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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존하는 자들

날짜 : 2012.11.18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세상을 보존하는 자들
성경본문 : 누가복음 14:34-35

http://kcbostonmedia.cponsolny.com/Sermon_video_master/Sermon_20121118.wmv

오랜 세월 배우가 되기를 갈망했던 사람이 마침내 배역을 하나 맡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에게 주어진 역할은 엑스트라에 불과했습니다. 대사도 한 마디뿐인 아주 단순한 것이었습니다. 그 대사는,
“제가 봤어요.” 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그것뿐이었지만 그는 매우 열심히 대사를 외웠습니다.
“제가 봤어요. 제가 봤어요. 제가…….” 화장실에 갈 때도 잠꼬대로도 그는,
“제가 봤어요.”를 연발했습니다.
마침내 연극이 공연되는 날이 왔습니다. 주인공이 피투성이가 된 채 누워 있는 사람을 가리키며 엑스트라에게 물었습니다.
“자네가 이 사람이 살해되는 걸 봤단 말이지.”
그러자 엑스트라가 토끼눈을 하며 말합니다.
‘제가 봤다고요?”

제 아무리 혼자서 연습을 오래 했었지만 정작 본 무대에 올라서서 단 한번 주어진 기회를 안타깝게도 실수를 한 엑스트라 배우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모습이 우리들의 모습은 아닐까요? 말씀대로 살겠다고 늘 다짐합니다. 말씀을 외우고 또 외웁니다. 그러나 실전에서는 꼭 필요할 때 가장 중요할 때 실수를 하는 우리들은 아닌가요?

오늘 추수감사주일이자 창립59주년 기념예배로 드립니다. 올해는 저희 교회 표어로 ‘감사하는 회중’이라고 정했습니다. 그 이유는 연초에 말씀드렸지만 그동안 저희 교회는 어떻게 보면 앞만 보고 달려왔습니다. 특히 ECC건축을 위해서 전 교우님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섬기셨습니다. 수년간 완공에 이르기까지 긴장 가운데 지내왔습니다. 건축 후 잠시도 쉬지 못하고 새로운 프로그램의 정착을 위해 약 2년간 또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작년 말로 건축과 함께 새로운 프로그램이 점점 자리를 잡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빴던 마음을 내려놓고 과거를 뒤돌아보며 감사하는 한 해가 되지는 뜻에서 올해 표어는 ‘감사하는 회중’으로 정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는 신년예배시 ‘감사하는 회중’으로 설교 말씀을 드렸습니다. 두 가지 감사를 강조했습니다. 첫 번째로는 하나님께 감사, 두 번째로는 이웃에게 감사. 두 가지 감사가 조화를 이룰 때 참 감사하는 회중이 될 줄 압니다. 그래서 올해 반년이 지난 7월중에 또다시 ‘감사하는 회중 II’이라는 제목으로 설교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것도 부족한 것 같아서 9월 임직예배시 ‘신앙의 삼중주’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면서,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자’라는 메시지를 담은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것도 부족해서 저는 이메일을 주고받을 때 올해의 표어를 추신처럼 적었습니다. ‘감사하는 회중.’ 교회 일로 저와 이메일을 주고받으신 분들은 모두 기억하실 줄 압니다. 이처럼 저는 열심히 ‘감사, 감사, 감사’를 외쳤습니다.
순간순간 감사를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좋은 일 궂은일에 늘 감사하려고 했습니다. 특히 하루를 마치면서 그날 만난 분들을 생각하면서 5가지 감사를 한 후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얼마 전 지금 말씀드린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늘 연습을 했지만 가장 중요한 때, 아니 꼭 필요한 때를 놓친 엑스트라 배우의 이야기를 접하게 되면서 혹시 저도 그리고 우리 교우님들도 비슷한 케이스가 되지는 않을까 잠시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 봤습니다. 그러면서 한 가지 놓치고 있는 감사의 제목을 찾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읽으면서 한 가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 데 없어 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

오늘 저는 쓸 데 없어 내버려지는 것까지도 감사의 제목으로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가 빛을 발하였다고 생각했을 때는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소금이 되었을 때는 감사를 간과하는 것 같습니다. 아니 건너 뛰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감사할 때도 빛의 역할을 잘 해줘서 감사하는 것이 훨씬 많습니다. 그런데 빛은 보이지만 소금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빛의 역할을 잘 하는 사람들은 늘 감사의 말을 자주 듣습니다. 반면 빛의 역할 대신 소금의 역할을 하시는 분들은 상대적으로 감사의 말을 듣지 못합니다. 그러다 보면 자기 스스로도 소금의 역할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지내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한편 오늘 추수감사주일이 되어서 이처럼 교회 나오셔서 예배를 드리고 계신데 우리가 이처럼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버림을 받지 않은 증거입니다. 우리가 버림을 받지 않은 이유가 하나 있다면 우리는 그래도 세상의 소금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아냐, 나는 빛도 아니고 소금도 아니야, 빛도 소금도 아닌 나를 오늘 이 예배에 오게 하셨으니 감사할 뿐이지.’ 라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시지는 않으신가요?

