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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부활의 증인들 (누가복음 8:1-3, 23:54-24:10) 03/05/2017

중국 춘추 전국 시대에 위나라와 조나라 사이에 전쟁이 벌어진 후 조나라가 이기게 되었습니다. 위나라의 왕자가 조나라로 인질로 끌려 가게 되었습니다. 왕자를 보살피기 위하여 한 신하가 따라가야 했습니다. 왕자의 곁을 지킬 신하는 담력과 식견이 뛰어나고 임기응변에 능하며 무슨 일이든 혼자 처리할 만한 능력이 있어야 했습니다. 아울러 충성심이 깊어 절대 딴 마음을 품지 않을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고민 끝에 모든 조건에 딱 들어맞는 방공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왕은 방공을 불러 마지막으로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해보라고 했습니다. 방공은 뜬금없이 왕에게 물었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대왕께 시장 한 복판에 호랑이가 있다고 아뢴다면 믿으시겠는지요?”
“안 믿네.” 왕은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만약 또 다른 사람이 나타나 호랑이가 있다고 아뢴다면 믿으시겠는지요?” 왕은 잠시 주저하더니 말합니다.
“그러면 혹시나 하는 마음이 생길지도 모르겠군.”
“시장바닥에는 분명히 호랑이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세 사람이 똑같은 소식을 전하면 대왕께서는 호랑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셨습니다.
대왕, 지금 제가 가야 하는 곳은 이곳 시장바닥 보다 훨씬 먼 곳이옵니다. 게다가 왕궁에는 저에 대한 거짓을 고할 자가 세 사람보다 훨씬 많을 것입니다. 다행히 지금은 대왕께서 저를 믿어주시나 제가 멀리 가고 나서 저와 원수 진 사람들이 저의 험담을 늘어 놓는다면 어찌하시겠는지요? 믿으시겠습니까? 이것이 가장 걱정되옵니다.”
“그 점이라면 걱정할 것 없네!” 왕은 웃으며 그를 안심시켰습니다. 후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왕은 훗날 방공이 돌아 왔을 때 그렇게 소중히 여기던 방공을 거들떠 보지도 않았습니다. 방공을 중상모략하는 신하들의 말을 모두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소문의 힘, 아니 말의 힘이 아닐까요?

이런 세상에 우리가 산다고 생각하니 좀 등골이 오싹하지 않습니까? 중상모략이 반복적으로 이어지면 왕의 마음도 흔들리는데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도 비슷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이런 세상 가운데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우리를 뒤에서 욕하는 사람들이 누군지 그 내용이 뭔지 살펴 보면서 거기에 대응하면서 살아가야 하나요?
오늘 본문 말씀의 주인공들의 삶을 살펴 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8:1절에서는 예수님과 12제자들이 나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내용을 보면 주님은 복음을 전하셨고 제자들은 함께 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기만 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도 그냥 보기만 하였을까요? 먼저 2절과 3절 상반절 말씀을 보면,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12제자 이외 또 다른 함께 하는 자들이 나옵니다. 여자들입니다. 그런데 이 여자들의 특징을 소개합니다. 악귀에 붙잡혔다가 해방되었거나 병 고침을 받은 여자들입니다. 물론 여기에 나오는 모든 여인들이 악귀에 붙잡혔거나 병 고침을 받은 여자들인지는 확실치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들 모두의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3절 하반절입니다.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
이 여인들은 자기들의 소유로 예수님과 12 제자들을 섬겼던 것입니다. 이들이 섬긴 사람들은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어쩌면 말을 많이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물론 복된 말을 많이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을 자신들의 소유로 섬긴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은 정말로 소유가 많아서 섬겼을까요? 물론 요안나는 부자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이니 부자였을 것입니다. 반면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에 붙잡힌 경험이 있던 여인입니다. 이런 여인들이 과연 소유가 많이 있었을까요? 아마도 계속 일하면서 적은 소유로 섬기지 않았을까 추측할 수밖에 없습니다. 곧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는 여인들과 손수 일하면서 섬기는 여인들이었을줄 압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자기들이 극진히 섬기던 예수님은 제사장들에게 붙잡혀서 빌라도 앞에 섭니다.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또한 자기들이 극진히 섬기던 12 제자들은 모두 도망 갑니다. 23:55, 56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따라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두었는지를 보고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더라.”
예수와 함께 다니던 이 여인들은 12제자들처럼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예수님 곁에 있었습니다. 섬김을 받던 제자들은 도망을 갔지만 섬김의 주인공들은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토요일이 안식일이니 토요일은 집에서 쉽니다. 24:1절 이하 말씀입니다.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이 여인들이 주님의 부활의 첫 증인들이 됩니다. 이 여인들이 바로 8장에 나오는 그 여인들임을 10절 말씀이 증명합니다.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

