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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을 사람에게 주셨도다

날짜 : 2012.10.07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땅을 사람에게 주셨도다
성경본문 : 시편 115편 15-1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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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서 크는 산”
– 이해인 –

좋아하면 할수록
산은 조금씩 더
내 안에서 크고 있다

엄마`
한번 불러 보고
하느님
한번 불러 보고
친구의 이름도 더러 부르면서
산에 오르는 날이
많아질수록

나는 조금씩
산을 닮아 가는 것일까?

하늘과 바다를 가까이 두고
산처럼 높이
솟아오르고 싶은 걸 보면

산처럼 많은 말을 하지 않고도
그냥 마음이 넉넉하고
늘 기쁜 걸 보면

내가 산에 오르기를
좋아하면 할수록
산은 조금씩 더
내 안에서 크고 있다
(저자 편집)

저희 교회에 시내산 동우회가 있는데 많은 분들이 참여를 하고 있습니다. 이해인 수녀의 시가 왜 많은 분들이 산에 오르기를 좋아하시는지 그 이유를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산에 오르면 오를수록 산이 작아지는 것이 아니라 각자 안에서 산은 자란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참 신기하죠? 산에 오르면 오를수록 산이 작아지는 느낌을 느껴야 하는데 도리어 산은 자라고 있다고 합니다. 아마도 기쁨의 산, 희망의 산, 행복의 산이 자라고 있음을 고백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시인은 ‘산’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마 이해인 수녀와 아주 유사한 체험을 하고 이 시를 쓴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 시의 마지막 부분만을 봉독해 드렸습니다만, 시인은 먼저 보이는 산이 아닌 색다른 산을 언급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2절 말씀을 보면,
“어찌하여 뭇 나라가 그들의 하나님이 이제 어디 있느냐 말하게 하리이까”
이방 나라들이 이스라엘 하나님을 조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편 시인은 이방 나라들의 모습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4절 말씀입니다.
“그들의 우상들은 은과 금이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라.”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을뿐더러 도리어 우상을 섬기는데 그 우상은 은과 금 곧 사람들이 만든 것이라고 고발하고 있습니다.
곧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은 소위 돈이라는 산입니다. 이 산이 그들의 하나님이요, 이 산이 커지는 것이 바로 이들의 삶의 전부입니다. 그런데 이 돈은 바로 사람이 만든 것입니다. 자기들이 만들어 놓고 자기들이 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돈의 산이 자라는 것을 보며 환호하고 있습니다. 절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우tm꽝스러운 모습입니까? 이것이 이방인들의 모습입니다.
어떤 부자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재산이 늘어나 있고 그 다음 날 일어나면 또 늘어나 있고…, 결국 자기의 재산이 늘어나는 것을 본인도 따라가지 못한다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도 들어 보았습니다. 날마다 커지는 그 산을 향해 날마다 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택함 받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 이방인의 모습을 따르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그 모습이 부러워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에 시인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참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분만을 섬길 것을 독려하고 있습니다. 11절 말씀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여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아울러 시인은 선포합니다. 15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 복을 받는 자로다.” 달리 표현하면,
‘사람들이 만든 우상을 섬기는 자들을 부러워하지 말아라. 너희는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 복을 받는 자로다.’
한글 성경에서는 현재형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복을 받은 자’가 아니라 ‘복을 받는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 정확한 표현은 ‘너희는 복을 받기에 합당한 자로다’일줄 압니다. 그런데 그 복은 어떻게 누리나요? 16절 말씀입니다.
“하늘은 여호와의 하늘이라도 땅은 사람에게 주셨도다.”
우리가 복을 받는 자라는 증거가 ‘돈’이 아닙니다. 바로 ‘땅’입니다. ‘땅’이 사람이 복있는 자라는 증언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아침에 눈을 떠서 땅이 보인다면 바로 우리는 복을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땅을 밟는다면 바로 우리는 복을 받는 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밟고 있는 땅이 우리의 증언자인 것입니다.
이해인 수녀가 이처럼 멋진 시를 지을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만일 이해인 수녀가 돈의 우상을 섬기는 분이라면 이런 시를 지을 수 있었을 까요? 이 수녀님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된 땅을 걸을 때 축복 받는 자신의 모습을 체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고백하는 것입니다.
“좋아하면 할수록
산은 조금씩 더
내 안에서 크고 있다.”
행복의 산이 커지고 있음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작년에 상록회 헌신예배 시 김정수 목사님이 오셔서 설교 말씀을 전해 주셨습니다. 김 목사님이 은퇴하신 후 얼마 전에 스페인에 가셔서 순례여정을 마치고 돌아 오셨습니다. 약 한달간 매일 걸으면서 목적지까지 잘 마치시고 돌아 오셨습니다. 어떤 날은 마라톤 거리보다 더 먼 길을 걷기도 하셨다고 합니다. 김 목사님이 무사히 돌아 오셨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축하한다는 이멜을 보내드렸습니다. 다음과 같은 답신이 왔습니다.

