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의 사람 이삭”
한 대학 병원의 암 전문의가 극심한 우울증에 걸렸습니다. 날마다 고통받는 환자들을 만나야 하고 그들의 모습을 지켜 보는 것이 괴로왔습니다. 많은 생명을 살리고 수명을 연장해 준 의사였지만 정작 그 자신은 아침에 일어나기도 싫어하는 항우울제 복용 환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의사직을 그만 두고 새로운 삶을 살기로 마음 먹습니다.
뛰어난 수술의가 병원을 떠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상담 의사가 그에게 매일 관찰 일기를 써 볼 것을 권했습니다. 그것은 간단했습니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면 잠들기 전에 스스로에게 다음의 세 가지 질문을 던지고 노트에 적는 일이었습니다.
오늘 놀라운 일은 무엇이었는가?
오늘 감동 받거나 인상 깊은 일은 무엇이었는가?
오늘 나에게 영감을 준 일은 무엇이었는가?
처음 며칠 동안은 이 질문들에 대한 대답이 언제나 ‘없다’였습니다. 그런 일기를 쓰는 것 자체가 귀찮고 무의미했습니다. 그래서 상담의는 그에게 “지금까지 삶을 보던 방식을 버리고 자신이 시인이라고 가정하고 사람들과 세상을 보라”고 조언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바쁘게만 흘려보내던 일상을 새로운 눈으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암세포가 하루에 몇 밀리 미터씩 자라거나 줄어드는 것을 보고 놀라워할 줄 알게 되었고, 항암 치료 중인 엄마가 두 아이를 무한한 사랑으로 키우는 것을 보고 감동 받았습니다. 의사라는 직업의 일상 속에서 무심코 지나쳐 왔던, 결코 포기하지 않고 불치병과 싸우는 사람들에게서 많은 영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서서히 우울증에서 회복되었습니다. 이제 그는 환자들에게 “병을 버티는 힘을 어디서 얻느냐?”고 의사 답지 않은 질문을 던지게 되었습니다. 환자를 대하는 태도와 말투가 바뀌고 치료에 대해서 만이 아니라 다른 인생 이야기도 나누게 되었으며 진정으로 환자들과 가까워졌습니다. 삶의 다른 면 들을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몇 주 후 상담의를 만난 그는 환자가 선물한 멋진 청진기를 꺼내 보이며 말합니다.
“나는 이제 이 청진기로 사람들의 영혼의 박동을 들으려 합니다. 단순한 심장 박동이 아니라 영혼의 울림을….”
류시화 시인의 글 ‘오늘 감동한 일이 있었는가’라는 글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류 시인은 북 인도 어느 명상 센터에 있을 때 한 인도 수행자를 만났었는데 그 수행자가 ‘시인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고 해서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아마 수행자의 말을 듣고 이런 의사 이야기를 만들어 내지 않았나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시인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서 사시기 원하시지 않습니까? 하루를 살아도 매일 저녁을 그 날 있었던 놀라운 일 감동 받은 일 영감 받은 일로 마친다면 바로 최고의 축복된 삶이 아닐까요?
오늘 본문 말씀에는 세상을 시인의 눈으로 보는 한 사람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는 기다림의 조상 아브라함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는데 오늘 본문 말씀의 주인공은 그의 아들 이삭입니다.
사실 ‘이삭’하면 제일 많이 생각나는 장면은 바로 아브라함 손에 묶여서 제물이 되는 장면일줄 압니다. 막 칼을 들고 내리치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이삭 대신의 여호와 이레로 양을 준비시켜 주신 이야기가 있습니다.
또 다른 말씀은 저희 교회 오래 다니신 분들은 귀가 따겁도록 들으셨을 줄 압니다. 그랄 골짜기에서 블레셋 사람들에게 우물을 두 번 빼았기고 세번째는 빼앗기지 않았을 때 ‘르호봇’ ‘넓다’ 노래를 부릅니다. 이 우물을 생각하면서 저희 교회 courtyard에 있는 연못을 르호봇의 우물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삭은 ‘르호봇’이라고 멋진 노래를 부르는 시인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저는 오늘 본문 말씀에서 찾아 볼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삭의 아내를 맞이하는 장면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는 이삭의 삶의 한 단면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묵상의 사람 이삭의 모습입니다.
먼저 오늘 본문 말씀의 배경을 말씀드리면,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장가들게 하려고 자기의 늙은 종을 멀리 고향으로 보냈었습니다. 오랜 시간 후 아브라함의 소원이 이루어져서 리브가라는 처녀를 온 마을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늙은 종이 데리고 오게 됩니다. 창세기 24:61절 말씀입니다.
“리브가가 일어나 여자 종들과 함께 낙타를 타고 그 사람을 따라가니 그 종이 리브가를 데리고 가니라.”
리브가는 늙은 종의 에스코트를 받아 이삭이 사는 곳 가나안 땅으로 향합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종을 보낸 후 얼마만에 리브가가 가나안 땅에 도착하였을까요? 사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서도 제일 남쪽 헤브론에서 살았습니다.