한국의 중학교 1학년 학생이 아버지를 생각하며 글을 썼습니다.

“‘바스락바스락 북적북적’ 오늘도 아침 일찍 일어나신 우리 아빠. 아직 해가 뜨기도 전인 이른 새벽부터 고추 모들을 만나 바람을 쐬어 주는 일부터 저녁 늦게 소밥을 주시고, 아침에 열어둔 고추 모들을 얼어 죽지 않게 보온 덮개로 덮어주는 일까지 아빠의 하루는 이렇게 흘러갑니다.

예로부터 농사는 모든 산업의 중심이 되어 매우 농사를 중요시 여겼습니다. 하지만 요즘 들어 여러 직업이 하나 둘씩 생겨나면서부터 젊은이들이 도시로 취직하러 떠나는 그런 현상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집과 내가 태어난 고향은 원래 부천 역곡동이라는 곳이었는데 아빠의 고향이신 이곳 양동으로 내려왔습니다. 잘 살 수 있는 조건 속에서도 불구하고 농사를 지어 성공하리라는 생각만으로 시골 땅에 힘찬 발걸음을 내디딘 것입니다. 외국의 값싼 농산물이 물밀듯이 밀려올 때, 뒤에서 묵묵히 오직 농산물의 성공적인 재배를 위해 포기하시지 않고 지금껏 꾸준히 일하시는 우리 아빠가 대단해 보이고 존경스럽기도 합니다.

땅에 씨앗을 심고 물을 주고 거름을 주고 채소를 길러낸다는 농사라는 직업은 한시라도 돌봐주지 않으면 흉년이 들고 마는 그렇게 힘든 직업입니다. 누가 그러던 가요? 농사를 지으면 빚이 늘어난다고요. 그 말은 맞습니다. 농사는 제 철이 아닐 때는 한없이 값이 올라가지만 제 철이 되면 채소 값은 폭락하여 씨 값도 못 건지는 경우도 가끔 봅니다.
그런 농사라는 힘든 직업을 마다하지 않고 제가 초등학교 입학부터 중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열심히 일해오신 우리 아빠는 근로자 중의 더할 나위 없는 근로자이십니다.

지금 막 잠이라는 세상에 푹 빠져 계신 우리 아빠의 손을 어루만져 봅니다. 곳곳엔 낫에 베여 찢어지신 살갗과 군데군데 붙여있는 반창고를 보면서. 이 영광의 상처들이 모두 아빠의 노력의 결실이라는 걸 새삼 깨닫습니다.
옆에 놓여있는 아빠의 땀이 배어 있는 모자가 아빠의 하나하나 늘어가는 주름살이라는 걸 이제야 느낍니다.
셀 수 없을 만큼 어느새 늘어버린 흰머리를 세면서 잠이 들기엔 시간이 모자란 듯싶습니다. 내일 아침이면 어김없이 새벽 일찍 일어나실 아빠의 손을 어루만지면서 나는 고이 잠듭니다. 아빠의 몰라보게 늘어버린 흰 머리카락을 하나하나 세어보면서….”

훌륭한 아버지의 모습을 느낍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의 모습을 빛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세상의 소금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두 모습이 다 있지만 좀 더 소금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모든 사람이 떠나는 농사일을 몸소 감당하시려고 농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농부들로 인해서 한국은 오늘의 한국이 되어가고 있지 않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농부가 되어 친히 소금의 직분을 감당하기에 한국이라는 나라가 건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러면 한 가지 질문이 떠오릅니다. ‘소금의 역할을 하려면 농부와 같은 직업을 택해야 하는가?’ 남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직업 말입니다.
저는 이 아이의 글을 읽고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정말로 훌륭합니다. 그런데 한편 생각해 보니,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직업은 다 소금과 같은 기능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중에 농부는 확실히 소금의 직분이 분명합니다.

사실 시대에 따라서 어떤 직업이 더 존경 내지 우대를 받기도 합니다. 농부도 옛날 우리 조상들에게 우대받는 직업이었습니다.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사농공상. 가르치는 선생이 가장 우대를 받았고요. 그 다음으로는 농부였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기계 다루는 사람들, 마지막으로는 상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계속 시대에 따라 늘 변하고 있지 않습니까?
요즘 우대받는 직업이 무엇인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 별로 이슈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직업에는 소금 역할이 있다는 것입니다. 소금과 같은 역할이 있기에 직업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사회가 필요하지 않는다면 벌써 사라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올해 일 년 동안 수고한 모든 것들은 바로 소금의 역할을 한 것입니다. 한 마디로 사농공상 모두 소금의 역할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여러분이 사회에서 하는 모든 일들은 바로 소금의 기능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이 사회에 기여를 하고 있고 자신도 소금의 직분을 감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그러한 생각 없이 그저 월급만 받기 위해 일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일 년을 되돌아보며 감사하는 오늘 우리는 먼저 우리가 하는 일로 인해서 새로운 감사를 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여러분들이 하시는 일들을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소금의 역할이 분명히 있습니다. 사업을 하시던 연구를 하시던 아니면 가정주부이시던 세상은 여러분의 일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시는 일로 인하여 사회는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갖고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 볼까요? 34절입니다.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사실 이 말씀은 이해가 되지만 한편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소금이 좋다는 데는 우리 모두 동의합니다. 그런데 ‘소금이 맛을 잃는다.라는 표현은 참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소금이 어떻게 맛을 잃습니까? 그러나 맛을 잃을 수가 있습니다. 감사를 잃을 때 소금은 그 맛을 잃지 않을까요?

