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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아시는 자들

날짜 : 2012.01.15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하나님이 아시는 자들
성경본문 : 고린도전서 8장 1-7절

저희 가정이 이곳 보스톤으로 옮겨 온 후 어느 날 고래구경을 나갔었습니다. 가 보신 분들 잘 아시겠지만 아주 멀리 배를 타고 나갑니다. 그러나 고래를 본다는 보장도 사실은 없습니다. 저희도 저희지만 준석이가 꼭 고래를 보게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갔습니다. 처음 얼마간은 고래가 잘 안 보이는 것 같다고 선장이 마이크를 통해 말했습니다. 허탕치면 어떡하나 자못 실망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다시 방송이 나오기를 고래가 보인다는 것입니다. 오른쪽 시계방향 몇 시 방향이라고 말합니다. 순간 사람들은 오른쪽 갑판으로 다 몰렸습니다. 곧이어 고래는 사라졌습니다. 모두들 다시 나오려니 기다리고 있는데 이번에는 왼쪽에서 보인다고 선장이 말합니다. 승객들은 왼쪽 갑판으로 100미터 달리기를 합니다.
순간 저는 겁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원래 겁이 많기도 하지만, 어디를 가던 주변을 늘 잘 살피는 버릇이 있습니다. 눈이 많이 오면 시시 때때로 밖을 내다봅니다. 비가 많이 와도 자꾸 궁금해서 밖을 내다봅니다. 안 봐도 되는데…. 이처럼 주변을 살피는 버릇이 있는 저에게 무엇이 눈에 띄었겠습니까?
승객들이 고래를 보기 위해 오늘쪽으로 몰렸다 왼쪽으로 몰렸다 하는데 그와 함께 배가 오른쪽으로 기울여졌다 왼쪽으로 기울여졌다 합니다. 고래 구경 나왔다가 고래나 물고기 밥이 되지 않나 겁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사람들이 오른쪽 갑판으로 몰리면 우리 가족만이라도 왼쪽 갑판에 가 있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래야지 배가 침몰하지 않을테니 말입니다. 그렇다고 어린 준석이 손을 붙들고 다른 승객들과 다르게 행동할 수도 없고….
결국 준석이 엄마가 준석이 손을 잡고 좌우로 뛰어 다니고 저는 초연한 척하면서 고래가 나온다는 반대편에 서 있곤 했습니다. 빨리 고래구경이 끝나기를 기대하면서…. 또한 나만이라도 반대편에 서 있다면 그래도 안전할테니까…. 드디어 고래 구경은 끝나고 항구로 배가 향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혼자서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내가 다른 편에 서 있었기에 우리 모두가 살아서 돌아가는 것이 아닐까?”

