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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인” 디모데후서 1:9-18 (08/13/2023)

유진 피터슨 목사님이 한번은 펜타곤에 초청을 받아 방문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군목들을 만나기 위해서 였습니다. 쏘련과의 냉전도 마치고 군사적으로는 평안한 때가 되었습니다. 그것까진 좋은데 전쟁이 없으니 더 이상 많은 군목들이 필요해지지 않은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국방부에서는 군목들을 줄이는 쪽으로 예산 편성이 진행이 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에 유진 피터슨 목사님을 초대해서 조언을 듣기를 원한 것입니다.실은 조언이라기 보다는 상관들에게 평화시에도 군목이 왜 필요한지 설득해 달라는 요지였습니다. 예를 들어 마약 카운슬링, 결혼 카운슬링 등 중요한 일들이 많은 것을 알려 달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군목들은 전쟁시 자기들을 얼마나 필요로 했었는지를 말합니다. 총알이 날라오고 폭탄이 터질 때는 모두 군목이 함께 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반면 평화로울 때는 전쟁이 없는 것은 좋은데 아무도 군목을 찾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느 군목이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치면서 말합니다.

“What we need is a war!”(우리에겐 전쟁이 필요합니다.)

3주후 걸프 전이 터졌습니다. 모든 군목들의 job은 다시 안전해졌다고 합니다.

오늘 광복기념주일 예배로 드립니다. 광복기념주일이지만 계속해서 디모데후서 강해설교를 이어 갑니다. 물론 출애굽 이야기 등 광복과 연관된 주제가 나오는 여러 말씀이 있지만 저는 오늘 본문 말씀도 광복의 주제와 깊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해서 지난주에 이어서 계속 강해 설교를 이어갑니다.

오늘 2장 말씀을 나누는데 먼저 1장에 나오는 두 가지 큰 주제를 다시 살펴보면 ‘은혜와 고난’입니다. 은혜와 고난이라는 두 단어가 자주 나옵니다. 이것이 디모데후서 특히 1장을 통해서 주시는 강한 멧세지입니다. 반복이 중요하니 1장에 나오는 가장 중요한 두 절을 다시 봉독해 드립니다. 우선 8절,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고난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9절,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곧 사도바울은 우리가 받은 소명은 은혜이니 고난을 받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디모데후서의 중심 주제라고 생각할수 있습니다.

그러면 2장은 어떻게 시작하나요? 1절,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
사도바울은 믿음의 아버지의 권위를 가지고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강력하게 명령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표현을 합니다.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
‘은혜 가운데 기쁘고’가 더 맞을 것 같은데 ‘은혜 가운데 강하고’라고 표현합니다. 곧 2장에서도 1장의 주제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은혜는 고난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히틀러에게 저항했던 본 회퍼가 만든 유명한 표현이 있습니다.
‘cheap grace.’ 곧 ‘값싼 은혜’.
본 회퍼는 값싼 은혜는 없다는 것입니다. 값싼 은혜는 가짜 은혜라는 것입니다. 본회퍼는 사도바울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습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디모데후서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은혜받은 자들은 값을 치룬다는 것입니다. 곧 은혜 가운데 강하라는 것은 값을 치룰 때는 치루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본 회퍼 처럼 순교하라는 뜻으로 말씀하고 있을까요? 2절,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한 마디로 여기서는 순교와는 거리가 멉니다. 양육자가 되기 위해서 은혜 가운데 강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전도자가 되기 위하여 은혜 가운데 강하라고 권고하는 것은 있음직 한데 양육자가 되기 위해서 은혜 가운데 강하라고 하니 좀 의아해 집니다.
물론 4장에 보면 전도자가 될 것을 명령합니다. 후에 4장을 살펴 보게 될줄 압니다. 그런데 2장에서는 전도가 주제가 아닙니다. 여기서는 양육입니다. 양육의 방법은 충성된 사람들에게 가르치면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은혜 가운데 강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3절 말씀을 보면 더 확실해집니다.“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교인들을 양육하는 일에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가 되어서 함께 고난을 받자는 것입니다.

사실 사도바울은 지금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히는 고난을 받는 것은 당연한데 사도바울은 목양하는 디모데에게도 감옥에 갇힌 자기와 같은 고난을 받으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왜 처음에 생뚱맞게 펜타곤에 찾아 간 유진 피터슨 목사님 이야기로 시작했는지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님이 목회를 하시면서 신학교 강의도 하셨습니다. 목회자이자 교수이기에 목회를 얼마큼 하고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신학교에서 목회에 관한 과목을 가르치라고 하면 목회서신을 강의하겠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목회서신은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를 말합니다.

