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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요한복음 3:22-30 (2024/12/15)

언젠가 말씀드렸는데 스페인의 유명한 카미노 순례의 길이 있습니다. 약 6주간의 코스인데 이 순례의 길을 갔던 수녀와 신부가 순례의 길을 마치고 책을 펴냈는데, 이런 챕터 제목이 있습니다.

‘Hum of humanity.’ (인간들의 콧노래)

내용은 이렇습니다. 순례를 시작하기 전 생전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한 공간에서 잠을 잘수 있을까 걱정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첫날은 주위 사람들 때문이 아니라 너무 피곤해서 잠이 잘 안 왔다고 합니다. 갑자기 온 방 안에 여러가지 코 고는 소리로 가득차는 것을 느꼈다고 합니다. 잠시후 그것은 하나의 잠의 교향곡과 같이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가지 언어로 이루어진…. 여러 나라에서 왔기 때문에….

코고는 소리는 온 인류는 하나임을 느끼게 한 것입니다. 이 코고는 소리를 저자는 이렇게 이름한 것입니다.

‘Hum of Humanity.’

 

이 글을 읽은 후 저는 하루이틀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잠이 들었습니다.

‘나도 그 위대한 Hum of Humanity에 동참하는 시간으로 들어가는구나….’

 

오늘 대강절 셋째 주일 예배로 드립니다. 아기 예수가 태어나실 때 아기 예수를 목자들과 동방박사들이 환영하였지만 실제로는 그 당시 수많은 인류의 Hum of Humanity가 아기예수를 환영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아기 예수는 인류의 humming을 자장가로 삼아서 깊은 잠을 잤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중 이 주님의 탄생을 자기도 모르게 축하하며 Hum of Humanity에 동참한 사람이 있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아기가 있었습니다. 6개월 전에 태어난 세례요한입니다.

 

오늘 대강절 셋째 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대강절 촛대의 세번째 초를 켰습니다. 특별히 분홍색 초를 켰습니다. 바로 분홍색 초는 세례 요한을 뜻합니다. 세례 요한이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먼저 태어남을 나타내기 위해서 분홍색 촛불을 키고 세번째 대강절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확실한 것은, 세례 요한은 아기 예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나서 아기예수를 Hum of Humanity라는 합창을 부르는 합창 단원이 되어서 아기 예수를 맞이 한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은 실제로는 독창자로서 6개월 전에 태어났습니다. 물론 어릴 때는 Hum of Humanity를 불렀습니다. 때가 되었을 때 그는 멋진 독창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부른 독창 가사는 무엇일까요? 세례 요한의 노래입니다. 30절,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저는 이 노래를 바로 Hum of Christianity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러면 세례 요한은 이 노래를 어떻게 부르게 되었는지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이 노래를 부른 결과가 무엇인지 알아보겠습니다. 22절,

“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베푸시더라.”

 

다 잘 아시죠?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시작하셨습니다. 그런데 얼마 있다가 보니 세례 요한이 세례를 베푸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예수가 세례를 베풀고 계십니다.

이민 사회에서도 종종 있는 일이 생각납니다. 기껏 사업하는 기술을 가르쳐 주었더니 바로 옆 동네에 가서 같은 사업체를 연 것과 그리 큰 차이를 못 느낄 정도입니다. 속된 말로 하면 경쟁자가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이에 더 민감한 사람들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자기 스승에게 세례를 받은 자가 세례를 베풀기 시작했는데 웬일인지 그 쪽으로 더 많은 사람이 몰려 가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시기하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죄성이 있는 인간 사회에는 늘 시기가 맴돌고 있으니 말입니다. 26절,

“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이에 세례요한이 답합니다. 28절,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도리어 세례 요한은 자기 제자들에게 은연중 자기를 떠나 예수의 제자가 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예수의 증언자가 되라고 하는 것이 바로 그의 제자가 되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서 29절,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언뜻 보면 자기의 경쟁자 처럼 보이지만 절대로 경쟁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는 그의 친구로서 그가 잘 되는 것이 자신의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자기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을 보면서 자기는 큰 기쁨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놀라운 노래를 부릅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이것이 결혼식 입장할 때 퇴장할 때 부르는 친구들의 노래임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아울러 세례 요한에게는 이 노래는 모든 크리스천들의 노래, 곧 ‘Hum of Christianity’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노래를 부를 때 어떤 일이 생기나요?