인류 역사에 가장 위대한 사건이 있다면 바로 부활의 사건이 아닐까요? 이 위대한 사건을 몸으로 경험한 첫번째 사람들이 바로 섬기는 여인들이었던 것입니다. 아니 주님이 부활을 제일 먼저 소유한 자들이 된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소유한 자들이 되었으니 그들은 더욱 멋진 섬기는 자들이 되어가지 않았을까요?

처음에 위나라의 방공 이야기를 드렸는데 위나라는 역사적으로 BC 400-200년이라고 합니다. 곧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 약 300년전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 중국에 벌써 중상모략으로 나라가 늘 시끄러웠던 것입니다. 그 후 300년 후 예수님께서 오셨는데 그 때 나아져 봤자 얼마나 나아졌겠습니까? 그 때도 말들이 많은 시대에 주님께서 오셨습니다.
잘 아시는대로 예수님도 당신을 향한 중상모략으로 늘 시달리셨습니다.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문이 나서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 자매들이 예수님을 찾아 나선 말씀 지난 달 임직 예배에서 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과 12 제자들을 따라 다니는 이 여인들에게 대해서도 중상모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 여인들의 고향에서 이 들을 향한 중상모략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을 것입니다. 새로운 버전으로 기가 막힌 이야기들이 만들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들은 중상모략도 아랑곳 하지 않고 주님과 12 제자들을 섬겼습니다. 어떤 여인들은 손수 일해 가면서, 어떤 여인들은 자기의 주머니를 털어서…. 그렇지만 이 여인들은 자기들을 향한 중상모략이 그토록 시끄럽게 들려와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정성껏 주님과 제자들을 삶으로 섬겼습니다. 물질로 섬겼습니다. 행동으로 섬겼습니다. 말로 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여인들에게 주님께서는 가장 큰 선물을 주셨습니다. 이들로 하여금 위대한 부활의 첫 증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가는 위대한 인류 역사의 주인공은 섬기는 자들이라는 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오고 가는 세대를 이끌 역사의 주인공들은 수많은 중상모략 가운데서도 꿋꿋이 섬김의 길을 가는 자들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말이 많은 세대에서 참으로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자들은 들려오는 말에 개의치 않고 꿋꿋이 삶으로 섬기는 자들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부활의 능력을 덧입고 더욱 멋지게 섬기는 삶을 살게 하신 것입니다.

꿋꿋이 삶으로 섬기는 자들의 모습을 저는 박두순 시인의 시 ‘사람 우산’에서 찾아 볼수 있었습니다.

사람 우산

집에 오는 길
소낙비가
와르르 쏟아졌다

형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때 형이
우산이었다

들에서 일하는데
소낙비가
두두두 쏟아졌다

할머니가 나를
얼른 감싸안았다

그때 할머니가
우산이었다

따뜻한 사람 우산이었다.