그런데 아무도 목회에 관한 과목을 가르쳐 달라는 요구가 들어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늘 요청 들어 온 것은 구약 모세오경 아니면 시편, 아니면 복음서, 바울 서신 중에서는 갈라디아서와 같은 신학적인 내용이 담긴 성경과목만은 부탁 받았다고 합니다.

물론 다행히 어느 신학교에서 후에 요청을 받아 목회서신 강의를 하게 되었는데 그 강의를 묶어서 ‘unnecessary pastor’(불필요한 목회자)라는 제목으로 책을 펴 냈습니다.
사실 저는 온라인으로 책을 구입했는데 책 제목이 너무 shocking해서 구입을 해 보았습니다. 내용은 말씀드린대로 참 목회자 상은 더 이상 교회가 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좋은 병사가 되어 함께 고난을 받자’ 말하는 목회자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도리어 ‘cheap grace’를 함께 나누길 원하는 목회자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개념으로 책을 펴내었는데 서두에 펜타곤 이야기를 통해서 군목을 원하지 않듯이 세상은 참 목회자를 원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사도바울 당시도 그랬습니다. 지난주 잠깐 읽어만 드려서 기억이 잘 안 나시겠지만 1:15절,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는 부겔로와 허모게네도 있느니라.”
이들이 왜 사도바울을 떠났겠습니까? 십중팔구는 값싼 은혜를 원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결국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겔로와 허모게네에게 불필요한 목회자가 될지라도 결코 ‘값싼 은혜’를 팔지 말아라. 도리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가 되어 나와 함께 고난을 받자”

이어서 좋은 병사의 모습을 세 부류의 직업을 가지고 세 가지를 소개합니다. 시간상 하나씩 자세히 나누지는 못합니다. 먼저 병사는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는 자임을 말씀합니다. 값싼 은혜를 찾는 교인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지도자가 참 지도자임을 밝힙니다.

두번째로는 운동선수가 법대로 해야지 승리자가 되듯이 법대로 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요즘은 운동 경기에도 비디오 replay를 사용을 많이 해서 법을 어기기가 어려워진 것은 사실입니다. 비디오 replay가 나오기 전에는 많은 선수들이 심판의 눈을 속여가며 경기를 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런데 신앙 생활은 아담과 이브부터 비디오 촬영은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촬영기는 그 때부터 지금까지 모든 사람을 찍고 있습니다. 값싼 은혜가 통하지 않습니다. 은혜와 고난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입니다.

한편 농부에게 곡식이 먼저 배당되는 것처럼 은혜로운 신앙생활을 할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먼저 필요한 것을 거져 주십니다. 아무 것도 안 주시고 우리들에게 고난을 받으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도리어 주어진 작은 씨앗을 통해 큰 꿈을 꿀 것을 은연중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곧 사도바울은 군인과 운동선수와 농부의 삶을 본받는 신앙의 지도자가 될 것을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서 사도바울은 말씀합니다. 7절,
“내가 말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
군인의 충성심과 운동선수의 순종 그리고 농부들의 소망을 품을 때 하나님께서 사자의 총명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을 세상은 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불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사도바울처럼 함께 고난을 받자 외치는 지도자들은 불필요한 지도자들입니다. 그러니 이런 세상에서 참 지도자가 되려면 고난은 함께 갈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한편 여기서 사도바울의 놀라운 지혜를 엿볼수 있습니다. 군인과 운동선수와 농부는 모두 고난의 달인들인줄 압니다.

요즘 한 달에 한번씩 고등학교 친구들과 줌 미팅을 합니다. 제 친구들의 직업을 생각해 보았는데 줌 미팅에 들어오는 친구들 중에 한 사람도 군인이나 운동선수나 농부가 된 친구들은 없습니다. 왜…? 가급적 고난과 먼 직업을 택하려 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미국이나 한국이나 의사가 되는 것이 가장 큰 인기 직업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즘 보면 의사 중에도 더 인기 전문과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왜 인기 과목이 생겨 났을까요? 덜 힘들고 수입이 좋은 전문의가 되려는 것입니다.

