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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기의 신비 (이사야 9:1-7) 12/11/2016

 

Anselm Grun이라는 영성가가 지은 대강절 묵상집에 보면 대강절 세번째 주일의 주제를 ‘빛’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한 saint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Saint Lucia입니다. Lucia는 로마 박해 시절 음식을 감옥에 갇힌 사람들에게 가져다 주곤 한 사람이었습니다. 밤에 음식을 가져다 주곤 하였기에 빛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촛불로 wreath를 만들어서 머리에 쓰고 밤마다 음식을 배달하곤 하였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지금 저희들 앞에 보이는 이 Advent Wreath를 머리에 쓰고 걸어다니는 모습을…. 요즘도 Scandinavia에서는 Lucia의 빛을 생각하면서 대강절을 보낸다고 합니다. 사실 Lucia는 로마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Scandinavia에서 Lucia를 많이 기념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Lucia는 Scandinavia와 상관이 없는 로마 여인이지만 잘 아시다시피 Scandinavia는 밤이 깁니다. 그들은 늘 빛을 그리워 합니다. 그래서 어느 지역 보다도 Scandinavia에서 St. Lucia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는다고 합니다.

 

오늘 대강절 세번째 주일 예배로 드립니다. 그래서 Advent Wreath의 세 개의 촛불이 켜졌습니다. 다음주는 네번째 촛불까지 키고 예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그 다음 주는 아기 예수를 상징하는 가운데 하얀 촛불까지 키고 예배를 드립니다.

그리고는 그 다음 주에는 어떻게 되나요? Advent wreath는 closet으로 들어 가고 또 1년을 기다려야 하나요?

Advent Wreath는 closet으로 들어 간다면 빛은 누가 비쳐야 하나요? 대강절을 지키는 바로 우리가 빛의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면 진정 어떻게 빛의 사람이 될수 있는지 말씀을 상고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절 말씀입니다.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먼저 말씀드릴 것은 구약 성경에서는 예언의 말씀은 자주 과거형으로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과거로 많이 표현되어 있는데 이는 과거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 앞으로 될 일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곧 마지막 귀절에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라는 표현은 예언적 표현입니다. 스볼론과 납달리가 위치한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실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스볼론과 납달리는 이스라엘 12지파 중에 북쪽에 있는 지파입니다. 이들이 위치한 곳은 갈릴리 주변에 있는 땅이었습니다. 한편 이곳은 오래 전부터 어두운 곳이었습니다. 물론 스칸디나비아 처럼 북쪽에 있어서가 아니라, 북쪽이기에 외부의 침략이 잦았고 아울러 예루살렘에서 멀어서 그런지 이스라엘 역사에 늘 뒷전에 있었던 곳입니다. 어떻게 보면 버려진 곳입니다. 그런데 이 곳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영화롭게 하실까요? 2절 말씀입니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이 버려진 땅에 빛이 비추일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스볼론과 납달리 곧 북쪽 버려진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기다리던 빛은 어떤 빛일까요? St. Lucia처럼 머리에 얹혀져 있는 Wreath에서 흘러 나오는 빛일까요? 3절 말씀입니다.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탈취물이라는 단어가 눈에 띕니다. 한 마디로 전쟁에서 승리해서 즐거워하는 모습입니다. 말씀드린 것 처럼 북쪽에 위치해서 늘 외부의 침략을 제일 많이 받은 곳입니다. 이들에게서의 빛은 전쟁에서 승리를 주는 영웅이었습니다.

한국 역사도 전쟁의 역사인데 임진왜란 때 한민족의 영웅은 누구입니까? 이순신 장군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바로 한 민족의 빛이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민족에게도 전쟁의 영웅이 몇이 있는데 이사야는 그 중 한 사람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4절 말씀입니다.

“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미디안의 날’ 하면 이스라엘 민족의 뇌리에 떠오르는 영웅이 한 사람 있습니다. 300명의 용사로 수 많은 미디안 군대를 무찌른 기드온입니다. 스볼론과 납달리 사람들은 기드온과 같은 영웅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영웅이 나타나서 자기들을 적군의 손에서 벗어나 주게 하길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이를 너무나 잘 아신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서 바로 기드온과 같은 영웅이 언젠가 찾아 올 것을 예언하고 계신 것입니다. 5절 말씀입니다.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전쟁의 완전한 승리를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앞으로 찾아올 기드온의 모습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전처럼 나팔 불며 항아리를 부수고 횃불을 밝히면서 또 찾아 오실까요? 아니면 우리들에게 더 친숙한 이순신 장군의 모습으로 나타날까요? 6절 말씀입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런데 이번에 소개되는 영웅은 기드온과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영웅이라는 표현이 사뭇 어색할 정도입니다. 한 아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의 가냘픈 어깨에 모든 정사가 메어져 있다고 합니다. 어떠한 아기이기에 세상 모든 일이 이 아기 없이는 되지 않는지 정말로 궁금합니다.