반면 그의 고향은 갈대아 우르 곧 현재 이라크 지역입니다. 바그다드가 있는 곳이라고 가정해 봅니다. 헤브론과 바그다드를 비행기로 간다면 557마일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직선 거리입니다. 당연히 직선 거리로 리브가가 왔을리가 없습니다. 참고로 Raleigh NC가 보스톤에서 610 마일입니다.
보스톤에서 Raleigh까지 아들을 장가 들게 하기 위해서 늙은 종을 보낸 셈입니다. 이에 리브가는 순종하고 보스톤으로 향하게 된 것입니다. 대충 계산해 보니 편도에 20일은 걸릴 것 같습니다. 왕복에는 40일이 걸립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시고 63절 말씀을 보면,
“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 눈을 들어 보매 낙타들이 오는지라.”
오늘 설교 제목을 ‘묵상의 사람 이삭’으로 정했는데, 그 이유는 저는 이삭이 늙은 종이 자기의 아내를 구하기 위해 고향으로 떠나자 마자 매일 묵상을 했을 거라고 가정하고 싶습니다. 당연히 그랬을 것입니다. 이유는 아무리 여러 명과 함께 떠난다고 해도 왕복 40일간의 긴 여정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그러니 40일 가까이 되어서 들에 나간 것뿐이지 그 전에는 집에서 늘 묵상을 했을 줄 압니다. 물론 이 묵상 안에는 마음의 소원도 아뢰는 기도도 드렸을 줄 압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창세기 기자는 묵상이라고 기술한 것을 보아서 단순한 기도를 넘어서 깊은 묵상의 시간을 가진 것이라고 생각하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곧 안전을 위해 기도를 당연히 드렸고 아울러 미래의 아내와의 삶을 상상하는 묵상의 시간을 가진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삭은 묵상의 사람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는 이유는 단순히 리브가를 맞이하는 이 장면 때문만이 아닙니다. 더 큰 이유가 있습니다. 말씀 드린대로 ‘이삭’하면 생각나는 것은 제단 위에 제물로 잠시 올라갔던 장면하고 ‘르호봇’ 이야기가 있습니다. 새 교우님들은 ‘르호봇’에 대해 생소한 분들이 계실 것 같으니 다시 간단히 소개해 드립니다.
이삭이 살던 곳에는 블레셋 사람들이 사는 땅이었는데 이삭이 자꾸 부자가 되니 블레셋 사람들이 쫓아 냅니다. 그래서 어쩔수 없이 그랄 골짜기에 가서 삽니다.
가자마자 물이 필요하는 우물을 팠습니다. 그 판 우물을 블레셋 사람들이 빼았습니다. 두번째 우물을 팝니다. 또 빼았깁니다. 세번째 우물을 팝니다. 이땐 웬일인지 블레셋 사람들이 가만히 있습니다. 이 때 이삭은 노래를 부릅니다. 골짜기에서. ‘르호봇’, ‘넓다.’ 세 번째 우물 이름이 되었습니다.
아무나 이런 노래를 부를수 있었을까요? 묵상의 사람이 아니면 작은 골짜기를 르호봇 골짜기로 부를수 있을까요?
그는 좁은 골짜기에서도 묵상의 삶을 살았기에 시인의 마음을 소유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좁은 골짜기에서도….
곧 그는 결혼하기 전부터 묵상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리브가를 맞이 할 때도 묵상의 모습으로 맞이 한 것입니다. 그후 리브가와 살다가 그랄 골짜기까지 쫓겨 갔지만 그곳에서 ‘르호봇’ 노래를 부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디를 가나 그의 삶에는 시인의 마음이 꽃을 피운 것입니다.
“오늘 놀라운 일은 무엇이었는가?
오늘 감동 받거나 인상 깊은 일은 무엇이었는가?
오늘 나에게 영감을 준 일은 무엇이었는가?”
그러면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이 떠오릅니다. 이삭은 어떤 묵상을 하였기에 이런 위대한 시인이 되었는가? 좁은 골짜기를 ‘넓은 골짜기’라고 노래 부르는….
지난주에 미국 제 41대 대통령 George Bush 대통령이 서거하셨는데, TV앵커가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아들 43대 George Bush 대통령이 자신의 책에 다음과 같이 짧게 자기를 소개하였다고 합니다.
“I am the first son of the President George Bush.”
한 줄로 자신에 대한 많은 것을 말하고 있었다고 설명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삭도 매일 이렇게 묵상을 시작하지 않았을까요?
“나는 믿음의 조상이자 만민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유일한 아들이다.” 자연히, 100살에 자기를 낳은 아버지의 모습을 묵상하지 않았을까요?