 

사실 성탄절기에 빠짐 없이 부르는 찬송이 있습니다. 바로 ‘고요한 밤 거룩한 밤’입니다. 이 찬송도 Hum of Christianity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이 찬송은 아기 예수를 맞이 하는 Hum of Christianity입니다. 이 노래가 있는 곳에 오늘도 아기 예수는 새로이 태어나실 줄 압니다. 곧 놀라운 기적이 펼쳐집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생 중인 1914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벨기에의 이프르에서 영국과 독일 간의 전쟁중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독일군의 한 병사가 크리스마스 캐롤인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불렀습니다. 이를 들은 영국 군사들이 환호하자 독일군이 노래를 다 끝마친 후 독일군 장교가 나와 영국군 하사와 악수를 하여 정전을 맺었습니다. 이를 크리스마스 정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정전입니다. 얼마 후 다시 전쟁은 재개되었습니다.

 

아기예수는 정전을 위해 태어나시지 않으셨습니다. 영원한 평화를 위해 태어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더 듣기를 원하시는 노래가 있을줄 압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사실 그런 의미에서 세례요한 주일을 선교주일로 지키는 교회가 많습니다. 저희 교회가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최근 수 년 동안 항상 세례요한 주일에는 선교사분들을 초대하던가, 선교학자들을 모시고 설교 말씀을 들어왔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세례 요한의 노래는 선교사들의 콧노래이기 때문입니다. Hum of Missionaries입니다. 이 노래가 있는 곳에는 단순히 정전이 아니라 영원한 평화가 깃들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미국 땅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이 모든 것은 조선 땅에서 선교사들의 콧노래를 부른 수많은 선교사님 때문임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들이 척박한 조선 땅을 밟을 수 있었던 힘은 바로 이 노래 덕분인 것입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이 노래를 부르는 이들에게는 조선 사람들이 다르게 보였던 것 같습니다. 이 노래를 부르면서 선교사들은 슬퍼했을까요? 그럴리 없습니다. 이 노래를 부르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조선인들은 미개한 불쌍한 사람들로 보였을 줄 압니다.

 

1900년 초기에 사무엘 무어라는 미국 장로교 선교사는 총회 본부에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보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한국을 그렇게 오랫동안 그대로 내버려두셨겠습니까? 그것은 아주 특별한 때 특별하게 쓰기 위해서 입니다. 그 때 곧 동방의 이스라엘로서 동방의 구원의 횃불을 들게 하기 위해서인데 그 때 구원의 불을 들 때 세계 문제는 해결되며 제대로 해결되고 한국이 만국을 구원할수 있습니다.”

 

이 보고서가 맞고 틀리고는 하나님만 평가하실수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세례 요한의 고백을 하는 자들에게는 놀라운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느끼게 됩니다. 남들에게는 하찮은 민족이지만 이들에게는 위대한 민족 세계를 이끌어갈 민족으로 보인 것입니다. 결국 이런 놀라운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고백 없이 한국 선교를 할 수 있었을까요?

 

한국의 초대교회를 생각할 때 늘 생각나는 교회가 있습니다. 실은 선교사들로 인해 첫 교회는 황해도 소래에 1895년도에 세워집니다.

언더우드가 소래 교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습니다.

“…오늘 이 교회는 한국에서 가장 튼튼한 교회의 하나다. 그들은 장연 시찰의 중심이 되었고 12개 교회를 개척했다. 이 교회는 교회 자체 경비는 물론, 장로와 집사들의 지도하에 교회들과 마을들을 순회하는 전도사 한 사람의 봉급을 지원하고 그의 사택도 지어 주었다. 교회 부설 학교도 지원하였는데, 관대한 교회 회원들이 수시로 땅을 기부해서 지금은 모든 학교 경비를 거의 자급하고 있다. 이들은 나아가 다른 교회와 예배처소 건축을 돕는 데도 앞장 서고 있다. 때때로 그리스도를 모르는 마을에 전도대를 보낸다. 선교 헌금도 적립하고 있는데, 인도에 기근이 들었을 때와 터키의 아르메니아인 만행 사건 때에는 자발적으로 연보를 모아 보냈다. 인도 기근을 위한 연보만 해도 80엔이 넘었다. 이들의 수입과 하루 10센트도 안 되는 임금을 고려해 볼 때, 이 자발적인 연보를 위해서 그들은 적지 않은 희생과 고생을 감내한 것이라.”

 

이들이 어떻게 이럴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은 선교사들의 노래를 들었습니다. 함께 따라한 것입니다.

“그는 흥하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조선 땅에 대대적인 복음 역사가 펼쳐진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다. 만일 선교사들이 가사를 조금 바꿨더라면 어떠했을까요? 이렇게,

“그는 쇠하고 나는 흥하여야 하리라.”

