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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디모데후서 3:8-17 (09/10/2023)

지난 2017년 10월 28일, 일본의 교토 어느 강변에서는 감동적인 광경이 연출되고 있었습니다. 바로 윤동주(1917-1945) 시인의 시비 제막식이 열렸습니다.

교토는 윤동주 시인이 유학생활을 했던 동지사대학이 있는 곳입니다. 원래 윤동주 시인의 시비는 대학 교내에 세워졌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17년도에는 강변에 새로운 것이 세워진 것입니다. 실은 시인은 유학시절 이 강변에 나와 ‘아리랑’을 부르곤 했던 곳이라고 합니다. 물론 시비는 쉽게 세워지지는 않았습니다. 무려 12년이란 시간을 공들인 끝에 세워졌다고 합니다.

그럼 어느 시가 새겨져 있을까요? 그 날 다음의 시가 낭송되었다고 합니다.

 

<새로운 길>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자세한 내용은 나중에 다시 살펴 보기로 하고 오늘 진급 주일을 맞이하여 이 시를 먼저 소개해 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언젠가 저희 교회 자녀들이 지은 시가 찰스 강변에 비석으로 새겨지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물론 꼭 시비가 아닐지라도 찰스 강변이 자랑하는 인물들이 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오늘도 디모데후서 강해를 계속합니다. 믿음의 아버지 사도바울이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쓴 편지입니다. 현재 사도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디모데는 사도바울이 개척한 에베소 교회를 목회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자기는 감옥에 갇혀서 어려운 시간을 보내지만 목회를 하는 디모데도 자기 못지 않게 어려운 상황에 있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가 목회하는 현장과 역사적 상황을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3:1절,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이 한 절을 통해서 사도바울은 많은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곧 고통의 때는 이미 시작되었고 또한 계속 될 것을 은연중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2-7절까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뿐 아니라 또한 앞으로 되어질 일들을 나열합니다. 2절과 7절만 봉독해 드리면,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특히 7절 말씀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항상 배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끝내 진리의 지식에는 이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열심히 나오고 성경공부도 열심히 하지만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안타까운 현실을 직시하면서 오늘 본문 말씀이 시작됩니다. 8절,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그들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 받은 자들이라.”

사실 얀네와 얌브레는 구약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 이 당시 출애굽기 주석책에 나옵니다. 아론의 지팡이를 바로 앞에 던져서 뱀이 되게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때 애굽의 마술사도 자기들의 지팡이를 던져 뱀이 되게 합니다. 그런데 아론의 지팡이 뱀이 마술사들의 뱀을 삼킵니다. 이 장면을 이 당시 구약 신학자가 주석을 하면서 얀네와 얌브레의 이름을 넣은 것입니다.

당연히 디모데도 이 주석책을 읽었을 것이고 그래서 이 이야기를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마술사들의 뱀의 운명을 생각하면서 사도바울은 계속 말씀합니다. 9절,

“그러나 그들이 더 나아가지 못할 것은 저 두 사람이 된 것과 같이 그들의 어리석음이 드러날 것임이라.”

곧 이 당시 배우는 자는 많았지만 그 중 두 마술사처럼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 못하는 자들이 많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한편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 못 한 자들의 마지막은 소름이 끼칩니다. 진리를 대적하는 자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공산주의 창시자 칼 마르크스이죠. 유복한 루터교 가정에서 교회를 다니며 자랐지만 끝내 진리를 대적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사실 진리를 대적하는 자들은 교회를 전혀 모르는 자들이 아닙니다. 너무도 잘 아는 자들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지금 사도바울은 엄청난 일을 디모데에게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통해서 도리어 진리를 대적하는 자들이 되어 가고 있는 이 때 어떻게 해서라도 잘 양육을 해서 디모데와 같은 곧 윤동주와 같은 인물이 에베소 교회에서 태어나게 하라고 주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들에게 주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어떻게 해야 우리 자녀들이 마술사처럼 되지 않고 훌륭한 인물로 잘 양육될수 있을까요? 10, 11절 말씀입니다.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박해를 받음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박해를 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

디모데는 이 편지를 읽을 때 주마등처럼 어떤 장면이 눈 앞에서 지나갑니다. 디모데가 어릴 때 보았던 아니 정확히는 청소년 시절 보았던 사도 바울의 모습니다.

이 장면은 사도바울이 1차 선교여행 때 겪었던 사건들입니다. 요즘 토요아침 기도회에서는 사도행전 말씀을 나누는데 바로 지난 두 주 전 토요 아침에 이 장면을 나눴습니다.

사도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유대인들이 와서 돌로 칩니다. 다 죽은 줄 알고 도시 밖으로 끌어 냅니다. 다행히 회복이 되고 파송을 받은 안디옥으로 돌아 옵니다.

바로 이 장면을 디모데가 목격한 것입니다. 죽음의 벼랑에서 건져냄을 받은 사도바울을 목격한 것입니다. 아마도 이것을 본 디모데는 사도 바울을 평생 믿음의 아버지로 모시게 되었을줄 압니다. 사도 바울의 이 모습을 보았기에 디모데가 디모데가 된 것이 아닐까요?

 

지난주에 한국에서 친구 목사 가정이 방문왔습니다. 몇 가정이 모여서 대화를 나누다가 한국 교회의 여러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온 친구 목사가 하는 말은,

“눈에 보이는 모델이 없기 때문이지….”

 

몇 번 말씀드렸습니다. 윤동주는 어릴 때 명동 교회를 다녔는데 목사님은 외삼촌이신 김약연 목사님이십니다. 이제는 명동교회는 박물관이 되어 있는데 김약연 목사님의 사진이 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져 있습니다.

“나의 행동이 나의 유언이다.”