우리들이 하는 일은 모두 좋은 일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일들이 맛을 잃을 수가 있습니다. 언제? 감사를 잃을 때가 아닐까요? 감사를 잃을 때 우리들이 하는 일들이 잘못되기 시작합니다. 결국 어떻게 되나요? 35절입니다.

“땅에도, 거름에도 쓸 데 없어 내버리느니라.”

교우 여러분, 우리는 늘 감사하고 또 감사하고 또 감사하여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1년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매일 하고 있는 일로 인하여서는 감사의 제목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 감사의 제목이 부모님의 사랑보다는 앞설 수는 없겠죠. 더욱이 우리 주님의 보혈의 은혜와는 비교도 안 되는 작은 감사이지만….

얼마 전에 갑자기 눈이 많이 왔죠? 저희 집사람이 한국에 갔다 온지 얼마 안 되어서 밤잠을 설치고 있는데 밖에서 자동차 헛바퀴가 도는 소리가 심하게 나서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고 합니다. 제설차량이 잘못 운전을 했는지 옆집 잔디밭에 들어가서 빠져 나오려고 헛바퀴 질을 계속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정 안 되어서 결국은 견인차가 와서 끌어내갔습니다.
이틀이 지나서 눈이 녹은 후에 그 집 앞에 가 보았습니다. 이미 눈은 다 녹았는데도 하얀 더미가 보였습니다. 가까이 가 보았더니 소금더미였습니다. 제설차량에서 쏟아져 나온 소금이 sidewalk과 그 집 잔디밭에 수북이 쌓여있었습니다.
이 잔디밭에 있는 소금더미는 잔디를 죽이고 있었고 sidewalk에 있는 소금더미는 비나 눈이 오길 기다리는 듯 보였습니다. 하여튼 두 소금더미 모두 자기의 사용용도대로 사용이 안 되고 버려진 상태였습니다.
저는 소금이 불쌍하게 생각이 들었습니다. 눈길을 미끄럽지 않게 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소금인데 이제 잔디를 죽이던가 아니면 sidewalk에서 눈과 비에 쓸려 내려가기만 기다리고 있으니 말입니다.
저는 창고에 가서 부삽과 플라스틱 컨테이너를 가져 왔습니다. 남의 잔디밭에까지는 들어갈 수 없으니 sidewalk에서 소금을 담을 만큼 컨테이너에 담았습니다. 그리고 집에 가지고 왔습니다. 다음에 눈이 오면 저희 집 문 앞에 뿌리려고…. 저는 그동안은 눈이 오는 것을 반기지 않았는데 올해는 좀 다릅니다. 어서 그 소금을 뿌리고 싶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들의 삶을 감사하지 않을 때 우리들의 삶은 맛을 잃은 소금이 됩니다. 아무데나 뿌려집니다. 그리고 뿌려진 곳을 해칩니다. 우리들의 삶을 감사할 때 우리는 사회를 살리는 자가 됩니다.
우리가 하는 어떤 일도 감사하십시다. 세상을 보존하는 우리가 될 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지난번 수요여성공부시간에 한국 9도의 특징을 나누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전라도’ 차례가 돌아 왔습니다. 이구동성으로 “영광굴비”를 외쳤습니다. 굴비는 바로 소금으로 절인 조기를 말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영광굴비가 특히 유명한 이유는 영광에 염전이 또한 유명하다고 합니다. 곧 조기와 소금이 많이 나는 곳이 전라도 영광입니다.
그런데 왜 조기를 소금에 절였습니까? 맛도 맛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보존하려고 절인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러한 지혜는 한국인들만의 지혜였을까요?

냉장고가 나오기 전 모든 인류는 소금으로 음식을 보존했습니다. 유명한 이태리의 안초비가 있고요, 또 피클이 있습니다. 그리고 소고기, 돼지고기 모두 소금으로 보존했습니다.
제가 중학교 때 저희 집에 전기냉장고가 처음 생겼습니다. 그렇다면 냉장고가 인류사회에 들어오게 된 것은 얼마 된 것은 아닙니다. 그 전까지 인류는 소금으로 음식을 보존했습니다. 이제 음식은 냉장고로 보존합니다.
그러나 인류역사는 또 다른 소금이 필요하지 않은가요? 우리들이 하는 일이 바로 소금입니다. 아니 우리들의 하는 일을 감사로 받는다면 바로 우리가 소금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보존하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 데 없어 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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