얼마전 접하였었는데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시였습니다. 주님은 여인들을 위한 우산이었습니다. 귀신들린 여인들 병마로 고생하는 여인들 아픈 것만으로도 서글픈데 많은 사람들이 이들을 향해 이런 말 저런 말들을 쏟아 붓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들을 위해서 주님은 우산이 되셨습니다. 그들의 병을 낫게 하심으로 자기들도 사랑의 대상임을 보여주셨습니다.
한편 병에서 나은 이들은 또 주님을 위한 우산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물질적 필요를 공급하였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우산이 되었던 여인들에게 제일 먼저 자신을 보여주시길 원하셨습니다. 당신이 부활의 주님임을 보여주시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당신의 우산이 되었던 자들에게 더 이상 우산이 필요 없는 부활의 세계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지난주일 오후에는 새교우반 환영 모임이 어느 교우님댁에서 열렸었습니다. 그 교우댁이 그날에 우산이 되었습니다. 그 교우님댁의 우산 아래서 모두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새로 오신 한 교우님께서 보스톤에 오신지 몇 달이 지나서 이제야 교회를 찾으셨다고 말씀하시면서 그 이유를 말씀하시는데 참 가슴이 아팠습니다.
보스톤에 오시기 전에 큰 도시 두 곳에서 사셨는데 그 곳에서 다니던 두 교회가 모두 다투는 아픔을 치뤘다고 새로이 교회에 나오기가 쉽지 않았다고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번 말씀 준비를 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산을 펴면 비를 함께 피하게 됩니다. 아름다운 공간 속에 함께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산을 접으면 어떻게 됩니까? 무기가 되는 것이 아닙니까? 끝이 빼죽하니….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산을 주신 것 같습니다. 우산을 펴서 함께 사랑의 공간을 창조하느냐, 아니면 우산을 접어서 무기로 사용하느냐? 이는 우리 몫인 것 같습니다. 우산을 펴십시다.

오늘 사순절 첫째 주일 예배로 드립니다. 주님께서 먼저 우리의 우산이 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의 우산으로 인해 우리들의 죄가 사함을 받았습니다. 우리들의 죄의 삯을 막아 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주님을 위한 우산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서로를 위해 우산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함께 위대한 역사의 주인공들이 되어 가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영광을 누리는 자들이 되어 가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오늘 여선교회 헌신예배로 드립니다. 우리 교회 여선교회는 정말로 우리 교회의 우산입니다. 접은 우산이 아니라 편 우산입니다. 우리는 늘 여선교회의 우산 아래 사랑을 꽃피워 가고 있습니다. 제가 더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잘 알고 계실줄 압니다.
그런데 우리 교우님들만 이 우산이 창조한 사랑을 나누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매년 보스톤 노회가 5월마다 저희 교회에서 열립니다. 노회원들은 저희 교회에 오길 좋아 합니다. 여선교회 회원들의 펴진 우산 때문에….
아울러 가을에는 이지역 교회 협의회 부흥회 때 매번 우산을 펴주시고 계십니다. 교회 안팎으로 여러분은 멋진 우산입니다.
주님은 우산의 주인공들이신 여러분을 부활의 증인으로 삼으십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한 남편이 Alzheimer에 걸려 고생하는 아내를 여느 때처럼 병실로 찾아 갔습니다. 그러나 그 날은 좀 늦게 찾아 가게 되었습니다. 항상 같은 시간에 찾아 가서 아내의 손을 잡고 기도를 드리곤 했던 남편입니다. 그 날은 좀 늦어서 간호사에게 좀 늦었다고 죄송하다고 말을 했습니다. 간호사가 하는 말이, “당신의 아내는 개의치 않을거예요. 당신이 누군지 모르니까요.” 이에 남편이 멈추어 서더니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여인을 압니다. 저의 아내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언젠가 누가 누군지 모를 정도로 약해 질지도 모릅니다. 언젠가 우리가 주님을 그리고 교회를 이웃을 섬긴 기억도 다 잊어 버리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기억하십니다. 주님은 우리들의 영원한 우산입니다.
그러니 우산을 펼수 있을 때 힘껏 펴십시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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