디모데는 사도 바울의 삶을 기억하면서 윤동주는 외삼촌 김약연 목사님의 삶을 기억하면서 그들의 마음은 옥토가 되어 간줄 압니다. 마음의 옥토를 소유한 디모데에게 사도바울은 계속 권면합니다. 12절,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믿음의 선배들의 모델을 좇아 가면 당연히 박해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는 숨은 의미는 뒤좇아 가는 것 같지만 박해를 피하려고 할 때 어느덧 두 마술사가 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 같지만 실제로 안 믿는 자의 삶이 바로 마술이 아니겠습니까?  배우나 끝내 지식에 이르지 못하는 자들이 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결국 13절,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마술사가 되어서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과 함께 운명 공동체가 된다는 것입니다.

 

반면 이들과 같은 운명공동체가 되지 않으려면 첫째로는 신앙의 모델들의 뒤를 따라가야 합니다. 그러나 이는 쉬운 일은 아닙니다. 뒤따라 가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요? 14절,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모범적인 믿음의 선배들의 삶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믿음의 선배들의 삶도 어느덧 우상이 될수가 있습니다. 다른 중요한 것이 있는데 배움입니다. 사도바울은 1차 선교 여행시 디모데를 만납니다. 그리고 디모데를 가르쳤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이름을 빼고 이렇게 적고 있는 것입니다.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곧 디모데는 사도 바울의 삶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배웠습니다. 윤동주도 명동교회 안에서 신앙의 모델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배웠습니다.

 

사실 판데믹 동안 제가 제일 힘들어 했던 것은 교우님들이 믿음의 선배님들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줌을 통해 배움의 시간은 이어져 갔다고 해도 봄의 시간은 거의 완전히 빼았겼었습니다.

바쁜 가운데서 수고하시는 분들의 모습을 보는 것이 신앙 생활의 절반은 된다고 봅니다. 지난주일도 예배 후 야유회를 가졌는데 특히 수고하시는 젊은 집사님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큰 기쁨이었습니다. 저희 자녀들도 당연히 보았을 것입니다. 예배당에서 말씀을 배운 후 또한 볼수 있었던 특별한 날이었습니다.

저희 자녀들은 보기도 하고 배우기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또한 말씀합니다. 15절 상반절,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사도 바울이 어려서부터 디모데를 가르쳤을까요? 그럴리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서론에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1: 5절,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삼세대 가정에서 배운 것입니다.

 

디모데가 디모데가 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가정에서 성경을 배웠습니다. 아울러 가정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고난을 받는 부모님의 모습도 보았습니다. 커서는 교회에서 믿음의 선배들의 고난받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시작은 배움입니다. 먼저 가정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디모데가 디모데가 된 가장 큰 이유는 시작에 있습니다. 가정에서 보고 배웠습니다. 그리고 후에 사도바울에게서 보고 배운 것입니다.

 

그러면 왜 사도 바울은 성경을 꼭 배워야 한다고 강조할까요? 15-17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오늘 진급주일 예배로 드립니다. 우리 자녀들이 학교에서도 한 학년 진급되었고 교회에서도 한 학년 진급되었습니다. 언젠가 중고등부도 졸업할 날이 올 것입니다.

그 날이 오기 전에 자녀들의 마음을 옥토가 되게 하십시다. 우리가 말씀대로 사는 모습을 볼 때 우리 자녀들은 옥토가 되어 갑니다. 아울러 옥토가 된 자녀들로 하여금 말씀을 배우게 하십시다. 우선 가정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우리 자녀들은 매일 새로운 길 위에 서 있게 될 것입니다. 신앙의 모델을 바라보며 말씀 따라 행할 때 주님께서 예비해 두신 바로 그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학교를 다니던 후에 사회 생활을 하던 주님과 함께 새로운 길을 걸어 가게 될 것입니다.

걸어가는 길마다 차돌이 변하여 샘물이 되는 새로운 길의 주인공들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함께 걷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에도 수고하고 계시는 모든 교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러한 교사들을 세우신 하나님께 영광 돌립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여기서 윤동주의 시를 다시 한번 살펴 볼까요?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이 시는 윤동주 시인이 연희전문학교를 입학한 후 5월에 지은 시라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매일 등교길을 오고 가다가 지은 시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눈에 띄는 것은 첫째 연과 마지막 연 곧 다섯번째 연은 같습니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숲과 마을은 가고자 하는 희망의 곳이고 내와 고개는 희망의 곳으로 가는 동안 거쳐야 하는 장애물들입니다. 곧 매일 매일 어떤 장애물이 있어도 희망의 곳을 향하여 가겠다는 의지가 서려 있습니다.

 

두번째 연과 네 번째 연의 소재는 반복됩니다. 시간의 소재를 사용합니다.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조금 다른 것은 두째 연은 어제와 오늘이 나오고 넷째 연은 오늘과 내일이 나옵니다. 미래를 향해서 새롭게 길을 매일 가고 있는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한편 가운데 연은 새로운 길을 향해 가는 가운데 만나는 좋은 것들을 노래합니다.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이런 노래를 부르며 매일 아침 등교하는 윤동주의 모습 생각만해도 가슴이 뭉클해 옵니다. 일제 강점기 때인데…. 이런 멋진 시를 쓸수 있었던 것은 가정에서 성경을 배웠습니다. 교회에서 성경을 배웠습니다. 아울러 가정과 교회에서 믿음의 삶을 사는 자들을 보면서 자랐습니다.

저희 자녀들도 ‘새로운 길’을 걸으며 ‘새로운 길’을 보여주는 위대한 인물들이 되어 갈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이 걸을 때 만물이 새로와집니다.

교토의 일본 주민들도 새로운 길을 걷고 싶어서 윤동주의 시비를 세운 것이 아닐까요?

 

성경은 말씀합니다.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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