한편 사도바울은 정반대의 길을 가신 분을 소개합니다. 8절,
“내가 전한 복음대로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사도바울은 눈 앞에 자주 띄이는 군인과 운동선수와 농부의 모습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한계를 느낀 것 같습니다. 결국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고 명령합니다.
세상이 자기를 불필요한 목회자라고 여길 때마다 먼저 고난의 길을 가신 주님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먼저 불필요한 사람으로 사셨음을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리셨음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고 하고는 또 한 사람을 소개합니다. 9, 10절,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그러므로 내가 택함 받은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게 하려 함이라.”
곧 사도바울은 주님을 기억함과 함께 고난 중에 있는 자신을 기억하게 합니다. 주님도 세상에서는 unnecessary person이셨고 자신도 그러기에 지금 감옥에 갇혀 있다고 하면서 함께 세상에서는 고난을 받자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립니다. 11-13절,
“미쁘다 이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결론적으로 세상 끝날에는 우리가 실은 온 우주가 필요한 사람이었음이 밝혀질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고난은 꼭 필요한 고난이었음이 밝혀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지키시는 미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오늘 광복절 기념 주일인데 왜 광복에 대한 말씀은 안 하시나 의아해 하시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디모데에게 자기를 기억하라고 했던 사도바울이 오늘 광복절 기념예배를 드리는 우리들에게 편지를 쓴다면 누구를 기억하라고 할까요? 물론 첫번째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고 하실줄 압니다. 그리고는… 자신을…? 아마도 사도바울은 고개를 흔들면서 다른 사람들을 기억하라고 할줄 압니다. 우리와 깊은 연관이 있는 사람들을….

저는 확신합니다. 8.15광복이 있기 까지 고난 가운데서 한민족으로서 신앙을 지킨 우리의 선배 신앙의 사자들을 기억할 것을 권하고 있지 않을까요?
우리가 사도바울에 대해서 알아야 얼마나 알 수 있겠습니까? 반면 사도바울처럼 은혜 가운데서 고난을 받으신 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감사한 것은 70주년을 맞이하여 사진전을 열었는데 단지 미국 등 외국 선교사뿐 아니라 같은 한민족으로서 고난을 받으신 많은 믿음의 선배들도 만날수 있어서 너무 좋습니다. 아마 사도바울도 사진전을 통해 우리 민족과 깊은 관계가 있는 신앙의 사자들을 만나라고 하지 않을까요?

잘 아시겠지만 한 가지를 다시 말씀드리면 독립선언문에 싸인하신 분들이 33인인 것은 잘 아실줄 압니다. 그 중 16명이 개신교인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 당시 개신교인들은 전 인구의 1-1.5%밖에 안 되었을 때입니다. 곧 이 상시 개신교인들은 모두 신앙의 사자들이었습니다.

한편 최근 1.5세 어느 학자의 강의를 들었는데 왜 이 당시 독립운동가 중에 개신교가 유독 많은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이 당시 선교사들이 일반적으로 네비어스 선교정책을 사용했는데 소위 ‘3자 원칙’이라고 합니다. 즉 토착인이 토착인에게 전도하도록 하는 ‘자전’(自傳, self-propagation), 토착 교인이 토착 교회 목회자의 생활비와 교회 운영을 책임지도록 하는 ‘자립’(自立, self-supporting), 그리고 토착 교회 문제를 토착 교인들이 처리하도록 하는 ‘자치’(自治, self-governing) 등으로 소개되어진 정책입니다.

개신교인들은 교회를 통해서 이처럼 자립과 자치를 배웠던 것입니다. 이에 민족적 자립과 자치를 위해서 독립운동에 앞장 섰다는 것입니다.
곧 참 자유인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이라고 확신하였던 것입니다. 국가와 민족성을 되찾는 것이 자유인이 누리는 축복임을 확신하였던 것입니다. 이 자유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자유를 위해서 감내한 고난의 분량이 찼을 때 하나님께서 해방의 기쁨을 허락하신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우리가 우리들의 믿음의 선조들의 나라를 사랑하며 고난을 받은 모습을 생각할 때 우리도 참 자유인이 되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가 되어 갈 것입니다. 한민족을 위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놀라운 축복에 동참하십시다.

말씀을 거둡니다.

1919년 3.1절을 기해 ‘대한 독립 만세’ 삼창이 조선 땅을 뒤 덮었습니다. 이 때 일본은 ‘만세’를 부르는 자들을 모두 죽이기로 합니다. 3월8일에 또 ‘대한 독립 만세’가 외쳐졌고 또 다시 일본은 ‘만세’를 외치는 자들을 죽입니다.

그 다음 주일에 교회에서 만세 삼창을 부를수가 없으니 대신 찬송가 ‘만세반석 열리니’를 부릅니다. 첫 절은,
‘만세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 갑니다. 창에 허리 상하여 물과 피를 흘린 것 내게 효험되어서 정결하게 하소서.”
4절 마지막 은,
“만세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

이 찬송을 부르면서 한편으로는 조국에 대한 사랑을 노래하고 또 한편으로는 주님을 더욱 의지하는 고백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들은 자유인이 되어서 뜨겁게 노래를 부른 것입니다. 어떤 고난도 그들에게 주어진 자유를 빼앗을수 없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믿음의 선배들의 노래를 함께 부르면서 주님을 기쁘게 하는 주의 군사들이 되십시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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