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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아이에게 끌리며”이사야 11:1-9 (2024/12/1)

12월 1일 주일예배 설교: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이사야 11:1-9)

이영길 목사

Middleborough town에 있는 어느 카페에서 다음과 같은 싸인을 가게 창문에 붙여 놓았습니다.

“5초간 춤을 추세요. 커피가 무료입니다.”

그랬더니 다음과 같은 장면이 연출되었습니다. 커피를 무료로 마시기 위해서 재밌는 춤을 추며 손님들은 카페 안으로 들어 오는 장면이 SNS에 퍼져 나갔습니다. 물론 매일 이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주인 마음대로 결정합니다.

오늘 대강절 첫째 주일 예배를 드립니다. 대강절 기간 만큼은 춤을 추며 들어 오시는 분들만 예배를 드리게 하면 어떨까요?

사실 오늘이 교회력으로는 첫날입니다. 교회력은 오늘 곧 대강절 첫째 주일을 시작으로 시작됩니다. 2024-2025년 교회력의 시작이 바로 오늘입니다. 교회력의 시작은 아기예수를 사모하며 아울러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춤을 추면서 들어오시지 않으셨으니 나갈 때 춤을 추며 나감으로 교회력의 시작의 축제를 몸으로 표현해 봄은 어떨까요?

2천년전 아기예수로 말구유에 오셨고 언젠가 구름 타고 다시 오실 주님은 올해 24-25년 교회력의 시작인 오늘 우리가 어떻게 시작하길 원하실까요? 아니 어떤 사람들이 새로운 교회력의 위대함 속으로 빠져 들어 갈수 있을까요? 말씀을 상고하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위대한 교회력의 시작은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지가 은연 중 제시되어지고 있다고 봅니다. 1절,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이것으로 알수 있는 것은 위대한 시작은 새로운 씨앗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님을 알수 있습니다. 오래된 가지나 뿌리에서 시작됩니다.

저희 집 뒷 마당 한 가운데는 잔디가 아닌 떨기나무 같은 나무가 자라는 작은 터가 있습니다. 작년부터 거기에 소나무가 자라기 시작합니다. 너무 예뻐서 일단 많이 커질 때 까지 그대로 두고 있습니다. 이 소나무는 새로운 씨앗에서 자라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이런 새로운 씨앗에서 자라기 시작한 싹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확히는 이새의 줄기 내지 뿌리에서 한 싹이 난다고 말씀합니다.

곧 이미 있었던 나무인데 짤려진 나무입니다. 어쩌면 뿌리가 드러난 나무입니다. 거기서 새 싹 내지 가지가 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짤려진 나무 뿌리가 드러난 나무는 많을텐데 그 중 어떤 나무일까요? 이새의 줄기 이새의 뿌리에서 우리는 그 해답을 찾을수 있습니다.

이새는 누구이죠? 다윗왕의 아버지입니다. 곧 다윗의 왕조에서 새 싹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간단히 성경해석의 기본 원칙을 말씀드렸습니다. ‘그 때 거기서 지금 여기로’.

성경이 쓰여진 때로 돌아가서 왜 쓰여졌는지를 이해한 후에 오늘 우리들의 상황에서는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를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일단 바로 전 이야기를 살피면 좋을 것 같습니다. 10장 24절,

“그러므로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시온에 거주하는 내 백성들아 앗수르가 애굽이 한 것처럼 막대기로 너를 때리며 몽둥이를 들어 너를 칠지라도 그를 두려워하지 말라.”

이스라엘이 솔로몬 이후 남왕국과 북왕국으로 나뉘어지죠. 그리고 북왕국이 BC 739년에 먼저 앗수리아에 망합니다. 바로 오늘 본문 말씀 전에는 북왕국이 앗수리아에 멸망당하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곧 북왕국은 물론이거니와 남왕국도 풍전등화 언제 초토화가 될지 모릅니다. 이 때 이스라엘 민족에게 앗수리아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10장 25절,

“내가 오래지 아니하여 네게는 분을 그치고 그들은 내 진노로 멸하리라 하시도다.”

곧 앗수리아가 쳐 들어 와서 협박을 해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하고 하십니다. 아니 그들에게 멸망당해도 두려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내 진노로 멸하리라.”