십여 년이 지난 후 얼마 전에 이 모든 것은 저의 큰 착각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배의 방향을 안전하게 하는 좋은 길이 있다고 합니다. 특히 쾌속선의 조정 장치에는 조종간이라고 하는 15cm길이의 사각형 금속 조각이 있다고 합니다. 1천명이 갑판 위를 뛰어다니는 것보다 한 사람이 조종간을 움직임으로 큰 배를 훨씬 쉽게 조종할 수 있다고 합니다. 물론 고래구경하는 배에 조정간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 조정간의 역할을 하는 것이 있기에 선장은 느긋이 백여명의 승객들이 좌우로 뛰어 다녀도 항해하지 않았을까요?
조정간.
조정간에 그 누구가 서 있다면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그 배는 안전하게 항해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벌써 새해 들어 세 번째 주일을 맞이합니다. 2012라는 쾌속선에 탄지 두 주가 지났습니다. 앞으로 남은 50주간 우리는 2012라는 배를 타고 어디론가 갑니다. 2012년은 조정간에 서서 멋진 항해를 하시지원하시지 않으십니까? 그러면 오늘 본문 말씀을 상고하며 우리들의 인생의 배의 조정간은 무엇인지 은혜를 나누어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고린도 교회에 쓴 사도바울의 첫번째 서신입니다. 고린도 교회만큼 풍랑이 심했던 교회도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우상숭배를 비롯해 음행과 또한 고소 사건으로 들끌었던 교회입니다. 요즘같으면 교회를 문 닫아도 몇 번이나 문 닫았어야 하는 교회입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만큼 기독교 역사에 빛나는 역할을 한 교회도 드물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문제 위에 문제가 산적해 있었지만 고린도 교회로 인해서 기독교 역사에 뺄 수 없는 두 보화가 탄생됩니다. 사랑의 장이라고 불리어지는 고린도전서 13장과 부활의 장이라고 불리어지는 고린도전서 15장입니다. 왜 이들이 이런 공헌을 할 수 있었을까요? 누군가가 조정간을 붙들고 있었던 사람이 있었지 않았을까요? 누가 어떻게 붙들고 있었는지 살펴 볼까요?
말씀드린대로 고린도 교회 안에 많은 문제가 있었는데 대표적인 하나가 우상숭배였습니다. 특히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어도 되느냐 라는 점이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고린도 교회라는 배가 흔들 흔들 거리고 있었습니다. 우상에게 바쳤던 음식을 먹어도 되느냐 안 되느냐에 대한 많은 토론이 오고 갔던 것 같습니다. 이 소식이 당연히 사도바울에게 전해졌습니다. 이에 사도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절 말씀입니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되느냐 안 되느냐로 두 파로 나뉘어져서 팽팽히 맞서고 있었던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사도바울은 아주 지혜롭게 이 문제에 답변을 줍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저희 교회가 보스톤 노회에 속해 있는데 종종 두 파로 갈려져서 토론을 합니다. 자유진영과 보수진영으로 늘 나뉘어집니다. 그런데 양쪽 다 그냥 막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 그나름대로 근거를 가지고 지적으로 토론을 합니다. 처음 노회에 가서 보니 늘 보수진영이 지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워했습니다.
한 번은 보수진영을 이끄는 어느 목사님이 저 보고도 앞에 나와서 발언을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보스톤 한인 교회의 입장을 대변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나름대로 책을 인용하면서 잘 준비해 갔습니다. 제 차례가 와서 주어진 3분간 열심히 말했습니다.
그런데 앉아서 듣는 사람들의 분위기는 한결 같이 ‘저 친구는 어느 파인가?’ 거기에만 관심을 두고 있지 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의 생각을 바꾸려는 마음으로 듣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절대로 토론에 나가서지 않습니다. 이미 찬반 투표는 노회장에 들어 올 때 다 정하고 들어 온 사람들입니다. 자기나름대로 지식을 갖고 들어 온 사람들에게 아무리 말해도 통할리가 없다는 것을 철저히 느끼게 되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도 같은 분위기였던 것 같습니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우상의 제물에 대한 지식을 고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또 이렇게 편지를 써내려 갑니다. 2절 말씀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지식은 삶의 조정간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의 지식이 조정간이 될 줄 알고 노회 앞에 나가 발언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지식이 조정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정말로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조정간은 무엇일까요? 3절 말씀입니다.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
하나님과 연애하는 사람들이 바로 조정간에 서 있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과 연애하는 사람이 탄 배는 결코 파선되지 않습니다.