계속해서 아기의 이름이 소개되어집니다.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곧 하나님이 아기가 되셔서 오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의 많은 영웅을 만드시는 분이 하나님이신데 하나님 당신이 아기가 되셔서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한 아기가 하실 일을 계속 말씀하십니다. 7절 말씀입니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한 아기를 통해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을 이루시는 이는 바로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이 모든 일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조금 빗나가는 것 같지만 저의 이야기를 하나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에게는 제 이야기가 오늘 본문 말씀 이해에 큰 도움이 되었기에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제가 2년전에 저희 교단에 속한 한인 총회 총회장을 역임했었습니다. 그런데 올해 6월에 새로운 부총회장을 선출하는데 제대로 선출하지 못하고 총회가 마쳤습니다. 이 일이 중요한 이유는 부총회장이 내년도 총회장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여튼 그 후 저에게 계속 상황이 나빠진다는 소식이 들려 왔습니다. 저는 증경총회장으로 많은 염려를 하고 있었는데 어떤 지혜가 떠 올랐습니다. 그래서 현재 목회를 하고 계신 증경총회장이 저 말고 3분이 더 있는데 이 세 분과 상의를 하였습니다. 제가 갖고 있는 생각을 나눴습니다.

좀 시간은 걸렸지만 그래도 모두 합의를 보고 증경총회장단 모두 힘을 모으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임원회와도 합의를 하고 마지막으로 총회장이 되고자 했던 당사자들과도 다 합의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일단락을 짓게 되어 현재 임원회에서는 총회 사역을 열심히 그리고 순조롭게 잘 진행하고 있습니다. 지난번 정책 위원회에서 만난 분들이 저에게 감사하다고들 하는 인사를 많이 받았습니다.

이번주 설교 준비를 하다가 그 일들이 다시 떠 올랐고 혼자 자문해 보았습니다. 어떻게 그 많은 분들이 저의 제안을 쉽게 받아 드렸나…? 물론 먼저는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혜를 넘어서 다른 요소가 분명히 있지 않나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실 제가 거의 15년전쯤에 총회장으로 추천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 때가 저희 교회가 위치한 동북대회라고 뉴져지부터 보스톤에 이르는 지역에서 한 사람이 총회장으로 추천되는 회기였습니다. 동북대회에서는 저를 추천하였었습니다.

저는 그 때 한창 교회 일도 바쁘고 아직 목회도 여러모로 미숙한 때였지만 동북대회 동료들이 추천을 하니 제가 사양할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총회 전부터 어느 은퇴하신 목사님께서 총회장이 되고 싶어 하신다는 소문이 자자하더니 총회에 가니 그 분을 지지하는 분들이 총회를 시끄럽게 만들고 있는게 보였습니다. 물론 제가 동북대회에서 정식으로 추천을 받아 올라왔기 때문에 경선을 하면 제가 다 되게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총회 석상에서 총회장을 사양했습니다.

물론 저는 속으로는 잘 되었다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교회 일도 바쁜데 총회일까지 할 뻔 했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그 일로 제가 아주 유명해졌습니다. 미국 전역에 제가 총회장을 사양한 훌륭한 목회자라는 소문이 쫙 퍼졌습니다. 벌써 15년 이상이 지났는데도 지난번 총회에서도 몇몇 분이 저에게 와서 총회장을 사양하는 것을 보고 저를 존경하기 시작했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또 들었었습니다.

 

하여튼 이번 주 설교 준비를 하던 중 이 이야기가 섬광처럼 떠오르면서 깨달음이 왔습니다. 제가 제안한 총회장에 대한 사안이 쉽게 받아드려진 이유가 떠 올랐습니다. 제가 총회장을 스스로 사양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총회장에 대한 사안에 대해 어떤 말을 해도 인정을 받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경선으로 총회장이 되었더라면 제가 이번 문제에 대해서 어떤 제안을 했어도 잘 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제가 포기했었기에 도리어 어떤 권위가 입혀져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남들이 저의 의견에 귀를 더 기울였다고 결론을 내려 보았습니다.

 

저의 이야기로 아기 예수님의 이야기를 설명해 드려서 송구스럽지만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말씀드립니다. 사실 저의 하찮은 이야기를 염두에 두고 오늘 본문 말씀 한 아기의 어깨에 정사가 메어진다는 말씀을 읽으니 아주 쉽게 이해가 되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이 한 아기는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포기하고 육신의 몸을 입은 한 아기가 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되심을 포기하는 순간 하나님의 권위는 더 세워지는 법입니다. 비록 육신의 몸을 입었지만 하나님 되심을 포기하였기에 그래서 육신을 입은 하나님이 되신 것입니다. 곧 사람이자 하나님이 되신 것입니다.