이것이 오늘 본문 말씀의 배경입니다. 그리고는 이사야는 예언의 말씀을 계속합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이 예언의 말씀을 듣는 이스라엘인들은 무엇이 머리에 떠오를까요? 어떤 장면이 떠오를까요? 이새의 줄기는 당연히 다윗과 그 뒤를 잇는 다윗 왕조임을 알게 됩니다.

이사야의 놀라운 지혜가 여기에 있습니다. 앗수리아의 이야기를 배경으로 이새의 줄기 곧 다윗을 이야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사야는 은연중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앗수리아는 다윗이 물맷돌 하나로 물리쳤던 골리앗이다.’

다윗의 자손 중에 다윗 처럼 골리앗을 무찌를 사람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곧 메시야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윗의 자손 메시야의 모습을 소개합니다. 2-5절,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

곧 메시야만 오시면 세상은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최고의 세상이 도래할 것을 금방 느끼게 합니다.

사실 이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각에는 앗수리아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매일 꿈 속에서도 만납니다. 그들의 잔혹 무도함을…. 서로 서로 그들의 포학함을 나눕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공포 가운데 젖어갑니다.

역사가들이 말하는 앗수리아인들의 포악한 모습 하나만 소개해 드리면, 적군을 죽여서 목을 벤 다음 가족들이 그 머리를 장대 위에 꽂고 행진케 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을 잘 아는 이스라엘인들은 얼마나 공포스러웠겠습니까?

그런데 앗수리아를 새로운 골리앗으로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이사야는 다윗의 자손의 모습과 그가 하실 일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앗수리아인을 두려워 했던 그 모든 자취를 쏵 씻어 버리고 다윗의 자손의 이미지를 밤낮으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쉽지가 않죠? 자꾸 무서운 앗수리아인들의 모습이 꼬리를 물고 떠오르곤 했을 것입니다.

이런 꿈도 종종 꾸었을 것입니다. 앗수리아의 포로가 되어 어쩔수 없이 그들의 명령대로 사랑하는 분의 몸의 일부를 장대에….

이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이사야는 앗수리아인들의 이미지를 이기고도 남는 새로운 이미지를 보여 줍니다. 6절,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어린 아이가 목동이 되어서 이리, 어린 양, 표범, 어린 염소, 송아지, 어린 사자, 살진 짐승을 푸른 초장으로 이끄는 모습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이 어린 아이가 누구의 모습이겠습니까? 다윗의 자손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바로 목동이지 않았습니까?

앞으로 오실 메시야를 특별한 목동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입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무찌르기 위해서 물맷돌이 필요했는데 이 어린 아이는 물맷돌도 필요 없습니다. 이 어린 아이가 이끌 때 이리도 어린 양도 서로 놀기 시작합니다. 표범이 어린 염소를 돌봐 줍니다. 송아지는 어린 사자 등 위에 올라타서 사자를 이리 가라 저리 가라 지시합니다. 누구 때문에 어린 아이 때문에…. 계속 이사야는 표현합니다. 7절,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정말로 천국 그 자체입니다. 저는 가장 중요한 귀절은 8절이라고 생각합니다.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7절까지는 어린 아이로 인해 온갖 동물들이 평화를 찾고 재밌게 춤추고 뛰노는 장면을 연상케 합니다.

8절에서는 젖 먹는 아이와 젖 뗀 아이가 등장합니다. 순서로 보면 젖 먹는 아이에서 젖 뗀 아이 그리고 어린 아이로 이어져야 할 텐데 순서는 조금 뒤바뀌었습니다.

젖 먹는 아이는 철부지가 되어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고 있고 좀 더 큰 젖 뗀 아이는 용감해졌는데 독사의 굴에 손을 넣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해도 없습니다.

젖 먹는 아이의 모습에서 신비한 빛을 독사들이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후에는 모든 들짐승들이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지혜로운 예언자 이사야는 먼저 앗수리아로 인해 공포로 떨고 있는 자들에게 골리앗을 무찔렀던 청소년 다윗을 보여 줍니다. 그래도 부족해서 어린 다윗을 보여 줍니다. 그것도 부족해서 젖먹이 다윗을 보여 줍니다.

젖먹이의 얼굴을 보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축복을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9절,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젖먹이 메시야의 얼굴을 보는 자들은 여호와를 아는 지식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젖먹이 메시야는 남들이 거들떠 보지도 않는 어쩌면 버려진 나무에서 돋는 새싹인 것입니다. 죄로 인해 상한 나무 가지와 뿌리에서 나오는 새싹인 것입니다. 울창한 나무에서 나오는 새싹이 아니라….