“한달동안 죽도록 걸었는데,
의미를 두고 걸으니깐 온몸이 아파도 포기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고
모든것이 아름답고 걷는 사람들이 위대해 보이더군.”
특히 저의 가슴에 와 닿은 말은 ‘걷는 사람이 위대해 보이더군’이었습니다. 사실 더 위대해 보이는 분들은 한달간 순례의 길을 묵묵히 다녀온 사람들인데 아이러니칼하게도 김 목사님은 걸어다니는 모든 사람이 위대하게 느껴진다고 고백하셨습니다. 그 고백이 저의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한편으로는 좀 의아한 마음도 들었구요. 이번 설교 준비를 하면서 김 목사님의 그 고백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걷는다는 것은 위대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밟고 있는 땅이 우리의 증언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위대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자들이라고 증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땅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사랑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를 위대하게 만들어 주는 땅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땅을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도리어 땅을 돈을 창출하는 수단으로 삼고 있지 않은가요? 그래서 땅은 황폐해지고 있지 않은가요? 인간의 욕심이 공해를 창출하고 있고 또 그 공해가 땅뿐 아니라 우리 인간의 삶에 얼마나 큰 피해를 주고 있는지 너무나 잘 아실줄 압니다.
이 시간 잠시 스크린을 통해서 우리가 얼마나 지구를 망쳐 놓고 있는지 살펴 보겠습니다. 땅을 착취한 댓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Slide 1)
잘 아시는대로 세계지도 입니다. 그런데 가운데 섬이 하나 생겼습니다. 이 섬을 소위 Great Pacific Garbage Patch입니다. 1997년 챨스 무어(Charles Moore)가 태평양을 보트를 타고 건너다가 발견한 것입니다. 3백5십만 톤의 쓰레기가 모여서 만들어진 섬 아닌 섬입니다. 곧 쓰레기 섬입니다.
(Sldie 2)
이 사진은 태평양이 아니라 캐리비안(Caribbean)입니다. 캐리비안에도 이처럼 쓰레기가 모여서 섬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니 태평양은 얼마나 더 크겠습니까? 좀 더 가까이서 찍은 사진을 볼까요?
(Slide 3)
바다에 떠 있는 쓰레기 섬 사이를 보트를 타고 지나고 있습니다.
(Slide 4)
이 쓰레기 섬들의 80%는 땅에서 버려진 쓰레기이고 20%는 배에서 버려진 쓰레기인데 바다 한 가운데 모여있다고 합니다. 물론 대부분이 플라스틱 제품이라고 합니다. 이 쓰레기 섬으로 인해서 매해 십만 마리에 물고기나 고래와 같은 포유류들이 죽어 가고 있으며 백만 마리의 새들이 죽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Slide 5)
거북이가 어릴 때 플라스틱 제품에 걸려서 평생 고생하는 모습을 한 눈에 볼 수 있습니다.
(Slide 6)
마찬 가지로 어릴 때 허리에 플라스틱 제품에 결려서 이렇게 기형적으로 자라게 되었습니다.
(Slide 7)
이 물개는 다 성장한 후에 플라스틱 제품에 걸려서 굶어 죽은 모습입니다.
(Slide 8)
평생 플라스틱 주머니에 갇혀 있는 새의 모습입니다.
(Slide 9)
그러면 정말 바다와 땅이 우리들 것인가요?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관리를 한다면 언젠가 우리에게서 빼았지 않으실까요? 마지막 두 슬라이드를 보실까요?
(Slide 10, 11)
우리가 땅을 이처럼 관리할 때 하나님께서는 땅을 우리에게 주신 보람을 느끼시지 않으실까요?

어떤 분들은 이런 질문을 하실지 모릅니다. 우리만 잘 한다고 해서 세상이 바뀔까요? 1950년 일본의 미야자키현 고지마라는 무인도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 곳에는 원숭이가 20여 마리 살고 있었는데, 이들의 먹이는 주로 고구마였습니다. 원숭이들은 처음에는 고구마에 묻은 흙을 손으로 털어 내고 먹었는데, 어느 날 한 살 반짜리 젊은 원숭이 한 마리가 강물에 고구마를 씻어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원숭이들이 하나, 둘 흉내내기 시작했으며, ‘씻어 먹는 행위’가 새로운 행동 양식으로 정착해 갔습니다.
고구마 씻기를 하는 원숭이 수가 어느 정도까지 늘어나자, 이번에는 고지마섬 이외 지역의 원숭이들 사이에서도 똑같은 행위가 동시 다발적으로 나타났습니다. 불가사의하게도 이곳에서 멀리 떨어진 다카자키산을 비롯한 다른 지역에 서식하는 원숭이들도 역시 고구마를 씻어 먹기 시작했습니다. 서로가 전혀 접촉이 없고, 의사소통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마치 신호를 보내기라도 한 것처럼 정보가 흘러간 것입니다.
미국의 과학자 라이올 왓슨은 이것을 ‘백 마리째 원숭이 현상’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어떤 행위를 하는 개체의 수가 일정량에 달하면 그 행동은 그 집단에만 국한되지 않고 공간을 넘어 확산되어 가는 불가사의한 현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학설은 1994년에 인정되었습니다. 많은 동물학자와 심리학자가 여러 가지 실험을 한 결과, 이것은 원숭이뿐 아니라 인간을 포함한 포유류나 조류, 곤충류 등에서도 볼 수 있는 현상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한 마리의 원숭이의 손이 20마리를 변화시켰으며 아울러 20마리는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수많은 원숭이를 변화시켰다는 이야기입니다. ECC certificate를 받은 KCB교우님들이 힘을 합하여 지구를 사랑한다면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지 않을까요?

말씀을 거둡니다. 다시 한번 이해인 시인의 시 첫 소절을 소개해 드립니다.

“좋아하면 할수록
산은 조금씩 더
내 안에서 크고 있다.”

산뿐일까요? 우리가 하늘과 바다와 땅과 그 안에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좋아하면 할수록 모든 하나님의 피조물들이 우리들 안에서 더욱 아름답게 자라지 않을까요?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땅 위를 걸으셨습니다. 땅 위를 걸으시면서 복된 삶을 누리셨습니다. 땅위를 걸으시면서 “들의 백합화를 보라!”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을 사랑할 때 우리 안에는 신비스러운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땅을 사랑하십시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땅을 밟으십시다. 땅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껏 누리십시다. 시인은 고백합니다.
“하늘은 여호와의 하늘이라도 땅은 사람에게 주셨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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