 

얼마전 어느 목사님의 강의가 크게 와 닿은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이 조사해 보니 국가별 1인당 GDP가 3만불이 넘으면 기독교는 하향세에 들어간다고 발표하셨습니다. 한국은 작년 기준으로 3만3천불이 조금 넘습니다. 미국은 거의 8만2천불이 됩니다. 그러니 얼마나 기독교가 버티기 어렵겠습니까?

 

그 이유가 있습니다. 한국과 미국에서 주님께서 들으시는 Hum of Christianity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 두 가지가 있다고 봅니다.

“그는 쇠하고 나는 흥하여야 하리라.”

이런 노래는 도리어 구분이 쉽게 되어서 괜찮습니다. 더 애매한 노래가 있습니다.

“그도 흥하고 나도 흥하여야 하리라.”

 

반면 세례 요한은 끝까지 자기가 부르기 시작한 노래를 죽을 때까지 불렀습니다. 말씀드린대로 세례를 위해서 태어난 세례 요한에게 갑자기 선의의 경쟁자가 나타났습니다. 자기가 세례를 준 예수가 세례뿐 아니라 장정만 5천명을 먹이는 기적을 행하니 자기에게 오던 모든 사람들은 예수에게 빼앗겼습니다.

드디어 그의 말이 이루어졌습니다. 직업을 잃었습니다. 더 이상 세례를 베풀 수 없게 되었습니다. 철저히 쇠하여졌습니다.

 

그래도 그는 노래불렀을 것입니다.

“그는 흥하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그러면서 끝까지 쇠하여야 할 길을 위해 기도드렸을줄 압니다. 그런데 소식이 들립니다. 헤롯이 자기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을 듣습니다. 이런 일에 주님께서 관여하느니 자신이 관여해야 한다고 판단했을 것 같습니다. 곧 바로 헤롯에게 찾아가서 옳지 않다고 바른 소리를 합니다.

그 결과 잘 아시죠. 머리 베임을 당합니다. 정말로 쇠하되 가장 허무하게 삶을 마칩니다. 이로 인해서 제자들에게 자기는 메시야가 아님을 더욱 확실케 한 것입니다. 쇠하여야 하는 자기가 할수 있는 바로 그 일을 하면서 자기는 사라지고 주님을 위한 십자가의 길을 열어놓았던 것입니다.

그는 목이 베임을 당하는 순간에도 이 노래를 불렀을 것입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실은 주님은 세례 요한이 이슬처럼 쓸쓸히 사라진 소식을 듣습니다. 세례 요한의 죽음의 소식을 들으시고는 마태복음에 보면 주님은 빈들로 가서 조용히 시간을 보내십니다. 많은 생각을 하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몰려 와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장정만 오천명을 배부르게 먹게 하는 기적을 베푸십니다.

글쎄 우연일까요? 세례요한의 노래를 들으시면서 당신은 흥하여야 함을 온 세상에 보여 주신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세례 요한의 고백을 할 때마다 주님은 놀라운 기적을 베푸십니다. 주님은 신나게 당신의 흥함을 보여 주십니다.

 

곧 주님은 두 가지 Hum of Christianity를 좋아하십니다. 아기 예수 때는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장성한 후에는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한편 우리는 말로만 노래로만 따라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도 따라 해야 합니다. 함께 쇠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흥하십니다.

그러니 함께 세례요한의 지휘봉에 맞추어서 노래 부르십시다.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이 노래를 앞으로 일어날 놀라운 역사를 기대하면서 기쁨과 소망 중에 부르는 노래인 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지난주일 새교우 환영반에서 들은 은혜로운 간증을 나누겠습니다. 한국에서 외무고시에 합격하고는 연수원에 들어갔는데, 약 40명이 합격을 하였지만 마지막에는 3명을 떨어뜨린다고 합니다. 참, 무서운 곳입니다.

한 독실한 기독교인이 계셨는데, 이 분은 자기 노트도 다른 연수원생에게 보여 주면서 늘 이웃을 챙기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분이 3명 안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새교우분은 아직 본인은 신앙은 깊지 않지만 그 분의 영향을 받아서 기독교에 마음의 문을 열게 되었다고 은혜로운 간증을 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정말로 이 분을 통해서 한 영혼이 구원을 받게 되었으니 이 분이야 말로 세례 요한의 고백의 산 증인인 것입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은 온 세상을 잠시 평화에 깃들게 합니다. 세례 요한의 고백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킵니다.

기적을 불러 일으키는 최고의 노래를 부르십시다.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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