사실 이사야가 이 예언을 할 때는 다윗 왕조는 상한 왕조였습니다. 남왕국 북왕국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앗수리아로 인해 풍전등화였습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기예수가 탄생할 때는 이미 다윗 왕국은 사라졌습니다. 유대민족만 남아 있었습니다. 뿌리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뿌리에서 새싹이 돋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이런 가지에서 나오는 새싹을 볼수 있을까요?

어느 분이 재밌는 문제를 냈습니다. 문제는 다음 중 ‘오른 말을 고르시오’ 입니다.

1)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2) 벼는 고개를 미리 숙여서 빨리 익는다.

둘다 맞는 것 같은데, 정답은 2번입니다.

고개를 숙일 때 어떤 일이 생길까요? 어린 아이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젖 뗀 아이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젖먹이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들 모습 안에 다윗의 자손의 모습이 담겨져 있습니다. 아기 예수의 모습이 담겨져 있습니다.

지난 약 3개월간 미국은 대선으로 인해서 시끄러웠습니다. 머리를 꼿꼿이 세운 두 후보자의 얼굴을 수 없이 보면서 지내 왔습니다.

이제 대선도 끝나고 대강절을 맞이 합니다. 대강절에 누구가 초대 받게 될까요? 춤추며 들어오는 사람들일까요? 머리를 꼿꼿이 드는 자들일까요?

고개를 숙이는 자들입니다.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자들을 찾는 자들입니다. 그 중에 젖먹이들이 있습니다. 그 중 한 분이 아기 예수입니다.

고개를 숙이는 자들에게 놀라운 축복이 임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이 멋진 여정에 여러분들을 초대합니다.

그런데 이 멋진 여정에 참여하신 분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고개를 버쩍 든 사람만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종 무시를 당합니다. 왜냐하면 고개를 숙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성령이 임하셔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한 자들이 됩니다.

어느 대강절 묵상집에 기록된 글을 나눕니다. 이 글을 읽으면 고개를 숙인 자들이 누릴 축복을 알게 됩니다. 젖먹이 아기 예수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태어났지만 우리들에 의해 발견되기를 기다립니다. 그는 우리들의 문을 두드리지만 우리들의 “예스”를 기다립니다. 아기 예수는 아무 것도 우리에게 강압하시지 않습니다. 자신의 존재 조차도…. 그런데 그는 환대를 받을 때 당신의 끝없는 환대로 갚으십니다. 우리들의 미흡한 헌신을 넘치는 축복으로 갚으십니다.”

이번 대강절 기간 고개를 숙여 젖먹이들의 신비함을 바라 보십시다. 아기 예수를 만나십니다. 어느덧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우리들의 삶은 충만케 될 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평생 대강절의 삶을 산 대표적인 분이 Saint Therese of Lisieux인데 이 분은 ‘작은 꽃 성녀’ 혹은 St. Thérèse of the Child Jesus라고도 불리워집니다.

그분은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최대의 은혜는 제가 작은 자이며 모든 선에 대해 무력한 자라는 것을 알려주신 일입니다. 저는 예수님을 닮고 마땅히 제 안에 그분께서 머무르시도록 언제나 아주 작고 참으로 겸손한 사람으로 남아있고 싶어요』

이러한 고백을 하면서 살았기에 성녀가 임종을 맞이했을 때 수녀원 사람들이 모여 걱정을 하였다고 합니다. 부고를 적어야 하는데 너무 알려진 것이 없어서 무엇을 적을지 모르겠다고…. 이를 들은 테레사 수녀는 미소를 지었다고 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수녀의 장례식에는 가족과 몇명의 친구들, 그리고 가까이 지내던 수녀 등 30명도 안 되는 사람들이 모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성프란시스코 다음으로 전 세계에 제일 많이 알려지게 되었고 900권의 책이 쓰여졌다는 것입니다. 수녀가 혼자 기록한 글들이 발견이 되어서….

진실로 수녀는 고개를 숙여 아기예수만을 바라 보았습니다. 어느 덧 하나님의 지식으로 충만한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고개를 숙인채 대강절의 축복을 누리십시다. 그후 춤을 추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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