사실 사도바울은 삶은 지식이 아니라 만남인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1절에 이렇게 기록했지 않았습니까?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그는 인생은 지식이 아니라 만남인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남의 최고봉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하나님과의 연애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바울의 조정간이었습니다.
그러면 한번 상상해 볼까요?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회라는 폭풍 앞에서 어떻게 하였을까요? 그는 조정간에서 무엇을 하면서 다가오는 폭풍을 맞이 했을까요? 하나님과 어떤 연애를 하였을까요?
신년 예배시 ‘감사하는 회중’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감사하는 회중의 두 가지 감사를 말씀드렸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 대한 무조건적인 감사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벼룩이로 인해서도 감사드리자고 말씀드렸습니다. 벼룩이로 인해서 코리텐붐이 죽지 않고 무사히 수용소에서 석방될수 있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두 번째는 이웃에게 감사하자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매일 감사 편지를 쓰다가 LA대법원 판사가 된 분의 이야기를 전해 드렸습니다.
사도바울도 조정간에서 이 두 가지를 당연히 했을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있는 여러가지 벼룩 아니 폭풍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드렸을 것입니다. 아울러 함께 폭풍 가운데 싸우고 있는 많은 교인들을 생각하면서 한 사람 한 사람 감사의 편지를 쓰는 마음을 안고 조정간에 서 있었을 것입니다.
그뿐 이었을까요? 한가지 더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바로 그 분으로 인해서 감사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그 분을 깊게 만나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바로 그 분과 연애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때 그는 놀라운 체험을 합니다. 3절 말씀 다시 봉독해 드립니다.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 아 주시느니라.”
자기 자신도 하나님께 아신 바 된 자라는 체험을 합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아시고 계시는 것을 체험한 것입니다. 이것 보다 더 귀한 체험이 어디 있겠습니까?
들쥐와 산쥐는 같은 쥐이지만 큰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들쥐는 짝짓기 철이 되면 암수가 만나 같이 살며 새끼를 낳습니다. 그리고 둘만의 관계를 가집니다. 새끼가 어느 정도 성장할 때까지 암컷과 수컷은 새끼를 잘 기릅니다.
한편 산쥐는 짝짓기 철에만 암수가 만납니다. 암컷은 여러 수컷과 짝짓기를 합니다. 이른바 잡혼을 합니다. 그러니 새끼의 아비가 누군지 알 수 없습니다. 암컷은 혼자 새끼를 낳고, 그나마 낳은 지 12일이 지나면 더 이상 돌보지 않는다고 합니다.
과학자들은 들쥐와 산쥐의 차이를 드디어 찾아 냈습니다. 모든 것이 같지만 한 가지 다른 홀몬을 들쥐가 갖고 있었습니다. 과학자들은 말을 붙이기를 애착 홀몬. 들쥐는 사랑의 홀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짝과만 만나고 그리고 새끼를 낳아 잘 기릅니다. 반면 산쥐는 사랑이 없기 때문에 잡혼을 하기 때문에 누가 아비인지 모릅니다. 낳자마자 12일만 지나면 엄마쥐도 떠나 버립니다.
우리들의 신앙도 두 가지가 있지 않을까요? 하나님과 연애하는 신앙, 그리고 필요할 때만 아우성치는 신앙. 필요할 때만 아우성치는 사람들이 폭풍속에서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반면 들쥐신앙을 소유한 사람들은 사도바울과 같은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6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이 고백은 단순한 고백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 가운데서 나오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고백입니다.
한편 이 놀라운 사랑의 고백은 바로 새로운 지식이 됩니다. 이 지식은 교만하게 하는 지식이 아닙니다. 7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사도바울의 고백이 지식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지식은 모든 지식 위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지식 그리고 만물이 아버지에게서 났다고 고백하는 지식 또한 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지식이 바로 슈퍼지식입니다.
이러한 지식의 사람들에게는 우상의 제물의 문제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들은 우상의 제물의 관한 지식을 넘어선 슈퍼지식을 소유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이 지식을 안고 항해를 했던 사도바울은 사랑의 장을 써내려갈 수 있었습니다. 부활의 장을 써내려 갈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의 시작은 조정간, 조정간을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연애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벌써 2012년 호도 두주가 지났습니다. 이미 풍랑을 만나신 분도 계실지 모릅니다. 아니면 작년에 이어 계속되는 풍랑 가운데 계시는 분도 계실지 모릅니다. 남은 일년간 어떤 풍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배는 결코 파선되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도리어 사랑의 장과 부활의 장을 썼던 바울보다는 못하겠지만 멋진 작품을 창조하는 한 해가 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조정간을 떠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하나님과 끝없이 연애한다면 말입니다. 들쥐의 신앙을 갖는다면 말입니다. 다음과 같은 고백을 늘 한다면 말입니다.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이암고 우리도 그로 말리암아 잇느니라.”
사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I love you.” 이 고백을 하며 멋진 한 해를 맞이 하십시다.

말씀을 거둡니다. 슈퍼지식을 소유했던 콘라드 겜프(Conrad Gempf)라는 신학자가 다음과 같은 글을 썼습니다.
“주피터에게 이의를 제기해 보라. 벼락이 당신의 목을 찌를 것이다. 알라에게 말대꾸해 보라 초등학교 선생님에게 말대꾸하는 것보다 더 큰 화를 부를 것이다. 부처를 설득하려 해 보라. 당신에게 조소를 보낼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여호와를 설득하기 시작하면 그분은 미소 띤 얼굴로 소매를 걷어 올리시고 관심 있는 표정을 지으신다. 가장 이상한 것은 그분이 설득에 이기기보다 져 주기를 더 좋아하신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은 자기를 따르는 자들이게 “그래 맞다, 네가 이겼다”고 말씀하시는 유일한 신이다.”

올해도 마음껏 하나님과 연애하십시다. 늘 하나님의 연애 편지를 받으십시다.
“그래 맞다. 네가 이겼다.”
이 편지를 손에 들고 신나게 항해하십시다. 우리는 올해 최고의 항해를 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무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이 편지를 받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편지를 보내야 하지 않을까요?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I love you.”
이 때 주님은 우리에게 편지를 띄우실 것입니다.
“그래 맞다. 네가 이겼다.”
사실 이웃에게 이 말을 안들어도 됩니다. 우리는 이 말을 이웃에게 얼마나 듣기 원합니까? 특히 지적 토론을 했던 사람들로 부터 말입니다. 사람들에게 이 말을 들으려 할 때 도리어 하나님의 음성은 멀어지지 않을까요? 우리는 하나님께로만 듣게 되면 됩니다.
“그래 맞다. 네가 이겼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무도 잘 알고 계십니다. 사도바울은 고백합니다.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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