨서 나가 보았습니다. 고등학생 두 명이 서 있었습니다. 손에 든 Dedham High School decal을 보여주면서 $20인데 후원을 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입니다.

Dedham에 살지만 저희 아들은 Brookline에서 학교를 다녀서 아무런 상관이 없는 학교입니다. 그래서 그곳에 살고 있으니 $20을 꺼내 주었습니다. “Thank you”하며 받길래 기회는 챤스다 하고 “God bless you”했습니다. 아무 대꾸가 없더라구요. 만일 이 학생들이 돈 말고 제가 말하는 “God bless you”에도 “Thank you”했더라면 진정한 평화를 맛보지 않았을까 살짝 생각이 스쳐 갔습니다.

우리들의 평화의 인사에 반응을 하던 안 하던 그것은 당사자들의 몫입니다. 우리는 가는 곳마다 평화의 소식을 전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 주님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평화의 인사에 대답하는 자들에게 주님은 걷는 자들의 축제에 초대하십니다.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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