그 아버지의 모습은 한 마디로 0% 확률(probability)에 도전한 모습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100세에 아들을 낳다니…. 그리고 자신이 바로 0%확률을 뚫고 태어난 자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삭도 0%의 확률의 세계 가운데 승리자가 될 것을 묵상 중에 늘 결단 내리지 않았을까요?
사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위해서 늙은 종을 멀리 보낸 것입니다. 왕복 40일이 걸릴거라고 제가 말씀드렸는데 그것은 젊은이들의 기준입니다. 40일이 훨씬 더 걸리는 먼 거리를 늙은 종을 보낸 것입니다.
그러니 살아서 돌아 올 확률도 그리 높지 않습니다. 그뿐입니까? 그것도 색시와 함께 돌아올 확률은 훨씬 적습니다. 그러나 묵상의 사람 이삭에게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0%의 확률을 이기고 자기를 낳게 하셨으니 아버지를 철저히 신뢰했을 것입니다. 의심이 들 때마다 묵상으로 이겨 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한 약속이 자기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함을 묵상 가운데 확인합니다. 자기는 아이를 낳을 수 밖에 없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러니 늙은 종은 긴 여행 끝에 한 처녀를 데리고 올 것을 늘 묵상 중에 새롭게 했을 것입니다. 돌아올 확률이 어떻게 되던….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한편 아내가 올 것을 확신한다면 아내와 함께 살 준비도 해야죠. 그러니 아내를 맞을 준비를 묵상 가운데 했을 것입니다. 아내와의 결혼 생활을 통해서도 무수히 0%의 확률을 뚫는 승리의 시간들이 연속으로 일어 날 것을 묵상 했을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 날은 그랄 골짜기에서 파는 우물마다 빼았깁니다. 계속 빼았길 것 같습니다. 그러나 0%의 확률에 도전하는 자이기에 계속 팠습니다. 드디어 좁은 골짜기에서 ‘르호봇’ 노래를 부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인생의 골짜기에서는 놀라운 일을 찾을 수 있는 확률이 극히 적습니다. 감동 받거나 인상 깊은 일을 찾아 보기가 어렵습니다. 영감 받는 것을 기대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0%의 확률에 도전하는 자들에게는 좁은 인생의 골짜기 안에서 놀라운 일을 무수히 찾는 자들이 되지 않을까요? 시인이 되어 가지 않을까요?
오늘 대강절 두번째 주일 예배로 드립니다. 두번째 촛불이 켜졌고 다음주에는 세번째 촛불이 그리고 네번째 촛불이 켜짐과 함께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게 됩니다.
사실 아기 예수의 탄생은 그야말로 확률이 0%인 사건입니다. 어떻게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한 주 한 주 그 놀라운 사건을 사모하면서 촛불을 켜 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0%의 확률을 믿고 기다리는 자들입니다. 아브라함처럼 이삭처럼…. 0%의 확률을 믿고 기다리는 자는 모두가 시인이 될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삶의 골짜기에 거하던 이삭의 노래를 부르게 됩니다.
“르호봇.”
교우 여러분,
우리들에게 르호봇의 축복과 시인의 눈을 갖게 하는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 아기 예수가 2000년전에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우리들의 죄로 인하여 세상 곳곳에 낮고 춥고 험한 골짜기가 생겼습니다. 바로 그 가장 낮은 곳에 가장 추운 곳에 가장 좁은 곳에 주님은 오셨습니다. 말구유에 오셨습니다. 낮고 춥고 좁은 곳에서 아기 예수는 노래를 부르셨습니다.
“르호봇.”
남은 대강절 기간 아기 예수의 노래 소리를 들으면서 함께 시인이 되어 가십니다.
“오늘 놀라운 일은 무엇이었는가?
오늘 감동 받거나 인상 깊은 일은 무엇이었는가?
오늘 나에게 영감을 준 일은 무엇이었는가?”
교우 여러분,
이번 대강절에 아기 예수가 오시는 마굿간은 어디일까요? 우리가 있는 곳이 아닐까요?
말씀을 거둡니다.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어느 군인이 해외에서 근무하다가 귀국했습니다. 그런데 약혼녀가 임신을 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기의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약혼녀는 용서를 빌고 이 아이의 아버지가 될 것을 간청했습니다.
군인은 자기 가족들의 뜻을 어기고 약혼녀를 용서합니다. 친자식이 아닌 아이를 자기의 자녀로 받아 드립니다.
이 아이는 어느 두 사람의 죄로 인하여 생긴 골짜기에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이 군인은 태어나는 아이에게 ‘르호봇’을 불러 준 것입니다.
말구유에서 들려 오는 아기 예수의 노래 ‘르호봇’을 들었기에 이런 위대한 결단을 내리지 않았을까요?
교우 여러분,
묵상 중에 아기 예수를 기다리면 함께 ‘르호봇’의 노래를 낮고 춥고 좁은 곳까지 들리도록 부르십시다.
0%의 확률을 뚫고 아기 예수가 찾아 오십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 눈을 들어 보매 낙타들이 오는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