특히 그의 가냘픈 어깨는 하나님 되심을 포기하였기에 도리어 하나님의 어깨가 된 것입니다. 가냘픈 어깨이지만 하나님의 어깨가 되었으니 못 할 일이 어디있겠습니까? 그 어깨에 정사를 멘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세상 정사가 메어지기 전에 이미 하나님의 권위가 입혀져 있는 어깨이기 때문입니다.

어느덧 아기의 이름은 하나님의 온갖 이름이 되었습니다.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하나님 되심을 포기하고 인간이 되셨지만 포기하셨기에 그는 인간의 몸을 입은 하나님이 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무엇이라구요?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 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한 아기는 하나님 되심을 포기하셨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그 무엇도 다 되실수 있습니다. 전쟁의 공포 가운데 사는 자들에게는 영웅의 빛을 발하십니다. 사망의 그늘 가운데 사는 자들에게는 생명의 빛을 발하십니다. 무지한 가운데 사는 자들에게는 모사가 되십니다. 병약한 자들에게는 기묘한 치유자가 되십니다. 무능한 자들에게는 전능자가 되십니다. 두려움 가운데 사는 자들에게는 평강의 왕이 되셔서 평화의 빛을 발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포기하는 과정에서 생긴 신비한 일이 또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이 되셨기에 시간 안으로 들어 오실수 있으셨습니다. 시간도 피조물입니다. 곧 피조물로서 우리가 사는 이 시간 안으로 슬며시 스며 들어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시고…. 이것이 한 아기의 가장 큰 신비입니다. 시간 안에 들어 오셨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아기 예수를 통하여서…. 곧 영존하시는 하나님께서 시간 안으로 들어 오셨습니다. 그래서 시간을 영원과 연결시키셨습니다. 이는 시간 안에서 사는 우리들에게는 말할수 없는 축복입니다.

한 아기가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사는 시간은 영원과 끊어져 있을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 아기로 인해서 우리가 사는 ‘오늘’ 이라는 시간은 영원과 연결이 되게 된 것입니다. 시간 안에서 영원과 만날수 있게 된 것입니다. 아기 예수는 모든 시간을 영원한 빛으로 이끌고 계십니다.

아기 예수는 영존하시는 하나님이시면서 우리처럼 시간 안에 사는 피조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기 예수로 인해서 우리가 사는 매 순간 순간의 시간은 영원한 세계로 언제나 열려 있는 것입니다. 이를 기가 막히게 깨달은 시인이 있습니다. 정현종 시인입니다. 그 분의 시를 소개해드립니다.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정현종

나는 가끔 후회한다
그때 그일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그때 그 사람이
그때 그 물건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더 열심히 파고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 걸…

반벙어리처럼
귀머거리처럼
보내지는 않았는가
우두커니처럼…
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할 것을…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

 

정현종 시인이 다 좋은데 한 가지 저와 생각이 다른 점이 있습니다. 제일 마지막 소절입니다.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

이라고 하셨는데 사실 모든 순간은 하나님의 열심으로 피어날 꽃 봉오리가 아닐까요? 하나님의 열심으로 한 아기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한 아기가 되셔서 시간안으로 슬며시 들어 오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시간을 영원을 향한 꽃 봉오리로 만드셨습니다. 모든 시간을 영원을 향한 꽃봉오리로 생활하는 자들이 진정 기다림의 사람들이고 또한 어둠의 빛을 비추는 사람들입니다.이를 위하여 한 아기가 되셨습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얼마전 어느 모임을 식당에서 하였는데 마지막에 제가 계산을 하게 되었습니다. 카운터에 계신 분이 어떤 모임이냐고 묻길래 크리스챤들의 모임이라고 대답하면서 제가 도리어 크리스챤이냐고 되물었습니다.

크리스챤은 아니고 자기 아들이 태권도를 배워서 한국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다고 저에게 대답하시는 것입니다.

당연히 계산을 하다 보면 팁을 기록해야 하는데 보통 보다 좀 후하게 드렸습니다. 크리스챤들이 후한 것을 보면 좋으면 좋았지 나쁠리는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순간은 영원한 세계로 향하는 꽃 봉오리이기 때문입니다.

 

아기 예수로 인하여 모든 순간은 꽃 봉오리가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작은 열심이 하나님의 위대한 열심과 만나면 바로 영원한 세계가 펼쳐지지 않을까요?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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